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1)화 (351/385)
  • 351화.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강왕세자비는 벼루를 내던지고 손수건을 꺼내서 천천히 손을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한낱 황실의 자제일 뿐이고 그 학생들처럼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렇게 깊게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고 당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거지요. 그러니 그 순간에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앞이 궁문이니 온 힘을 다해 부딪쳐 죽겠다 하면 옆에 그렇게 많은 금위가 있는데 설마 그가 죽는 꼴을 보고만 있었겠는가?

    강왕세자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새파래진 얼굴로 질책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죽느니 사느니 하며 소란을 피우면 본 세자의 체면은 뭐가 되겠느냐? 사람들이 나를 말주변도 없고 사리 분별을 못 하는 황실의 자제라고 생각해버리면 내가 나중에 어찌 그 자리를 차지하겠냔 말이야?”

    세자비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강왕세자는 차가운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니면? 당신만 그 자리를 탐내는 줄 알았나?”

    “그럼 당신이 지금 이렇게 한 것이 죽느니 사느니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세자비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겁니까? 당신이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은 희박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신 자신을 지키는 겁니다. 체면 좀 상하는 게 뭐가 대수란 말입니까? 당신이 대권을 잡았을 때 사람들이 불복하기라도 할까 봐서요?”

    강왕세자는 초조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나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일이 성공하더라도 꼭 나를 뽑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어찌 내가 명성에 흠집이 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강왕세자의 이런 격렬한 반응에 세자비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서 먹물이 흩뿌려진 탁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세자 전하께서는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몸조심을 하셔야지요.”

    강왕세자는 오히려 그녀에게 성을 냈다. 

    “대체 이게 무슨 태도냐? 내 말이 틀렸느냐?”

    세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전에 세자 전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병이 깊어 독약으로밖에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독약을 쓰면 당신은 중독이 되겠지요. 당신이라면 이 약을 쓰시겠습니까, 안 쓰시겠습니까?”

    강왕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독에 중독되면 결국 죽게 되는 거 아닌가?”

    세자비가 말했다.

    “저라면 쓸 겁니다. 눈앞의 이 관문을 넘어서야지만 다음 관문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 * *

    루안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는 지온이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그녀의 책을 뺏었다.

    “내가 들어왔는데 눈길도 한번 안 주다니, 어디, 책이 나보다 잘생겼나 보오?”

    지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얼굴은 한 번 보면 충분하지만, 책은 한 번 읽고 또다시 읽을 수 있잖아요.”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알겠소, 날 보기 싫다니 그만 가봐야겠소.”

    “아이!”

    지온은 그를 붙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내가 잘못했어요. 이래도 갈 거예요?”

    루안은 그제야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서로 기대어 책을 보았다.

    책을 보는 척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오늘 일은 잘 진행됐소?”

    루안은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며 물었다. 

    지온이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보았다.

    “조 선생이, 말 안 해줬어요?”

    “내가 그 사람 말을 들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소?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지온은 웃음을 터뜨리며 낮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 생각에 수상께서 화내실 것 같아요?”

    루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분이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이 일은 그쪽에 뒤집어씌워야 하오.”

    루안은 일찌감치 영산으로 피했기 때문에 강왕세자는 분명히 이 빚을 정사당에 달아 놓을 것이다. 

    상용은 한 나라의 어엿한 수상으로서 제국의 진정한 조타수(掌舵人)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친왕세자가 어찌 그를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강왕세자가 그를 누르려고 한다면 그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 뻔했다.

    지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직 화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불을 좀 더 키우는 것이 좋겠어요…….”

    * * *

    다음 날 아침, 지온은 차를 마시러 외출했다. 

    자주 가는 찻집에서 유신지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오!”

    그는 두 눈 밑이 검고 기력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지온이 자리에 앉아 물었다. 

    “당신 왜 이래요? 처녀 귀신한테 양기라도 뺏겼어요?”

    “허!”

    유신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거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되오? 당신은 내가 요즘 얼마나 처참한 상황인지 모를 거요. 며칠 전에는 증인과 증거를 찾아 사방을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돌아와서 겨우 이틀 쉬고 또 할아버지를 모시고 친구댁을 방문해야 한다오. 

    이게 끝이 아니지. 경 소저가 어젯밤에 또 무슨 광기가 발동했는지 갑자기 나한테 썩은 풀이 개똥벌레가 되는 게 진짜냐고 묻더군. 그러더니 굳이 찾으러 가봐야 한다고 하지 않겠소. 지금 4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 가서 개똥벌레를 찾는단 말이오? 내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느라 밤잠을 다 설쳤다오.”

    지온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처녀 귀신이 소소였군요!”

    유신지가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소소더러 감히 처녀 귀신이라고 하다니, 그녀가 알면 난리가 날 테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오.”

    지온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보아하니 소소가 난리 피우는 걸 많이 참은 것 같은데 아직 사이가 틀어지지 않은 걸 보면 대공자께서도 인내심이 대단하신가 보군요!”

    유신지는 눈에 초점을 잃고 지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당신보단 낫지 않소. 소소는 단지 재미를 위해서 그러는 것뿐이지만 당신이 소란을 피우면 진짜로 사람 목숨이 사라지니 말이오.”

    ‘이건 어제 일을 말하는 건가?’

    지온이 천천히 차를 마셨다.

    “이른 아침에 여기까지 온 게 설마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요?”

    유신지는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내 진작에 당신하고 관련이 있을 줄 알았지.”

    곧이어 유신지가 그녀에게 뭔가 말을 하려는데 찻집에서 부른 이야기꾼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듯이 딱따기를 두드렸다. 사람들은 소리에 놀라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개를 돌리니 이야기꾼이 오늘의 민보를 들고 말하는 중이었다.

    “여러분, 오늘 민보의 머리기사를 보셨습니까? 친왕세자가 궁문에서 사죄하고 서원 학생들이 그에게 물었다…… 제가 어제의 중요 기사를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유신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보는 일상적인 소소한 사건들만 쓰는 것 아니었소? 왜 이런 걸 쓰기 시작했소? 당신 정말 간이 너무 큰 거 아니오?”

    비록 이 왕조의 풍조가 개방적이어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정사를 의론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지만 그것이 황실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었다. 

    뭐 하나라도 윗선의 눈에 거슬리는 날엔 서점을 몰수당할지도 몰랐다.

    지온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럴 리가요? 우리 부군께서 민정(民情)을 책임지고 있는데요.”

    “…….”

    유신지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는 그저 이런 아내를 얻은 루안이 측은했다. 이와 비교하면 경소소의 뒷수습을 해주는 것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계집애는 기껏해야 남의 머리를 때려 깨는 정도였지만 지온 소저는 남의 목숨을 가지고 놀았다. 

    이야기꾼이 민보를 다 읽고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손님들은 저마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강왕세자가 지금 뭘 하는 걸까?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궁문 앞에 가서 사죄하다니 이러면 일만 더 커지는 거 아닌가?”

    “누가 아니래? 어제 그 난리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직접 봤는데. 그 학생들이 제지하지 않았으면 폐하께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셨겠어.”

    “폐하가 얼마나 난처하셨겠나! 양쪽을 모두 모셔야 하는 처지니 뭐라 말을 하기도 곤란했겠지.”

    “강왕세자는 그런 폐하를 기어코 따라다니며 이렇게 소란을 피워대기나 하고! 형님이란 사람이 어찌 이런단 말인가.”

    “아휴, 자네 잊어버렸나? 애초에 이 일이 왜 소문이 났어? 폐하께서도 음해를 당해서 사람들 앞에서 관청 사람들이 강왕세자를 잡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다만 증거가 없어서 나중에 그를 놓아주었을 뿐이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그러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 건 아니라는 소리군…….”

    유신지는 녹두떡을 입에 던져 넣고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됐소, 난 이제 관아에 가봐야겠소. 오늘도 바빠질 예정이라오.”

    유신지는 그리 말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것 좀 봐라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그야말로 강왕세자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아닌가.’

    * * *

    강왕부 바깥 서재.

    도자기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자 새장 속의 새들이 연신 푸드덕거렸다.

    강왕세자는 찻잔과 꽃병들을 던져 깨트린 후에야 비로소 노기를 좀 누그러트리고 자리에 앉았다.

    “알아봤느냐?”

    몇 명의 모사(谋士) 참모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세자 전하, 조사해보았는데 루안은 어제 경성에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영산현에 공무를 보러 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강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말대로라면 이 일이 루안과 상관이 없다는 소리냐?”

    “그게…….”

    참모들은 감히 단언할 수 없었다. 

    강왕세자가 단념하지 않고 말했다. 

    “루안은 모략을 잘 꾸미는 인간이니 혹시 경성을 떠나기 전에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참모가 부정하며 말했다.

    “세자 전하,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저희도 전부 전하께서 외출하기 직전에야 알았는데 이 소식이 어찌 새어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도 맞았다. 그저께 밤에 자기 자신도 이 일을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루안이 어찌 미리 알고 대응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예를 들면…… 북양태비?”

    참모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북양태비는 단순하고 용맹스러운 성격이라 음모를 꾸미는 것에는 서툽니다. 오히려 대장공주라면 모를까…….”

    강왕세자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했다. 

    “고모님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낮은 분이지. 그분이 손을 쓰려고 하셨다면 아마 직접 오셔서 본 세자의 얼굴에 대고 욕을 하셨을 것이야.”

    참모들은 대장공주의 성격을 떠올려 보고 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참모들은 고민했다.

    ‘이 일을 루안이 하지 않았다면, 또 누가 했단 말인가?’

    만약 어제 세자가 성공했다면 여론의 힘을 빌려 이 사건을 무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사당이 더 이상 조사하지 못할 테니 결국엔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컸다. 훗날 다시 이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관료들이 무능했던 것이라고 일축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상용!”

    강왕세자가 두 글자를 뱉었다.

    참모들은 가슴이 뜨끔했다.

    만약 정말 상 수상이 손을 쓴 것이라면 결과가 아주 심각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 의심하듯이 말했다.

    “그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세자 전하,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고 평소 우리와 상 수상은 각자 분수를 지키며 건드리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세자 전하의 체면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또 다른 참모가 맞장구를 쳤다. 

    “이 사건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뭐가 대수겠습니까? 대리사와 형부에 걸려있는 현안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세자 전하, 상 수상은 정사당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와 반목한다면 앞으로 많은 일을 도모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참모들이 연거푸 충고하자 강왕세자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건 좀 경솔했다고 인정했다. 

    황제의 능력이 부족하고 정사당의 권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상용 수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지, 반목해서는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말 상용이 한 짓이라면 앞으로는 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중 한 참모가 자진해서 나셨다. 

    “세자 전하, 제가 가서 좀 수소문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왕세자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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