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9)화 (359/385)
  • 359화. 의심

    관아에 구경 왔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상용은 엉덩이에 피를 흘리고 있는 강왕세자를 보며 작년에 정양문에서 있었던 소달 사건을 떠올렸다.

    ‘두 사람 다 같은 역귀(*瘟神: 재앙을 초래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에게 미움을 샀잖아? 결과도 똑같군.’

    “……상 수상?”

    상용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강왕에게 인사했다.

    “전하, 무슨 분부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강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고 부드럽게 말했다. 

    “본왕의 이런 처분이 상 수상의 마음에 드는가?”

    상용은 못 알아듣는 척했다.

    “오늘 하관은 그저 증인으로 이 자리에 왔을 뿐입니다. 그 질문은 평왕 전하께 하셔야 마땅할 듯싶습니다.”

    강왕은 웃으며 좀 더 부드러운 말투로 마치 진심인 것처럼 말했다. 

    “상 수상은 폐하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이지 않소. 폐하께서 등극하신 후 4년 동안 전적으로 수상의 도움에 의지하여 왔으니 본왕은 수상께 감사한 마음뿐이오. 저 불효자가 일전에 상 수상에게 무례를 범한 것은 본왕이 대신 사과하겠소. 상 수상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니 부디 그를 나무라지 않기를 바라오.”

    상용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족이신 세자 전하를 하관이 감히 어찌 나무라겠습니까. 그저 세자께서 하관을 오해하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는 다시 한번 강왕세자를 흘끗 보고 과감하게 화제를 돌렸다.

    “전하, 세자께서 많이 다치셨으니 어서 데려가서 치료하십시오.”

    강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돌아서더니 평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백부님, 오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주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카는 먼저 이 녀석을 데리고 돌아가 잘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평왕부로 문안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평왕은 방금 잠에서 깬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내가 힘들긴 뭐가 힘들었겠나. 아이고, 온몸이 피투성이네. 너무 심하게 때렸구먼. 병이 깊어지지 않게 얼른 데려가서 태의를 불러 치료하게.”

    강왕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시위들을 이끌고 강왕세자를 들쳐 메고 떠났다. 

    강왕부의 행렬이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상용이 평왕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평왕 전하, 아주 오랜만에 외출하신 것 같습니다.”

    평왕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늙으니 팔다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움직이기가 싫더군! 이제 됐어. 할 일이 끝났으니 본왕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네. 상 수상도 얼른 돌아가게.”

    평왕부의 시위가 앞으로 나와 평왕을 부축하여 마차에 태우고 곧 상용에게서 멀어져 갔다.

    남겨진 상용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 * *

    집에 돌아오자 지온이 그의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유신지 공자는요?”

    루안이 대답했다.

    “구경을 다 했으면 당연히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오.”

    지온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집에 가라고 떠민 거죠? 좀 전에 보니 분명히 당신이랑 좀 더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당신도 참 쩨쩨하네요. 그 사람한테 밥 한 끼도 안 사주는 걸 보면.”

    루안이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이 정도의 봉록으로 큰 일가를 부양해야 해서, 남을 대접할 처지가 못 되오.”

    지온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불쌍한 대공자를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루안은 이렇게나 쩨쩨한 사람인데, 누군가는 기어코 루안과 가까이 지내려고 애를 썼다. 

    부부는 후원으로 가서 대장공주를 만나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 

    대장공주는 한숨을 쉬며 루안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좀 괴로워질 것 같으니, 당분간은 좀 조심하거라. 트집 잡힐까 봐 떨 필요까지는 없고.”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제게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 * *

    휴가가 끝나고 그다음 날 조회에 루안은 평소와 같이 참석했다. 

    황제는 그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조회가 끝나자 루안은 상소문을 가지고 어서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내관을 쫓아내더니 루안을 가까이 불렀다. 

    “황숙께서 돌아오셨네, 자네도 알고 있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는 초조한 듯 방 안을 빙빙 돌았다. 

    “형님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황숙께서 모를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황숙은 오해이니 짐더러 더는 따지지 말라고 하더군. 후사를 끊는 건 일반 백성들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황제인 짐은 도리어 화도 마음대로 낼 수 없다네.”

    루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소리쳤다. 

    “무슨 말 좀 해보게!”

    “폐하, 신이 무슨 말을 해드릴까요?”

    황제가 말했다. 

    “당연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하라는 거지. 형님이 한바탕 두들겨 맞긴 했지만, 그 덕분에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제 짐이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말인가?”

    “예.”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그가 루안을 부른 이유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라는 것이지 결코 찬물을 끼얹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 감히 강왕 전하를 등지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

    루안이 인정머리 없이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황제는 붉으락푸르락하며 이리저리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결국 낙담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짐은 처음에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네. 당시에 그들이 짐을 강제로 경성으로 데리고 와 황제의 자리에 앉혔지. 짐은 부왕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혼자 경성에 두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네. 하지만 부왕께서는 감당할 수 없어도 감당해야만 한다고 하셨지.”

    황제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짐이 요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자네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처음에는 상소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대신들도 마치 집안 말아먹는 자식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짐을 보았지.”

    그는 등극하기 전에 나라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해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한 나라의 군주가 된 그는 처음에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상소문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신하가 책략을 물어도 대답해줄 말이 없어 매일을 좌절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도 강왕은 이미 정사당에 일손을 배치했다고 말할 뿐, 그의 감정 따위는 전혀 생각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루안이 도망쳐 상경한 덕에 황제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황제는 루안의 지도로 신하를 대하는 법, 궁중의 일손들을 복종시키는 법 등을 배웠고 루안의 손을 빌려 측근도 양성했다. 황제는 그제야 비로소 천천히 황제다워졌다. 

    “지금까지 겨우 버텨냈는데, 그들이 다시 돌아왔네.”

    황제가 자조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짐은 그들에게 그저 황위를 차지하는 도구일 뿐이겠지?”

    이 말을 들은 루안은 한숨을 쉬고 몸을 낮추며 예를 올렸다. 

    “폐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짐이 뭐 틀린 말 했나?”

    루안이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은 전과는 다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을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마치 한 줌의 불씨처럼 황제의 화를 돋웠다. 그는 발로 의자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그가 돌아왔다고 짐이 궁 안에서조차 속 시원히 말 한마디 못 한다는 건가?”

    의자가 뒤집히는 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호은이 곧 물었다.

    “폐하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황제는 아주 거칠게 말했다. 

    “없다! 저리 꺼져라!”

    호은이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했다.

    “예.”

    평상시라면 황제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문득 무언가 떠올라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혹시 호은이…….”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호 내관은 내정에 속해있어 신이 조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다시 물었다. 

    “폐하, 혹시 알려져선 안 될 일 중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황제는 불확실한 말투로 말했다. 

    “아마 없을 걸세…….”

    그는 루안의 손을 빌려 조정의 모든 측근들을 양성했지만, 궁 안의 대부분의 일은 호은의 손을 거쳤다. 이렇게 생각하니 황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루안은 화제를 돌려 좀 전의 그 일로 돌아갔다.

    “폐하와 강왕부가 혈연으로 얽혀 있는 데다 증거도 없으니 세자의 일은 이제 이렇게 처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강왕세자가 지난날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리니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황숙께서 형님을 이렇게까지 보호하시는 게 설마 정말로 내 대를 끊고 형님의 아이로 황위를 잇게 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겠지?”

    루안은 웃으며 모호하게 말했다.

    “폐하,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시니 앞으로 많은 자손을 두실 수 있을…….”

    그가 아직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말을 가로 챘다. 

    “고의로 그런 걸 없던 일로 치라니. 이번 일을 없던 걸로 치면 설마 다음번이라고 없을까?”

    이 물음은 오히려 대답하기 곤란해서, 루안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초조하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또 물었다.

    “루 통정, 얼버무리지 말고 짐에게 솔직히 말해주게. 앞으로 계속 이렇게 유린 당할 수밖에 없을 거란 말인가?”

    루안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몇 년 동안 들인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황제는 마침내 권력을 다투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강왕이 돌아왔는데도 권력을 내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꼼꼼하게 닦았다. 그는 황제가 짜증을 참지 못할 때쯤 느릿느릿 대답했다. 

    “폐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강왕께서 막 귀경하셨으니 아무래도 상황을 좀 지켜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루안이 천천히 말했다. 

    “강왕 전하께서 귀경하셔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위에서 세자를 눌러줄 사람이 생겼으니 폐하께서 더 이상 세자를 신경 쓸 필요가 없으시다는 겁니다.”

    황제는 이게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왕이 이렇게 장남을 감싸고 도니 몇 마디 꾸짖고 그냥 용서해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강왕은 세자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루안이 이렇게 말하니 그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 * *

    루안은 상소문의 처리를 끝내고 출궁했다.

    그리고 황제는 가마를 타고 감당궁으로 갔다. 류명주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신첩, 폐하께서 화춘궁에 가실 줄 알고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옥비가 죽은 뒤에 황제는 점차 황총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 이해하였다. 황제는 신비 쪽에 자주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고 황후와의 감정도 더욱 깊어졌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네 연주가 듣고 싶어서 왔다.”

    그는 이 말을 하자마자 호은에게 지시했다. 

    “황후가 괜히 기다리면 안 되니 네가 가서 짐이 오늘 못 간다고 알리 거라.”

    호은이 대답하고 사람을 부르려 했다. 

    황제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정중해 보이게 네가 직접 가거라.”

    호은은 잠시 망설였다. 

    ‘무슨 큰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정중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희가 여기서 시중을 들면 될 것이야.”

    호은은 그가 있어 별다른 의심 없이 웃으며 몸을 굽혔다.

    “예, 소인 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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