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44)화 (344/385)
  • 344화. 아무것도 없다 (1)

    지온은 슬프고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지온은 선대 태자를 떠올렸다. 

    이미 2대째 자손을 얻기 어려웠던 황실에서는 선대 태자에게 일찍 장가를 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몇 명의 궁녀를 선대 태자 곁에 붙여두었다.

    하지만 그가 재난을 당할 때까지 그 궁녀들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50년도 더 된 일은 그냥 내버려 두자. 3, 4년 전에 누군가 약봉지를 바꿔치기했다니 그 전의 것은 누가 그랬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대장공주가 눈물을 닦자 눈에서 냉기가 흘렀다.

    “그 늑대 새끼가 정말 독하구나. 친형제한테까지 손을 댔어.”

    “그게 뭐 어때서요?”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영종제한테 독을 쓴 사람도 친형제 아니었습니까?”

    대장공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비록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황실의 종친뿐이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그 사람도 자기 선조한테 배운 것 아니겠어요.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요.”

    대장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조사하는 건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 그놈을 죽이지 못할까 봐 걱정스럽구나. 이 일은 증거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야.”

    “잠시 못 죽인다고 평생 못 죽인다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조사부터 해보고 다시 얘기해요.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지온은 한참 대장공주를 위로했고 결국 그녀의 마음을 달래는 데 성공했다.

    * * *

    지온이 집으로 돌아오니 북양태비가 문간방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북양태비는 돌아오는 그들을 보고 반색했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어떻게 된 거야, 아침에 가서 이렇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이나 있다가 오고!”

    루안이 대답했다.

    “궁에 무슨 일이 좀 생겼어요. 어머니, 오늘 밤 장모님과 같이 주무시는 게 어떠세요?”

    북양태비가 수상쩍어하며 말했다. 

    “나더러 왜 대장공주랑 자라는 게야? 우리가 싸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루안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장모님을 좀 보세요. 그러고 싶으세요?”

    북양태비는 그제야 대장공주가 울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얼굴 화장이 지워진 것을 발견했다.

    ‘큰일이 난 게로구나, 요봉접(姚凤蝶)같은 여자가 이렇게까지 울다니.’

    지온이 말했다.

    “어머님을 귀찮게 하지 말아요. 내가 갈게요!”

    북양태비가 그들을 힐끗 쳐다보고 얼른 말했다.

    “내가, 내가 갈게! 네가 어디 우리보다 친하겠느냐!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 마음을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알 리가 없지.”

    그러고는 아주 자상하게 대장공주를 부축하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 얼굴 좀 보게, 하늘이 무너져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뻗대고 있을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람? 자, 우선 가서 세수부터 해.”

    이렇게 말하며 북양태비는 대장공주를 부축해 데리고 갔다. 

    지온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어머님의 아까 그 눈빛은 무슨 의미예요?”

    루안이 지온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무슨 의미겠소? 당연히 우리가 함께 있길 바라신다는 의미겠지.”

    지온은 그게 아닌 것 같아 작은 소리로 계속 물었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약을 먹는 걸 모르시지 않나요?”

    어른들이 그들이 함께 있기를 바라는 이유는 아이를 낳길 바라서가 아니겠는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함께 있는 건 무의미했다.

    루안이 고개를 숙였고 그의 눈가에는 희미하게 웃음기가 감돌았다. 

    “물론 알고 계시오. 우리가 한참 소식이 없으면, 어머니께서 조급해하시지 않겠소? 내가 벌써 말씀드렸소.”

    “그럼…….”

    루안이 지온을 문으로 밀어 넣었다.

    “됐소, 괜한 생각은 마시오. 어머니는 그냥 내가 불쌍해서 그러시는 거요. 20년 동안 홀아비로 살다가 겨우 아내를 얻지 않았소…….”

    * * *

    이 사건 때문에 조정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사건이 아직 민간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권세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벌써 알음알음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한동안 강왕부에는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무도 멍청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누가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왕세자는 침착하게 매일 해야 할 일을 할 뿐 이런 사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세자의 태도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그가 한 짓이 아닌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제한테 자식이 없으면 이익을 볼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또 없지 않은가?

    * * *

    “에휴…….” 

    또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유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경 언니, 내가 원고 쓰는 것도 포기하고 낸 귀한 시간을 언니 한숨 소리나 듣는 데 써야겠어?”

    경소소가 입을 길게 늘어트렸다. 

    “심심해서 그래!”

    지온이 그녀들과 마주 앉아 민보에 적힌 십자말풀이를 하며 말했다.

    “경소소, 너 어째 끝장난 거 같다?”

    경소소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뭘? 나 아무렇지도 않아!”

    지온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힐끗 보았다.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돌았다. 

    “너 왜 심심해하는데? 우리랑 같이 놀러 나왔잖아. 예전에는 재미없어지면 네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어 대지 않았어?”

    “내가…….”

    “혹시…….”

    지온이 붓질을 멈추고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즘 유신지 공자가 놀러 나올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야?”

    “아악!”

    경소소는 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언니 너무 나갔어!”

    지온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도저히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지온은 유민과 함께 그녀를 쳐다보고 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웃자 경소소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웃지 마! 계속 웃으면 화낼 거야!”

    경 대소저가 곧 화를 낼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용서를 빌었다.

    궁중의 사건이 폭로되자 대리사 쪽에서는 유신지를 파견하여 도왔다. 그중에 아주 세밀하고 까다로운 업무가 있어서 그는 며칠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늘 정신없이 바빠서 잠도 관아에서 잤다. 

    집에도 못 들어가니 당연히 경소소와 놀아줄 수도 없었다.

    이 계집애는 얼마 전까지 그를 불쑥불쑥 불러내던 것이 버릇이 되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유신지 공자가 실종이라도 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지온이 그녀를 위로했다. 

    “이런 일은 빨리 습관이 될수록 좋아. 날 봐. 나도 매일 독수공방하고 있잖니? 루안도 요즘 바빠서 집에 안 들어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라니까.”

    경소소도 순진한 아이라, 지온의 말을 듣고 도리어 위로하기 시작했다. 

    “지온 언니, 정말 힘들겠네.”

    유민이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물었다.

    “지온 언니가 뭐가 힘들어!”

    경소소는 그래도 자기가 경험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른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부군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힘들지 않겠어?”

    유민이 말했다. 

    “하지만 지온 언니는 평소에도 별로 루 통정이 필요가 없었잖아!”

    “사람이 있다가 없는 건 또 다른 거야…….”

    그 말을 들은 지온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이었다. 

    “소소, 너 그걸 벌써 깨달은 거야? 정말 머릿속에 약혼자 생각이 끊이지 않는가 보구나!”

    지온의 말을 들은 경소소는 아주 부끄러워했다. 

    “지온 언니!”

    지온은 동생을 놀리고 아주 만족해하며 하하 웃었다.

    한참 웃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사실 평소에는 내가 너무 바빠서 그 사람을 돌볼 틈이 없을 지경이야. 집에 며칠 안 오면 편하고 좋지.”

    경소소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바빠? 집안일이야?”

    “집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집안일로 바쁠 게 뭐 있겠어? 시절이 이렇게 좋으니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바쁜 거지.”

    “좋아하는 일 뭐?”

    지온이 그녀에게 하나하나 세어 주었다. 

    “글씨 연습, 독서, 활쏘기, 승마, 돈 벌기…….”

    ‘글씨 연습이나 독서는 그렇다 치고, 활을 쏘고 말을 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쁠 텐데, 돈 버는 일까지?’

    놀란 경소소는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다. 

    “지온 언니, 무슨 돈을 번단 말이야? 가게 차리려고?”

    “아니.”

    “그럼 돈을 어떻게 벌어?”

    “좋은 의견을 하나 냈지! 내가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나중에 가서 번 돈을 나누기만 하면 돼.”

    “와, 그런 좋은 일이 다 있다고? 그럼 나도…….”

    “낄 생각 하지 마, 너는 못 해.”

    “우우우, 지온 언니 잔인하네요…….”

    * * *

    루안과 유신지는 오늘 둘 다 경성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증인 한 명을 찾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하급 관리를 데리고 서둘러 이웃 현으로 달려가 한 마을에 도착했다. 

    하급 관리들이 주변으로 흩어져 상대방이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유신지가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유신지가 또 두드리며 소리쳤다.

    “계십니까? 지나가는 사람인데 물 한 그릇만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루안이 그에게 비키라고 눈짓했다.

    고찬이 앞으로 나와 문짝을 걷어차자 하급 관리들이 문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고찬이 소리쳤다.

    “대인, 죽었습니다!”

    루안이 방으로 들어가자 역시 쉰 살 남짓한 노인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침상에 누워있었다. 

    유신지도 뒤따라 들어와 더듬더듬 노인의 몸을 만져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시신이 다 굳었네.”

    모두는 말없이 마당으로 물러나 입구 쪽에 잠시 섰다. 유신지가 의견을 물었다. 

    “일단 현성(*县城: 현정부 소재지)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떤가?”

    루안이 동의했다.

    그들은 경성에서 서둘러 오느라 오는 내내 계속 속도를 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행들은 전혀 쉬지 못했고 말도 지친 상태였다.

    루안 일행은 현성으로 가서 주루를 찾아 밥을 먹었다.

    유신지는 두 입 정도 먹다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 증거를 하나도 못 찾으면, 이 일은 헛수고가 아닌가?”

    루안이 생각해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잘 생각해보면 반드시 이용할 만한 구석이 있는 법이지.”

    유신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자네보다 멍청하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말 모르겠군!’

    그가 얼굴을 구기는 모습을 보고 루안이 웃었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자네는 그래도 아직 선을 지켜서 그런 거네.”

    유신지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루안이 천천히 말했다.

    “예를 들면 누명을 씌운다거나 음모를 꾸민다거나 하는 것 말이네. 자네라면 분명히 이런 짓은 하지 않겠지.”

    “설마 자네…….”

    루안은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웃기만 했다.

    유신지는 그의 웃음에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예전에는 이 북양왕가 넷째 공자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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