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0)화 (350/385)
  • 350화. 바보

    강왕세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 학생들을 대체 누가 불러들인 거란 말인가? 루안? 그래, 그놈만이 이런 계략을 꾸밀 수 있지!’

    “이보게, 학생들! 흥분하지 말게. 그런 일은 없네! 본 세자가 맹세하건대 폐하를 핍박하려는 뜻은 절대 없었…….”

    그가 겨우 말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말은 다른 사람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그럼 세자께서는 왜 아직도 안 가고 무릎을 꿇고 계십니까? 세자께서 폐하께 벌을 내려달라고 하시는데, 폐하께서 어떤 벌을 내려야 한단 말입니까? 친아버지와 조부가 황실을 모함한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부정한 방법으로 황위에 올랐다는 것을 폐하더러 인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니면 폐하께서 세자가 승원궁 사건과 무관하다는 보증이라도 서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참 꿈도 야무지십니다. 세자와 상관이 없으시다면 폐하는 어찌하라고요? 세상 사람들에게 어찌 해명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나는 단순히 사죄하러 온 거네…….” 

    강왕세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무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많은 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있어 제대로 변명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말에 묻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호은이 급히 돌아왔다.

    “폐하의 명령입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침내 시끄러운 소리를 가라앉혔다. 

    모두 멈춰 서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내감 총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은은 웃으며 학생들과 백성에게 감사 인사를 하듯이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리고는 강왕세자에게 말했다.

    “세자 전하, 폐하께서 이 늙은 소인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하의 억울함을 폐하께서 아시지만 일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폐하께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복잡하며, 또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형부와 대리사에서 조사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가 손을 흔들자 다른 내관이 수레를 끌고 왔다.

    호은은 애석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 상처를 좀 보십시오. 부하가 손이 너무 맵군요. 우선 궁으로 들어가서 약을 바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왕세자가 지금 궁에 들어가 약을 바를 기분이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는 여론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고 후회하는 척하며 말했다.

    “호 내관, 이 일은 내가 생각이 짧았네. 정말로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폐하를 이리 난처하게 만들 줄이야.”

    호은은 금세 이 말에 넘어가 즉시 그를 부축하며 따뜻한 말로 회유했다.

    “세자 전하의 진심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마음이 너무 조급하셔서 이리된 것이겠지요. 마음에 두지 마시고 어서 약을 바르고 돌아가서 쉬십시오!”

    강왕세자가 지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의 후회를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술렁임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호은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강왕부의 마차에 올랐다.

    강왕세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 학생들은 환호했다.

    백성들은 원래부터 소란을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일이 커졌다고 싫어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강왕부 마차를 따라가며 소란을 피웠고 강왕부 사람들은 한껏 풀이 죽었다. 

    한 차례의 풍파가 이렇게 가라앉았지만, 관리들은 오히려 표정이 복잡했다.

    “상 수상?”

    상용이 정신을 차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가세.”

    사건은 갑작스럽게 발생했다가 빠르게 해결되어 마치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강왕세자가 이렇게 한 건 분명히 관리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대충 속여서 이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들이 무능하다는 여론을 빌미로 이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끝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디선가 학생들이 튀어나와 몇 마디 말로 그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이런 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분명히 배후에 사주한 누군가가 있지 않겠는가?

    상용은 작년에 정양문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당시 사람들이 가리켰던 것은 소달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아들을 다치게 한 학생들을 모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참, 그때 모함을 당했던 사람이 누구였지?’

    상 수상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마침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중 한 학생의 성이 지씨였는데, 작고한 지 재상 댁의 손녀였다.

    ‘지씨 가문에 얼마 전에 경사가 있었는데 지씨 가문 소저가 시집을 갔고 혼인한 사람이…….’

    루안.

    ‘이게 그가 오늘 영산현에 간 이유였단 말인가?’

    강왕부는 이 빚을 틀림없이 자신에게 달아 놓을 것이다. 

    ‘이 교활한 자식!’

    * * *

    마차가 정양대로를 나와 모퉁이에 잠시 멈춰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발을 걷고 올라탔다. 그가 기쁨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지온아!”

    지온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둘째 오라버니.”

    또 그의 뒤에 있는 한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셋째 사촌 오라버니.”

    한제도 웃고 있긴 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통쾌해하면서도 은근히 불안해했다. 

    그가 물었다. 

    “사촌 누이, 우리가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지온이 아직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지장이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제 형님, 안심하세요. 첫 번째로, 우리는 이치에 맞는 쪽에 서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까 그 말들은 사실 조정 관리들을 대신해서 한 말이에요. 그들은 나서기가 어렵지만 우리는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요. 세 번째로 강왕부도 체면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이 빚을 그 사람들에게만 갚으려고 할 뿐, 우리한테까지 보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의 이런 말을 듣고 지온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강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더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네요.”

    지온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지장이 헤헤 웃었다. 

    “당연하지. 좋은 스승님을 찾아줘서 고마워.”

    한제가 부러운 얼굴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온 누이, 나도 강 선생께 글을 올리면 기회가 있을까?”

    지장이 말했다. 

    “형님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제가 스승님께 전달해 드리지요!”

    한제가 활짝 웃었다.

    “좋지! 내가 최근에 글을 몇 편 썼는데, 누이가 먼저 선생님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 좀 봐주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한제는 소매에서 종이 몇 뭉치를 꺼냈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한참 궁리해서 쓰긴 했는데…….”

    지온은 살펴보는 김에 몇 군데를 지적했다.

    “강 선생께서는 성격이 활달하신 편이라 한제 오라버니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 책에 적힌 대로 쓰거나 지나치게 낡은 관점으로는 그분의 흥미를 끌 수 없어요.”

    “맞아, 맞아.”

    지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스승님이 응시(*应试: 천자의 명을 받들어 지은 시부)를 가르치니까 당연히 보수적인 풍격을 선호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스승님은 생각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도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소년 소녀들은 생기발랄하고 남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고요.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우리가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여 세속에 매몰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시지요.”

    한제는 여태껏 이런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지장이 이 스승님께 큰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이치를 체득하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겠는가.

    사촌 남매 세 사람은 길에서 한참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먼저 한제를 집에 바래다주고 또 지장을 골목 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지장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온아,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나를 불러!”

    지온이 빙그레 웃었다.

    “알았어요, 둘째 오라버니, 이렇게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지장은 하하 웃었다. 그는 의로운 일을 한 후의 호기로운 기세를 뽐내며 가슴을 쫙 펴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강왕세자는 뒤에서 따라오는 수행원의 절박한 외침을 무시하며 빠르게 질주했다.

    “세자 전하, 세자 전하, 상처에 아직 약도 바르지 못했습니다…….”

    강왕세자가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수행원이 마지못해 멈추고 시녀에게 분부했다. 

    “어서 세자비마마께 보고하게. 세자 전하의 상처에 약을 발라야 하네!”

    시녀가 급하게 강왕세자를 쫓아갔지만 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세자는 이미 방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 꺼져라!”

    세자비는 왕부의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강왕세자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옷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으며 심지어 언뜻 핏자국마저 보였다. 

    ‘궁문에서 돌아온 건가? 벌써?’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놓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집사 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가보게.”

    하인들이 모두 물러나자, 방 안에는 그들 부부만 남았다.

    세자비는 일어나 약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아직 약 안 바르셨습니까? 자,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시지요.”

    그런데 강왕세자가 그녀를 뒤로 확 떠밀었다. 

    세자비는 휘청했고 하마터면 약상자를 떨어뜨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책상을 붙잡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성하셨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강왕세자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좋게 말로 하라고? 오늘 본 세자가 이렇게 망신을 당한 게 다 네 말을 들어서 그런 게 아니냐!”

    세자비는 벌써 무슨 사고가 났다는 것을 짐작하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강왕세자가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나더러 궁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라더니 이 계획에 허점이 있는 줄은 몰랐나 보지? 본 세자가 애송이들에게 질문을 받고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세자비가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무슨 허점 말입니까?”

    강왕세자는 학생들이 했던 질문을 다시 읊었다. 

    “역시 날 골탕 먹이려 했던 게로군? 오늘 내가 쓸데없이 얻어맞고 웃음거리가 되었어!”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세자의 얼굴에 검은 먹물이 뿌려졌다. 

    강왕세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막돼먹은 계집이! 본 세자가 아직 뭘 어쩌지도 않았는데 감히 네가 먼저 손을 써?”

    세자비가 세자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당신, 바보예요? 사람들이 말로 가로막으면 당신은 반박하지 않을 겁니까? 그것들이 당신이 폐하를 압박했다고 지껄이면 당신은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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