소설리스트

천방 (360)화 (360/385)
  • 360화. 깨우다

    강왕세자는 엎드려 약을 발랐다.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있었기에 강왕의 시위는 세자의 사정을 봐줄 수가 없었다. 곤장을 몇십 대 때리니 속바지가 피와 살에 달라붙어버려 떨어지지 않았다. 태의는 하는 수 없이 강왕세자의 환부를 약물로 천천히 씻어냈다. 

    물약이 어떤 성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자극적이어서 한 번씩 바를 때마다 아주 찌릿찌릿했다. 

    약을 다 바르고 나니 강왕세자의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점차 열이 올랐다.

    강왕세자는 혼미한 가운데 계속해서 꿈을 꿨다. 

    그는 종실에서 한 세대의 첫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강왕세자가 태어났을 때는 영종황제가 아직 재위 중이었는데 그는 손주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강왕부에 큰 상을 내렸다. 

    선대 태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강왕세자는 종실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고 시시때때로 궁에 들어가 황제를 모셨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항상 누군가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는 한때 선대 황제가 자신을 양자로 들여 황자로 삼으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후에 선대 황제가 등극해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자식을 낳았고 강왕세자는 그제야 자신이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대 태자야말로 모두가 고대하던 특별한 사람이었다.

    선대 태자는 언제 울고 웃었는지 또 언제 침대에 오줌을 싸고 젖을 토했는지까지 전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강왕세자는 궁에 들어가도 더 이상 전처럼 관심을 받지 못했다. 

    갖고 있던 것을 갑자기 잃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강왕세자는 이렇게 평범한 황족의 자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강왕부에서 만큼은 첫 번째였다. 아버지의 첩들이 그에게 동생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주든 간에 그는 여전히 부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들이었다. 

    태자가 점차 성장해 감에 따라 그의 여섯째 동생도 같이 커갔다. 

    여섯째 동생은 비록 적출이었지만 왕부에 자식이 많은 탓에 중간에 끼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어느 날 부왕은 여섯째 동생을 궁으로 보냈다. 

    그 후로 그는 왕부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위치마저 여섯째 동생에게 빼앗겼다. 

    강왕세자가 부왕이 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보였던 반응은 두려움이 아니라 흥분이었다.

    꿈에서도 바라던 소원이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강왕세자는 부왕에게 자신의 노력과 마음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

    “당장 상해에 가서 여섯째를 데리고 돌아오너라. 반드시 빨리 데려와야 한다.”

    부왕은 이렇게 당부했다. 

    강왕세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강왕이 말했다.

    “태자께서 돌아가셨다. 폐하께서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으니 틀림없이 아주 상심하셨을 것이야. 여섯째가 하루빨리 귀경해 폐하를 위로해드려야 할 것 같다.”

    강왕세자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그는 여섯째처럼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아버지, 여섯째를…….”

    “아니면?”

    강왕은 담담한 눈길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섯째는 어려서부터 궁에 들어가 태자와 함께 먹고 자고 양자처럼 자랐다. 이제 태자가 없어졌으니 폐하께서는 당연히 그 아이를 양자로 들일 게야.”

    “하지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거라.”

    강왕은 손사래를 치고 곧 공무를 보러 가버렸다. 

    강왕세자는 그저 묵묵히 짐을 꾸려 서둘러 상해로 갔다. 

    강왕세자는 왜 꼭 여섯째여야만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폐하께서 양자를 들여야 한다면 왜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무 어느 방면이든 자신이 남보다 못한 구석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적자가 있어 황실의 대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왕이 결정한 사안에 자신이 참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섯째가 궁으로 들어갈 때부터 부왕은 이미 그를 위해 길을 마련해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뒷일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선대 황제는 너무 비통한 나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여섯째 그 바보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용포를 입고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수년 동안 온갖 노력을 다했던 강왕세자는 황제가 즉위한 뒤 도리어 경성에서 쫓겨났다.

    * * *

    강왕세자는 갑자기 놀라 잠에서 깼다.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는데 상처가 아파서인지 꿈 때문에 놀라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삼경을 알리는 딱따기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마치 귀신 그림자 같았다. 

    방 안에는 야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어린 시녀 한 명만이 발판 근처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강왕세자는 밤새 엎드려 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프고 목이 말랐다. 그는 자리를 좀 옮기려고 하다가 몸이 뒤집히는 바람에 엎어졌다.

    “아! 세자 전하!”

    어린 시녀가 놀라 잠에서 깼다. 시녀는 황급히 강왕세자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가 없어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밖에서 야간 당직을 서던 시녀들이 몰려 들어왔다. 시녀들은 등불을 켜고 세자를 에워싼 채 저마다 괜찮냐며 안부를 물었다.

    강왕세자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금처럼 여자가 싫었던 적이 없었다.

    “전부 닥쳐라!”

    그는 쉰 목소리로 꾸짖고는 시끄럽게 재잘거리던 시녀들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세자비는?”

    ‘내가 이렇게 다쳐 누워있는데, 설마 밤에 돌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래도 벽지라는 시녀가 눈치가 빨라 얼른 대답했다. 

    “세자비께서는 공자를 보러 가셨습니다. 세자 전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바로 가서 아뢰겠습니다.”

    강왕세자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녀들은 눈치 빠르게 얼른 흩어져 사람을 부르러 가고 물을 따르고 땀을 닦는 둥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잠시 후 강왕세자비가 왔다.

    그녀는 얇은 저고리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분명히 좀 전까지 쉬다가 온 것 같았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강왕세자의 눈에 들어오자 강왕세자는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결혼 전의 부정을 받아들여 주었는데도, 감사는커녕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디 다녀왔소?”

    강왕세자비는 손을 흔들어 시녀들을 물러나게 하고 직접 강왕세자에게 약을 먹였다.

    “건(建)이가 사람들한테 소문을 주워듣고 당신이 죽는 줄 알고 쉴새 없이 울어대는 바람에 겨우 달래서 재우고 같이 한숨 자다 왔습니다.”

    아건은 그들의 적자로 올해 겨우 여섯 살이었다.

    강왕세자는 약을 삼키며 콧방귀를 꼈다.

    강왕세자비도 더는 변명하지 않고 그가 약을 다 마시길 기다렸다 물었다.

    “땀이 이렇게 많이 나는데 몸을 좀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단오가 지난 시점이라 날씨가 한창 더울 때였다. 강왕세자는 약을 바른 뒤에 몸에 피도 나고 땀도 나 불편했기 때문에 침묵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강왕세자비가 막 사람을 부르려는데 그가 물었다.

    “아버지는?”

    강왕세자비가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이 시간이면 아버님께서는 주무시겠지요.”

    강왕세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녀가 시녀를 부르게 내버려 두었다. 나타난 시녀는 그의 몸을 닦으면서 이부자리도 다시 새로 깔았다. 

    그가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엎드리자 강왕세자비는 손을 흔들어 시녀들을 물리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 천천히 그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부군, 화나셨습니까?”

    그녀가 느릿하게 물었다.

    강왕세자는 침대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잠시 후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생각에는 아버지한테 내가 더 중요한 것 같소, 아니면 여섯째가 더 중요한 것 같소?”

    강왕세자비의 부채질이 잠시 멈췄다. 

    “내가 오늘 큰 망신을 당하고 또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는데도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으셨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강왕세자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께서 당신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당신은 경성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가 다 나을 때쯤이면 틀림없이 이 풍파도 다 지나갈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부왕이 그에게 화풀이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애초에 이 말썽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그래 놓고 귀경하여 난장판을 수습하라고 강요받은 부왕에게 좋은 내색까지 바란단 말인가?

    하지만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강왕세자는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사건건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자신이 부왕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도 부왕은 여섯째가 아무 노력도 없이 황위에 앉게 했다. 

    분명 자신이 줄곧 부왕 곁을 지켰음에도 부왕은 가장 좋은 것을 여섯째에게 주어버렸다. 

    오늘의 이 장형은 마치 자신을 깨운 것 같았다.

    부왕에게는 몇 번째 아들이 황제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섯째가 있는 한 자신은 영원히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 * *

    강왕세자가 한바탕 두들겨 맞은 것으로 이 일은 그냥 이렇게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승원궁에 약을 묻은 사건에 대해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논쟁이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경성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강왕이 돌아온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날 루안은 통상적인 의정을 끝낸 뒤 상소문들을 정리하고 퇴근했다.

    루안은 가는 길에 형부의 설 상서를 만났다.

    오늘은 소조회(小朝会)가 열리는 날이라 참가한 사람은 재상 몇 명과 각 부의 당관(*堂官: 부서의 장, 우두머리)들뿐이었다. 루안은 직급이 가장 낮고 하는 일은 가장 많았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설 상서는 평상시처럼 업무를 처리하고자 일찌감치 관아로 향하는 길이었다.

    “설 대인.”

    루안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

    설 상서가 빙그레 웃었다. 

    “루 통정이었군, 이리 우연히 만났으니 같이 좀 걷는 것이 어떤가?”

    설 상서가 길을 막고 이렇게 청하는데 루안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 상서는 길을 안내하던 어린 내관을 돌려보내고 물었다. 

    “자네 아직 강왕을 못 만나 뵈었지?”

    당연히 이 질문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루안은 멀리서 강왕을 본 적은 있을 터였다. 강왕이 경성에 온 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니,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루안이 강왕과 얼굴을 마주할 날은 있을 터였다. 아마 루안이 강왕부에 갈 일이 생기거나 혹은 강왕과 몇 마디 나눌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도 쉽지는 않았다. 

    루안이 웃으며 웃었다.

    “하관은 그저 일개 통정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감히 강왕 전하를 귀찮게 하겠습니까?”

    설 상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루안의 모습에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에 설 상서는 루안이 관리로서 처신을 잘한다고 칭찬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일에서만큼은 이렇게 고집을 피운단 말인가!

    설 상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일은 자네 작품이지 않나! 강왕부에서 분명 자네를 기억해둘 텐데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강왕 전하는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설 대인,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안이 공수하며 말했다. 

    “하지만 하관은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습니다. 강왕께서도 틀림없이 이해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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