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5)화 (355/385)
  • 355화. 돌아왔다

    잠시 후, 루안이 눈을 뜨고 말했다.

    “나 좀 누워야겠소.”

    지온이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히고 잠시 생각해보다가 물었다.

    “고찬을 불러올까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와도 소용없소. 문 닫고 시녀들은 가서 쉬라고 하시오. 당신이 나랑 같이 있어 주면 되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대로 했다. 

    잠시 지온이 그를 지키고 있는데 지온의 눈에 그가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보였다. 지온은 루안의 땀으로 젖은 수건을 대야로 가져다 짰다. 두 번 정도 이마를 닦았을 무렵, 지온은 그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지온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의 옆에 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안이 걸친 홑옷이 땀 때문에 계속 젖었다 말랐다 했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올 때쯤 되자 그는 비로소 길게 한숨을 쉬고 눈을 떴다.

    지온이 얼른 일어나 물었다.

    “좀 나아졌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쉰 것을 보니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루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졌소.”

    지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불렀다.

    저쪽의 루안도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지온이 다급하게 그를 부축하며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괜찮아요?”

    루안은 그녀를 놓아주고 싶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한 것이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소, 우선 목욕물을 좀 준비해주시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고찬을 좀 불러 주시오.”

    ‘역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거지?’

    지온은 걱정이 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지온은 그가 목욕하러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서아를 불러 지시했다. 

    “앞채에 가서 고 대인을 찾아 잠깐 오라고 해라. 부산 떨지 말고 조용히 다녀와. 태비께서 놀라지 않게.”

    “예.”

    서아가 대답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찬이 수염을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채 왔다. 그가 긴장하며 물었다.

    “부인, 통정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지온은 어젯밤의 상황을 설명했다. 

    고찬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과연 그렇군요.”

    “무슨 뜻인가?”

    고찬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것은 마치 통정의 몸에 사는 괴물과 같습니다. 매달 먹는 해독제는 바로 그놈의 식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배불리 먹이면 아무 문제도 없지요. 하지만 배가 고프면 난동을 피우며 그분의 피와 살을 갉아 먹습니다. 우리가 이 괴물을 단번에 죽일 수는 없습니다. 약주를 먹여 식욕을 조금씩 줄이고 해독제를 복용하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지요. 통정께서 3개월 동안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셔서 발작이 전보다 더 맹렬하게 일어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지온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젯밤 내내 앓았는데 아직도 견디기 힘들어 보이네.”

    고찬이 말했다. 

    “고통을 완화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해독제를 복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독성이 커져 대인이 3개월을 참고 견딘 의미가 사라질 겁니다.”

    “그럼 완화할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고찬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소인이 통정께 침을 한번 놓아보겠습니다.”

    저쪽의 루안은 벌써 목욕을 마쳤다. 그는 시녀의 시중을 받지 않고 굳이 자기 혼자 걸으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온이 그를 부축해서 나왔다.

    “통정.”

    고찬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루안은 그를 쓱 보더니 싫은 티를 내며 물었다.

    “세수는 하고 왔나?”

    고찬은 얼굴을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방금 급하게 오느라…….”

    “가서 씻고 오게.”

    고찬은 미안한 듯 공수하며 급히 씻으러 갔다.

    지온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당신 아직 아프잖아요. 그걸 못 참아요?”

    루안이 말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지만 메스꺼운 건 참을 수 없소.”

    지온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당신 말이 다 맞아요…….”

    고찬은 금방 돌아왔다. 그는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얼굴도 깨끗이 씻고 수염도 정리한 것 같았다.

    그는 루안의 맥을 짚으며 말했다.

    “이번 발작은 좀 심해서 며칠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안이 미간을 구겼다. 

    “좀 누를 수 없나?”

    지금 한창 다사다난한 시기라 며칠 동안 관아에 가지 않는 건 아무래도 좀 불안했다.

    고찬이 말했다. 

    “눌러 놓았기 때문에 며칠 쉬는 정도로 그치는 겁니다. 어젯밤의 발작도 통정이시니 이만큼 견뎌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해독약을 먹었을 겁니다.”

    루안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고찬은 그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은바늘을 들고 혈 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통정께서는 3개월 동안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괴물이 아마 또 발작을 일으킬 겁니다. 이번에 견뎌내시면 괴물의 원기가 크게 상할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겪지 않으실 겁니다.”

    침을 놓은 고찬이 말했다.

    “통정께서는 푹 쉬십시오. 제가 한등을 불러 휴가를 내라 하겠습니다.”

    “알겠네.”

    * * *

    지난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두 사람은 루안의 상태가 호전되자 침대를 정리하고 한숨 푹 잤다.

    지온이 잠에서 깨니 이미 정오였다.

    그녀는 루안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북양태비가 정청에서 식사하던 중에 지온이 오는 것을 보고 손짓했다.

    “온아, 일어났니?”

    지온이 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어머님.”

    지온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 것을 시어머니에게 현장에서 딱 걸려버렸다.

    하지만 북양태비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지온에게 반찬을 집어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이는 방에 있니?”

    지온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북양태비가 웃었다.

    “새벽에 고찬이 내원으로 달려갔는데 내가 어찌 모르겠어?”

    지온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서 지금 자고 있습니다.”

    북양태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네가 잘 좀 보살펴주렴.”

    지온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밤이 되자 루안의 몸에 있는 독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이것 때문에 지온은 조금도 그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고 다른 일은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힘들게 사흘을 견뎌내고 나니, 루안도 더 이상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정신도 천천히 호전되기 시작해서 그녀는 비로소 가슴속에 얹혀있던 큰 돌이 내려간 것 같았다.

    “일단 뭐 좀 먹어요.”

    지온이 죽을 담아주며 말했다. 

    “고찬이 이번에 견뎌내면 다음번 발작은 주기가 길어지고 독성도 가벼워질 거라고 했어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고생 많았소.”

    지온이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서아가 나타난 이에게 인사하려는 듯했지만 서아의 말이 잘렸다. 뒤이어 주렴이 거칠게 걷어 올려지며 구슬이 서로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들렸다. 

    “공자, 큰일 났습니다!”

    한등이 말했다.

    “강왕이 돌아왔습니다!”

    * * *

    강왕은 아주 조용히 돌아왔다.

    큰 마차 두 대에 10여 명의 수행 종자가 조용히 시내로 들어왔다.

    정국공이 금군을 장악하고 있긴 했지만, 이 소식을 제일 먼저 듣지는 못했다. 

    한밤에 강왕부의 어느 정원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세자비는 윗사람을 향해 공손히 몸을 숙였다. 

    “이 며느리가 소문이 새어 나갈까 봐 간단히 이곳만 정리했습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아버님께서 양해해주십시오.”

    인사를 받은 남자는 바로 강왕이었다.

    그는 약 50세의 나이에 희고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가지런히 묶고 수염을 잘 다듬어서 점잖고 고상해 보이는 것이 집현원(集贤院)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 같았다.

    황제가 즉위하기 전에 강왕은 사림(仕林)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본분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한가할 때면 왕부에서 시회를 열었다. 비록 호색한에 사치스럽다는 결점이 있긴 했지만, 친왕에게 그런 결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4년 전 그때, 벼락이 치는 듯한 일련의 격변이 일어나 의안왕이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 그때, 많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던 이 강왕 전하가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야심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강왕은 눈을 들어 앞에 꿇어앉은 큰며느리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준비를 잘해주었구나,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강왕세자와 세자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강왕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 

    “누가 너더러 일어나라고 했느냐?”

    강왕세자는 멍하니 자기 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에 그는 몸서리를 치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다시 꿇어앉았다. 

    “아버님…….”

    세자비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남편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자신 혼자 서있는 것은 다소 부적절한 것 같았다.

    강왕은 며느리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조정 일에 관해 물었다. 

    “편지에서 정확하게 언급을 안 했는데, 너희들은 왜 상용의 미움을 산 것이냐?”

    강왕이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내자 강왕세자는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부왕 앞에서 핑계를 댈 용기도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하게 승원궁에서 약봉지를 발견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자신이 계략에 걸려서 이 일이 누설된 대목을 이야기할 때, 그는 난처해하며 말을 멈췄다. 하지만 강왕은 그가 이야기를 멈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강왕세자는 굴욕감을 참으며 끝까지 말했다.

    강왕은 조용히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강왕세자는 부왕이 자신이 계략에 빠진 일을 책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왕은 의외의 질문을 했다.

    “벽돌 밑의 물건은 어떻게 발각된 게냐?”

    강왕세자는 멍해졌다.

    “아버지…….”

    약봉지가 발견된 것은 황제가 악몽을 꾸어 승원궁을 정리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꿈을 꾼 것은 자신들이 꾸민 짓이었고, 그런 짓을 한 이유는 황제가 금군을 정국공의 손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걸 더 파고들다 보면 소달이 왜 죽었는지까지 이야기해야 했다.

    ‘설마 부왕께 세자비가 시집오기 전의 일을 알려야 한단 말인가?’

    이건 체면이 서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왕이 이 일을 아는 날에는 세자비를…….’

    “아버님.”

    강왕세자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갑자기 그의 귓가에 세자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왕세자가 고개를 돌려 보니 세자비가 다시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일은 이 며느리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서 강왕세자는 강왕세자비가 시집오기 전의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강왕세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급하게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 

    하지만 강왕세자비는 그의 손을 ‘탁’ 쳐내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세자께서는 가만히 제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아내가 자신의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강왕세자는 믿기 힘들었지만 강왕의 눈빛에 고개를 숙이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강왕세자비는 그런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연초에 그 강십이라는 자가 갑자기 경성에 나타나 제가 광명사에 가서 향을 피우는 틈을 타 몰래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가 사실을 폭로할까 두려워 계략을 꾸며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왕세자는 말을 잃었다.

    “…….”

    ‘이 여자가 미쳤구나. 나는 이 여자를 보호해주려 했건만, 자기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다니.’

    아내는 결혼 전에 정조를 잃은 일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던 것까지 전부 스스로 폭로해버렸다. 

    ‘죽고 싶은 건가?’

    강왕세자가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저쪽에서 세자비도 이야기를 끝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내내 강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왕세자비가 말을 마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왕께서 화가 나셨구나.’

    강왕의 습관을 잘 아는 강왕세자는 재빨리 세자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 역시 화가 났지만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세자비를 바꾸면 지금처럼 자신을 잘 보좌해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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