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3)화 (353/385)
  • 353화. 도와드리지요

    ‘뭐라고?’

    전 재상이 들고 온 문서 책자를 보고 신하들은 내심 놀랐다.

    ‘전 재상이 일을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증거를 찾았다고?’

    ‘설마? 그는 줄곧 강왕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

    황제도 이럴 줄은 몰랐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전 재상 뭘 발견했는가?”

    전 재상이 느긋하게 그 책자를 펼쳐 사람들 앞에 보여 주었다.

    “승원궁을 수리할 때 장작감(*将作监: 중국 고대 궁실, 종묘 등 토목건축을 담당하던 기관)에서 진사(*辰砂: 진홍색 육방 정계 광석의 한 가지)를 한 무더기 사들였습니다. 신이 한 도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는데 이 진사(*辰砂: 진홍색 육방 정계 광석의 한 가지)는 사실 수은으로 정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승원궁의 약을 묻은 곳에서도 수은이 나왔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온 조정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그리 오래 조사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태껏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 전 재상이 의외로 제일 먼저 조사할 만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 아닌가?

    황제가 멍하니 물었다.

    “그 진사(*辰砂: 진홍색 육방 정계 광석의 한 가지)는 누가 구매했는가?”

    “당시의 주부(*主簿: 행정 사무관)인 상평(常平)입니다.” 

    전 재상이 몸을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 

    “그는 상 수상의 먼 조카이기도 합니다.”

    * * *

    4월이 지나자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지온은 물가에 있는 누각에 앉아 세 명의 어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늑대 새끼 좀 괜찮네, 상용을 다 물어뜯다니, 누가 이놈한테 그런 용기를 준 게야?”

    대장공주는 창문 쪽에 기대어 호수에 해바라기 껍질을 뱉었다.

    지온이 그녀에게 냉차를 한 잔 따라주며 웃었다.

    “순풍을 너무 오래 타면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쉽지요.”

    북양태비가 부채를 부치며 힐끗 대장공주를 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그놈을 비웃으면 안 되지. 자네 일가가 전부 수모를 당했으니 그놈이 그래도 자네들보다는 나은 거 아닌가?”

    대장공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거야 황제셨던 오라버니가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침대에 누워 있는 틈을 타 손을 써서 그런 거지.” 

    북양태비가 손사래를 쳤다. 

    “됐네, 진 사람이 말이 많아 봤자 변명밖에 더 되겠나.”

    대장공주는 화가 났다. 

    “곽여단,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부러 남의 속을 긁으려는 건가? 자네 집안은 뭐 음모에 안 당한 것처럼 말하는군. 북양이 철통같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놓고 심복이 매수됐으면서 창피하지도 않나?”

    북양태비가 어디 질 사람이겠는가, 그녀도 바로 받아쳤다.

    “그래도 자네보다는 낫지! 북양은 그래도 아직 우리 가문의 북양이지, 자네 가문은 강산이 남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나. 자네를 좀 보게, 공주부마저 없어졌으니 그거야말로 창피할 일 아닌가!”

    대장공주는 화가 나서 창턱을 때렸다.

    “자네의 그 궁벽한 북양이랑 경성이 어디 비교나 되나? 자네가 나였으면 아마 벌써 가죽이 벗겨졌을걸!”

    “대체 누가 북양을 궁벽하다고 하나? 가보긴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한가? 내 말을 제대로 듣긴 했어?”

    “자기가 말을 못 하는 거면서 왜 남 탓을 하고 그래?”

    루안이 돌아왔을 때, 두 어머니는 한창 싸우는 중이라 그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지온은 마지못해 웃으며 일어나 그를 데리고 자신들의 처소로 향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루안이 말했다.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날 일찍 놓아주셨소.”

    “정사당과 강왕부가 찢어져서요?”

    “그렇소.”

    기분이 좋은 듯 루안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상 수상은 틀림없이 화가 많이 났을 거요. 그는 일을 적당히 수습하는 걸 아주 잘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강왕부가 그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고 이렇게 죽어라 자기를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을 거요.”

    “그럼 이 일은 성공한 건가요?”

    “성공했소.”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 수상이 이미 화가 단단히 나셨으니 이제 강왕세자가 꺼져버리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오.”

    * * *

    정사당의 등불은 한밤중까지 꺼지지 않았다.

    관리들은 모두 이미 퇴근한 상태였지만, 숙직실에는 아직 사람이 남아있었다.

    “상 수상, 뭘 망설이십니까? 강왕부에서 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 아닙니까! 수상께서는 너그럽게 봐주려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물어뜯다니요. 이렇게 해서 수상을 구렁텅이에 빠트리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하는 젊은 관리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상용은 아무 말 없이 눈꺼풀을 반쯤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젊은 관리가 또 뭔가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제지했다. 

    “강왕부를 등한시해서는 안 되네. 수상께서 생각해보실 수 있게 좀 기다리게.”

    젊은 관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걸 뭘 더 생각한단 말입니까? 황실의 혈통과 관련된 문제는 신하가 절대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강왕세자의 목적은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상 수상을 곤경에 빠뜨려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거지요. 그때가 되면 수상께서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수상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 수상, 절대로 일을 그 지경까지 끌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 그도 맞는 말이긴 했다.

    관리를 말리던 사람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도리어 그 말에 설득되어 그를 따라 말했다.

    “수상, 경림(景林)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얼른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강왕 쪽이…….”

    또 다른 나이가 지긋한 관리가 걱정하며 말했다. 

    젊은 관리들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은 강왕부인데 우리가 반격하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왕세자가 도발한 겁니다. 가장 화나는 부분은 강왕부는 루안의 계략에 빠진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수상을 걸고넘어졌다는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노관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 일은 분명히 루안이 꾸민 짓이네. 그런데 어째서 우리와 강왕부가 서로 등을 지게 되었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강왕부와 맞서게 되면 그 계략에 걸려드는 꼴이 되지 않겠나?”

    젊은 관리는 멍해졌다.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지. 강왕세자가 쓰러진다더라도, 그의 뒤에는 강왕 전하가 계시지 않나! 만약 우리가 그쪽과 다 같이 망할 정도로 싸워 댄다면 그 이득은 다른 사람이 챙겨가지 않겠나?”

    젊은 관리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여전히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럼 그들이 모함하게 그냥 두란 말씀이십니까? 지금 민심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강왕세자는 여기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이 일을 붙잡고 늘어질 겁니다. 지금 우리가 뒤로 물러나는 건 위험합니다!”

    그들의 논쟁을 여기까지 듣고 있던 상용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눈빛이 침울했다.

    “상 수상.”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내가 이 수상 직위에 연연하는 건 아닐세.”

    상용이 천천히 말했다. 

    “다만 이 늙은이가 선대 황제 폐하의 임종을 지킬 때, 그분께서 나라를 지켜달라고 하셨던 부탁을 감히 저버릴 수 없을 따름이지.”

    그러니까 그는 아직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몇 사람이 그의 뜻을 알아듣고 일제히 대답했다.

    “예, 수상.”

    * * *

    날씨가 점점 더워졌다.

    지온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쓰고 찻집에 가서 차를 마셨다.

    거기서 지온은 뜻밖에 유신지를 또 만났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아예 손짓으로 그를 불러냈다.

    찻집은 바로 골목 입구에 있어서 지온은 당연히 마차를 타지 않았다. 하지만 유씨 가문의 마차가 밖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차에 들어가 앉았다. 잠시 후 유신지가 툴툴거리며 마차로 들어왔다. 

    “당신은 지금 유부녀 아니오. 이러면 안 되지 않소…….”

    지온이 부채를 부치며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대공자께서 종일 나를 찾아다니는 건 괜찮고요?”

    유신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지온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루안을 찾아가면 되지 왜 굳이 날 찾아왔어요?”

    유신지는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나도 루안을 찾아가고 싶었소. 하지만 막상 보면 또 말을 못 하겠는 걸 어쩌겠소.”

    “오호라!”

    지온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가 ‘오호’란 말이오?”

    ‘나 자신도 아직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벌써 이해를 했다고?’

    지온이 빙그레 웃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잖아요.”

    유신지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부끄럽긴 개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지온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유신지가 눈으로 밖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내 할아버님을 대신해서 말을 전하러 왔소.”

    ‘유 노태사?’

    지온이 정색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요?”

    “조부께서 적당한 때에 그만두라고 하셨소.”

    유신지가 그녀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루안의 관직이 점점 높아지고 권세가 날로 커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그저 신기루 같은 것일 뿐 당신들이 기대고 있는 뒷배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셨소.”

    대장공주는 자기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고 북양왕부와는 관계가 끊긴 상태였다. 지금 루안이 가장 크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황제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수중에는 실권이 많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을 합쳐 자신들을 상대하려 한다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었다.

    지온이 양손을 말아 쥐고 그에게 절을 했다.

    “뭐 하는 거요?”

    유신지가 피하며 물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거지요!”

    지온이 휘장을 걷으며 말했다.

    “당신이 노태사 어르신께 알겠다고 했다고 좀 전해 주세요.”

    “아아…….”

    유신지는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 다시 찻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참 동안 그는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말로는 알겠다고 해놓고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소리 아니냐? 정말 저 두 망할 것들…….”

    * * *

    사람들은 강왕부가 여론의 비난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자에 관한 얘기가 나돌자마자 강왕부에서는 즉시 마구 소문을 퍼트려 그 칼끝이 상 수상을 가리키게끔 했다. 

    승원궁에 약이 묻혀있던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찻집에서는 그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다.

    “어쩐지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단서가 하나도 없더라니, 알고 보니…… 그 사람과 관련이 있었던 게로구먼!”

    아무래도 수상과 관련되어 있으니 말하는 사람도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놓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십 년 전의 일은 그렇다 친다고 해도 지난번에 승원궁을 수리한 것은 4년밖에 안 지났는데 증거를 하나도 못 찾는 게 이상하더라니. 내부에 무슨 꿍꿍이가 없는 게 더 미심쩍을 지경이지!”

    “전 재상이 그 책자를 내놓지 않았으면 이 일이 그냥 흐지부지되었을 거 아닌가? 정사당의 주관 아래 대리사와 형부가 손을 잡고 사건을 이렇게 처리하다니 정말 상상도 못 해본 일이야.”

    “자기 가족과 관련되어 있는데 상 수상이 어찌 손을 놓고 대리사와 형부가 조사하게 둘 수 있었겠어?”

    지온이 여기까지 듣고 고개를 들어 구석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명의 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짓을 보더니 한 명이 부채를 탁, 접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 말씀이 전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있는데, 여러분들이 알아차렸는지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잇따라 그에게 시선을 던졌고 누군가 물었다.

    “선생, 무슨 의문점을 말하는 겁니까?”

    문인이 부채를 휘두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승원궁에 약을 묻은 것은 폐하의 자손을 겨냥한 것인데 그것이 상 재상에게 이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듣자마자 이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하가 뭐 하러 군주의 자식을 해치겠는가, 심심해서?

    동향이 변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급히 나와 해명했다.

    “어째서 이득이 없다는 거요? 황제께 자식이 없으면 수상이 대권을 장악하지 않겠소?”

    ‘어린 황제를 계승자로 세우고 그를 돕는다……?’

    그 말뜻을 이해한 사람들이 모두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감히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그 문인이 웃었다.

    “대형, 외람되지만 좀 여쭙겠습니다. 폐하의 춘추가 올해 어떻게 되시는지요? 또 상 수상은 연세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귀하의 그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황제는 20대 초반이었고 상 수상은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린 황제를 내세워 대권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찻집 안은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상 수상은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강왕부의 혐의가 제일 크지…….”

    “맞아, 이득을 보는 건 종실뿐인데 그럼 강왕부 말고 또 누가 있겠나?”

    지온은 여기까지 듣고 일어나 찻집을 빠져나왔다.

    ‘이렇게까지 도와드렸는데 상 수상께서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