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6)화 (356/385)
  • 356화. 그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강왕세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버지 고정하십시오! 오씨가 비록 괘씸하긴 하지만 적자를 낳은 사람입니다. 지금 강왕부는 이미 뭇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더 이상의 파란은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엎드려 소리쳤다.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오씨의 죽음을 면해 주십시오!”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왕세자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눈을 들어 강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왕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했다.

    ‘어라?’

    강왕은 찻잔을 들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누가 오씨를 죽인다고 했단 말이냐?”

    ‘어, 어?’

    오 씨가 결혼 전에 정조를 잃고 딸까지 낳아 그 딸을 강왕부의 핏줄로 위장했는데도, 설마 죽이지 않겠다는 건가?

    강왕세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강왕이 갑자기 손을 들어 찻잔을 던졌다. 

    “윽!”

    강왕세자는 신음하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부왕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너다!”

    강왕이 소리를 질렀다. 

    “소달이 루안한테 모함을 당했고 승원궁의 일도 루안이 발견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상용이 널 경성에서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느냐?”

    강왕세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

    “오 씨가 편지를 쓰지 않았더라도 너는 여기서 계속 버티고 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

    “…….”

    “이런 멍청한 놈!”

    “…….”

    세자비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빌었다.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부군이 순간 분노에 휩싸여 제대로 판단을 못 했을 뿐입니다.”

    강왕은 화를 낸 뒤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차가 묻은 손을 닦았다. 그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가 이놈을 대신해 변명할 필요 없다. 이 녀석 성질이 어떤지 본왕이 모를 리가 있느냐? 여섯째가 황위에 앉으니 대국을 장악한 거라고 생각해 경계심을 늦추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했겠지. 허, 여섯째 자리를 탐내다니 이 무슨 야무진 꿈이란 말이냐!”

    강왕세자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다급하게 엎드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버지, 소자가 한 일은 모두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섯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봉지로 돌아가시기 전에 여섯째를 위해 모든 것을 잘 안배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스스로 제구실을 할 수 있게 되자 우리와 맞서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섯째는 아버지께서 고른 소달을 죽여버리고 정국공에게 금군을 넘겨주었습니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우리와 관계를 끊고 선대 황제의 좋은 아들이 되겠다는 생각입니까? 이 황위는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인데 그가 전혀 감사할 줄 모르니 차라리 아버지께서 직접…….”

    강왕은 그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

    “그 물건들을, 4년 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냐?”

    그 약은 확실히 4년 전에 묻힌 것이었다.

    강왕세자는 한껏 움츠러들어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강왕은 장남을 냉정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가 아직 이 자식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도 다 못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꺼져라! 전하를 만나야 한다!”

    “왕비마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인이 들어가서 아뢰고…….”

    “아뢴다고? 내가 전하를 만나겠다는데 굳이 너 같은 천한 하녀를 통해야만 하느냐? 저리 꺼져라!”

    “왕비마마…….”

    강왕세자는 머릿속이 위잉 울리는 듯한 느낌에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고정하십시오. 모두 소자가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탓입니다…….”

    강왕은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아 담담하게 지시했다.

    “들라 하라.”

    강왕비는 들어오자마자 훌쩍거리며 상석으로 달려들었다. 

    “전하! 소첩이 밤낮으로 학수고대하였는데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아쉽게도 그녀가 강왕의 곁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 늙은 내관이 그녀를 막았다. 

    늙은 내관이 빙그레 웃었다. 

    “왕비마마 안녕하셨습니까, 전하께서 긴 여정으로 지쳐 몹시 피곤한 상태이십니다. 그러니 좀 양해해주시고 거기 서서 말씀해주십시오.” 

    “네가 뭔데 감히 내 앞을 막느냐!”

    “소인이 어찌 감히 마마를 막겠습니까.”

    늙은 내관은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강왕비는 못 견딜 정도로 화가 났다. 겨우 강왕이 귀경할 때까지 기다려 이제 좀 울며 하소연해서 오 씨 이 천한 계집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려던 찰나에 뜻밖에도 이런 늙은 소인에게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전하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고 천한 노비마저 감히 자신을 무시한단 말인가?

    “네놈…….”

    그녀가 노하여 꾸짖으려는데 귓가에 강왕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됐다, 물러나라.”

    내관이 공손하게 대답한 뒤 길을 비켰다. 

    강왕비의 화가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것 보아라, 전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내가 있지 않으냐!’

    “전하!”

    강왕비는 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강왕에게 달려들었다.

    간신히 짜냈던 눈물이 이미 말라 버려 그녀는 울부짖는 소리로 대신했다.

    강왕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불쾌해하며 그녀가 뻗은 두 손을 받쳤다.

    강왕은 이런 장면을 예전에도 자주 보았다. 강왕이 시첩을 총애할 때마다 강왕비는 매번 이렇게 와서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래도 젊었을 적에는 강왕비가 워낙 미인이라 그나마 인내심을 좀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반백에 가까워 아무리 관리를 잘했어도 울기 시작하면 얼굴에 주름살이 패고 정말 보기 흉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당신도 이제 할머니가 다 됐는데 어찌 이 모양이오?!”

    강왕이 호통을 쳤다. 

    강왕비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강왕은 잡혀있던 팔을 빼고는 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 보시오! 울면서 본왕을 만나야겠다고 소리를 질렀잖소. 도대체 무슨 일이오?”

    강왕비는 아주 우둔한 사람이었지만 남편의 기분만은 그런대로 잘 파악했다. 강왕비는 남편의 말투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지금은 고자질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왕비는 여러 번 망설이다 말했다. 

    “소첩은 그저 전하를 보고 싶어서…….”

    강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봤으니 가보시오!”

    강왕비는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가버리면 오씨한테 비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이 상황을 어떻게 뒤집지?’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불쑥 말을 내뱉었다.

    “전하, 일이 왜 이리된 줄 아십니까? 모두 오씨라는 저 천한 계집이 분란을 일으키고 담이 앞에서 이간질해서 루안의 부인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화신의 제자라 신선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업보를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자비는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 시어머니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런 괴상한 이유를 대며 사실이라고 말하다니 부왕께서 들으면 또 화를 낼 것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강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화신의 제자라니?”

    강왕비는 그가 자기 말에 대꾸해주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더욱 과장하여 말했다. 

    “그 사람은 대장공주의 양녀입니다. 전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그 사람이 어찌나 신령한지 화신첨을 흔들 때마다 백발백중입니다. 매월 초마다 조방궁이 제비를 뽑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소?”

    강왕은 그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세자 부부를 보았다.

    강왕세자는 마음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왕께서 언제부터 그런 것에 흥미가 있으셨지?’

    그가 대답했다.

    “예, 루안의 새신부는 원래 조방궁 능운진인의 제자였습니다. 조방궁에서 능운진인의 복을 빌다 재주가 뛰어나 대장공주의 눈에 들었고 그래서 이 혼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강왕비는 아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더 힘을 냈다. 

    “담이의 말이 맞습니다. 그녀는 아주 대단하지요! 여덟째가 그녀에게 미움을 사서 영문도 모르고 해를 입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작년 칠석에는 내가 그녀를 좀 혼내주려다가 결국은…….”

    강왕세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머니!”

    ‘그 일을 내가 얼마나 애를 써서 덮었는데? 왜 아직도 그 일을 언급하는 거야! 어엿한 왕비가 상놈들이나 쓰는 수단으로 어린 처녀와 맞선 것이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거기다 고자질까지!’

    “아버지.”

    강왕세자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덟째의 일은 소자가 알아봤지만, 그녀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잠시 받아들이지 못하시고 실수를 하신 겁니다.”

    강왕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물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몇 번이나 그 계집과 맞섰는데 전부 실패했단 말이냐?”

    강왕세자는 멍해져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강왕이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말했다.

    “보아하니 네 어미의 말이 맞는 것 같구나.”

    * * *

    대장공주는 더위를 피하고자 아침밥을 물가에 있는 누각에서 먹었다.

    구곡교(九曲桥)에서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지온과 루안이 서로 손을 잡고 오는 것이 보였다. 

    대장공주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웃었다.

    “오늘 어찌 시간이 났느냐? 안이는 관아에 안 가 봐도 되느냐?”

    지온이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3일이나 휴가를 냈는데, 하루쯤 더 내도 괜찮아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를 낸 이유를 대충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대놓고 물어보기는 조금 불편했다. 

    매고고가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젓가락을 두 개 더 놓을까요?”

    지온이 눈짓을 보냈다. 

    “예, 주세요, 어젯밤에 고고가 만든 생선탕이 생각나서 침이 고여 혼났어요.”

    매고고가 얼른 눈치채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쏘가리 몇 마리를 받았는데,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니 아가씨께서 좀 기다리셔야겠네요.”

    이렇게 말하며 매고고는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하고는 시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누각 안에는 그들 세 사람만 남았다.

    매고고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대장공주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니?”

    지온이 웃음을 거두고 대답했다.

    “강왕이 돌아왔어요.”

    대장공주는 일순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

    “어젯밤에요.”

    지온이 루안을 흘끗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방금 소식을 받았어요. 제가 암위에게 가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어요.”

    대장공주는 책상을 내리치며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시기를 딱 맞추어 왔구나!”

    세 사람 모두 표정이 무거웠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강왕세자를 경성에서 쫓아낼 수 있는데!

    “왜 지금 돌아온 거지? 설마 그 개자식이 제 아비를 부른 게냐?”

    대장공주가 물었다.

    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강왕세자가 어찌 자기가 무능하다는 걸 아버지한테 알릴 수 있었겠어요. 아마 경성에 심어둔 강왕의 밀정이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서신을 보냈을 거예요.”

    대장공주가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강왕이 돌아오자 정세가 단번에 복잡해졌다. 지금은 강왕부와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었다. 정국공이 금군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조정에서 무게감 있는 인물을 포섭하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다 루안이 황제에게 들인 노력도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컸다.

    대장공주는 재빨리 이리저리 생각해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궁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그러나 루안이 도리어 그런 그녀를 가로막았다.

    “장모님, 가지 마십시오.”

    대장공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가지 말라는 게냐? 그놈이 궁에 들어갈 것이 뻔한데 본궁이 가서 알아봐야지.”

    루안이 말했다. 

    “강왕이 상경했다는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도 않았는데, 장모님께서 지금 가시면 그들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대장공주가 잠시 멈칫했다. 

    이 말도 맞았다. 

    루안이 말을 이었다. 

    “좀 기다렸다 모두가 알게 되면 그때 가시지요. 때가 되면 장모님께서 궁으로 가셔서 강왕에게 반기를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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