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48)화 (348/385)
  • 348화. 석고대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오? 그냥 무릎만 꿇으면 안 되는 거요?”

    강왕세자는 상의하듯이 말했다.

    이에 세자비가 말했다.

    “그래도 되지요, 하지만 효과가 얼마나 좋을지는 세자 전하가 얼마나 비참해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비참해 보이는 것이 싫으면 사람들이 좀 더 떠들어대게 두시던지요.”

    강왕세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겠소! 본 세자가 체면 한번 구기면 되지 않소.”

    세자비는 그제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의 옷을 정리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늘이 누군가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뼈와 살을 수고스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세자 전하, 언젠가 그 자리에 설 수만 있다면 지금의 고생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자비는 그에게 이렇게 상냥하게 굴지 않았다. 그 일이 폭로된 이후로, 때론 강왕세자에게 화를 내고 때론 냉정하게 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친절에 강왕세자는 내심 놀랐다. 

    강왕세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정말 기회를 틈타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세자비가 그의 화를 돋우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세자 전하, 못 믿겠으면 제 말을 안 들으면 될 일 아닙니까!”

    ‘들어야지!’

    강왕세자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여편네가 비록 성질은 더러웠지만,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 *

    정사당은 비로소 사건의 경과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왕세자가 석고대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상용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강왕세자가 정양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말인가?”

    “예.”

    하급 관리가 대답했다. 

    “웃옷을 벗고 큰 소리로 사죄하며 부하를 불러 자기 등을 회초리로 때리게 했답니다. 그래서 강왕세자의 등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합니다.”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사건의 경과를 듣자마자 바로 루안이 고의로 강왕부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한동안 바쁘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증거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결국 수사가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왔기에, 루안이 강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소식에 내심 아주 통쾌해했다. 

    오직 수상 상용만이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 구질구질한 일을 정사당이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강왕부의 이런 대응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강왕부는 반응이 정말 빨랐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굽힐 줄도 펼 줄도 아니 강왕부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 수상,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정양문 밖에서 사람들이 에워싸고 구경하고 있습니다!”

    정양문 밖은 원래 백성들의 왕래가 금지된 곳이 아니었다. 요 며칠 강왕부가 격랑에 휘말려 있었는데 또 이런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으니 백성들이 구경하러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상용이 물었다. 

    “폐하께는?”

    부하가 말했다.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상용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한 번 가보세.”

    ‘정말이지 궁에 계신 그분처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군!’

    * * *

    상용이 정양문 밖에 이르니 과연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게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급 관리의 말대로 강왕세자는 웃통을 벗고 긴 바지만 입은 채 정양문 밖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위 한 명이 회초리를 들고 옆에 서 있다.

    강왕세자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이 궁을 수리하는 동안 직무를 소홀히 하여 소인배가 못된 장난을 쳤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말소리가 떨어지자 시위는 회초리를 들어 그의 등을 후려쳤다.

    강왕세자는 늘 호강만 하며 산 탓에 피부가 아주 뽀얬는데 회초리를 내려치자 곧 등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군중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진짜 때리네!”

    “진짜로 안 때리면 어쩌겠어? 지금 사죄하러 온 거잖아? 당연히 성의를 보여야지.”

    강왕세자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루 통정이 신에게 사건 처리에 협조해 달라고 했는데 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피하려 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또 회초리가 등으로 떨어졌다.

    강왕세자는 고통을 참는 듯 몸을 흔들었다.

    잠시 후, 그가 이어서 소리쳤다.

    “신이 아랫사람들을 잘 단속하지 못해 궁중의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이에 부왕과 조부가 연루되어 비난받고 폐하의 명성에 누를 끼쳤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회초리가 또 한 번 세게 내리쳐졌다.

    강왕세자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낮게 엎드려 울먹이며 말했다. 

    “모두 신의 잘못이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식으로서 부왕과 조부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신이 죽음으로써 사죄하려 하오니 폐하께서 부왕과 조부의 억울함을 밝혀주십시오!”

    상용은 이 모습을 보고 일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왕세자의 계략은 정말 훌륭했다. 이건 분명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그래, 내가 지금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내 목숨을 너희들 손에 쥐여주겠다. 감히 가져갈 수 있겠느냐?’

    감히 가져갈 수 없었다. 

    어엿한 왕세자가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이렇게 자진 출두를 하니 사람들은 제일 먼저 혹시나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사람이란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였다. 상대방이 무언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최대한 악의적으로 상대방을 넘겨짚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자세를 낮추면 누명을 쓴 것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억울해하느냐고 또 넘겨짚는 것이다. 

    진상이 어떻든 간에 강왕세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주도권을 잡은 셈이었다. 

    * * *

    길모퉁이의 마차에서 지온은 땅콩을 입으로 까서 먹으며 정양문 앞에 있는 강왕세자를 보고 있었다.

    “연극이 아주 볼만 하네요!”

    한쪽에서 서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도 대처하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서아가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아가씨,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서아는 비록 집에서는 호칭을 바꿔 불렀지만, 아무도 없을 때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렇게 불렀다. 

    지온이 땅콩 껍데기를 벗기며 말했다.

    “일단 기다릴 거야.”

    ‘뭘 기다린다는 거지?’

    서아는 지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그 내관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강왕세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연거푸 인사를 했다. 

    하지만 강왕세자는 단호한 태도로 크게 소리쳤다. 

    “호 공공, 이 일은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일세. 폐하께서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내가 스스로 벌을 내려야지!”

    그러고 나서 그는 시위에게 큰소리로 호령했다.

    “계속해라!”

    시위는 즉시 손에 들고 있던 회초리를 들어 올려 후려쳤다.

    쫘악!

    강왕세자의 등에 붉은 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호은은 깜짝 놀라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세자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는데 전하께서 이러시면 폐하를 난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강왕세자는 말했다.

    “나는 사죄하러 왔지,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러 온 게 아닐세. 폐하께서 혈육의 정이 깊으신 분인데 내가 어찌 폐하를 비난받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호 공공은 그만 돌아가 보게! 나는 응당한 벌을 받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걸세.”

    그는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때려라!”

    쫘악!

    회초리가 또 한 번 내리쳐졌다.

    강왕세자의 등에 줄줄이 붉은 자국이 생겨나고 어떤 부분에는 심지어 피가 배어 나오기까지 했다. 그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의 여론이 은근히 변하였다.

    “진짜 때리고 있잖아!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게! 석고대죄를 하면서 폐하께서 말리는 데도 그치지 않는 것을 보니 진짜로 아무 짓도 안 한 모양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 사건은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잖아. 안 그래? 그런데 어떻게 꼭 강왕세자가 한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어?”

    “그래도 강왕세자가 제일 혐의가 큰 것 아니었어?”

    “혐의가 크다고 반드시 진범이란 보장이 있나? 그런 거라면 관청에서 사건을 처리할 때도 증거 따위는 필요도 없겠지.”

    “맞아. 저 집안이 뒤에서 조종한 진범이라면 그렇게 스스로 떠들어대지도 않았겠지.”

    서아는 이런 말을 듣고 조급해하며 말했다.

    “아가씨,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들이 전부 저 말을 믿겠어요!”

    지온은 여전히 침착했다.

    “괜찮아, 곧 올 거야.”

    ‘곧 온다고? 누가?’

    서아는 어리둥절해하며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마차를 두드렸다. 

    서아가 얼른 밖을 내다보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의 외사촌 공자님?”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한(韩)씨 가문의 둘째 외삼촌 댁의 사촌 오라버니, 한제(韩齐)였다.

    한제가 머리를 매만지며 어리바리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촌 누이 있는가?”

    서아가 발을 걷자 한제의 눈에 마차에 앉아 있는 지온이 보였다. 지온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사촌 오라버니.”

    정양문 밖은 한창 떠들썩해서 아무도 이쪽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온이 물었다. 

    “오셨어요?”

    한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장이 나더러 지금 오는 게 맞냐고 물어보라던데?”

    지온이 대답했다.

    “얼추 다 됐어요.”

    한제가 알겠다고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서아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가씨, 한제 공자님께서 뭘 하시는 건데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마차의 발이 내려지고 지온은 다시 땅콩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했다.

    * * *

    한편, 승원궁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조사하던 관원들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상 수상, 어떡합니까?”

    한 관원이 물었다.

    상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했다. 

    승원궁에 약이 묻혀있던 사건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다. 루안이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일단 그들의 입을 열게 만들긴 했지만, 강왕부가 이렇게 악랄한 방법으로 또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오늘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이 사건은 더 이상 조사할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강왕부가 이렇게 혐의를 벗어나게 놔둔다면, 이는 눈앞에서 뺨을 맞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는 조정의 체면을 구기는 사건이 될 것이 뻔했다. 

    “루 통정은?”

    상용이 물었다.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통정사에 속한 관리 하나가 대답했다.

    “루 통정께서는 아침 일찍 영산현에 가셨습니다.”

    상용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오늘 영산현에 갔다고? 나한테 이 난장판을 수습하게 하려고 일부러 피해 도망간 건가 아니면 정말 그저 우연인 건가?’

    백성들의 민심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원창이 앞으로 나섰다.

    “상 수상.”

    이어서 그가 청했다.

    “차라리 하관이 가서 좀 설득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다가는 일이 커질 것 같습니다.”

    상용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원창이란 자는 평소에 미꾸라지처럼 골치 아픈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째서 이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지?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가 기꺼이 나서 준다면 나쁠 건 없었다. 

    원 재상은 언변이 수려하니 분명 강왕세자를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용이 막 승낙하려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깜짝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저기!”

    발소리가 어지러운 것을 보니 분명 많은 사람이 몰려온 것 같았다.

    ‘설마 하급 관리나 시위가 동원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안 되는데, 그럼 정말 일이 커질 수도 있…… 잠깐, 이게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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