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43)화 (343/385)

343화. 질투는 넣어두시오

승원궁의 첩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강왕세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없애버리면 되지.”

그러나 벽돌에 밑에 숨겨진 약봉지를 파헤쳤다는 대목에 이르자 그는 안색이 변하여 곧장 후원으로 달려갔다.

세자비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가 남편이 급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모를 불렀다. 

“공자를 데려가서 쉬게 하거라.”

“예.”

유모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부랴부랴 아이를 안고 가버렸다.

강왕세자는 뒤이어 주변의 시비들을 내쫓았다.

세자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궁, 궁에서 첩자를 발견했소.”

강왕세자가 말했다.

세자비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발견했으면 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우리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니오!”

강왕세자가 급히 말을 이었다. 

“기억나지 않으시오? 여섯째가 황위 계승할 때 승원궁을 한 번 수리하지 않았소…….”

세자비의 손에 든 찻잔이 흔들리며 차가 조금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건 당신이 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만에 하나…….”

갑자기 탁,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강왕세자는 이에 놀라 잠시 멍해졌다. 항상 유순하다고 생각해왔던 아내가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에 세차게 내려놓고 일어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무슨 만에 하나란 말입니까? 요담, 당신이 제위에 오르는 게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는 것이나 제대로 파악하세요! 지금 황위에 앉아 있는 건 당신의 친동생입니다. 그 사람은 당신보다 젊고 당신과 같은 핏줄이에요. 그가 배신하지 않는 한, 당신 부친께서 그 사람을 포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대로 된 명분도 하나 없으면서 그의 황위를 빼앗고 싶어 하다니 그거야말로 정말 만에 하나라 할 만한 일 아닙니까!” 

아내의 질책을 들은 강왕세자는 마치 찬물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얼어붙었다.

세자비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옷을 정리해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별일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일은 증거가 전혀 없는데 뭐가 두려우십니까?”

강왕세자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세자비도 그를 따라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계속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까 봐, 또 처자식이 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한테는 봉지에 계시는 부왕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살아 계시는 한 여섯째는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당신이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그 일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니 설사 여섯째가 의심을 한다고 해도 뭘 어쩌겠는가? 부왕께서 계시는 한 나를 직접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강왕세자가 웃기 시작했다. 문득 방금까지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좀 전의 세자비의 태도가 생각나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방금 나한테 훈계한 거요?”

세자비가 힐끗 그를 보더니 웃었다.

이 웃음의 3할에는 조롱이, 7할에는 무심함이 담겨 있었다. 강왕세자는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왜 웃는 거요?”

세자비가 일어서더니 유순하게 그를 향해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소첩의 잘못입니다. 부군에게 소첩이 불경하게 굴면 안 되지요.”

강왕세자의 얼굴이 좀 풀렸다. 

하지만 세자비의 얼굴은 다시 냉랭해졌다. 

이에 강왕세자는 침묵했다.

“…….”

‘정말 울화통이 터지는구나! 여섯째의 계략에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는데, 이 여인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멀쩡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여자가 아직도 날 부군으로 여기고 있긴 한가?’

강왕세자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방금 그녀가 한 말로 인해 걱정거리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욕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콧방귀만 흥흥 뀌다가 몸을 돌려 첩한테 가버렸다. 

세자비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만 계속 마시며 생각했다.

'어쨌든 저 등신 같은 놈은 다시 돌아오겠지.'

* * *

네 개의 상자가 한 줄로 늘어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수상 상용은 가슴이 철렁하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원창도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그를 부축했다.

“상(常) 수상!”

상용은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제, 태후, 대장공주 세 사람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이건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말했다.

“폐하, 마마,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하겠습니다.”

태후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구슬프게 말했다.

“그게 누구든지, 시체가 재로 변했을지라도 전부 찾아내라!”

“예.”

상용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대리사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승원궁이 지어진 지 50여 년이 지났고, 50여 년 전의 일을 조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이 약봉지는 3, 4년 전에 교환한 것이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형부상서도 찬성하며 말했다. 

“3, 4년 전 일이라면 장작감(*将作监: 중국 고대 궁실, 종묘 등 토목건축을 담당하던 기관)에 아직 기록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때 누가 공사를 맡았고 벽돌을 담당했었는지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가서 알아보게.”

대장공주가 말했다. 

“누구든 절대 빠져나갈 틈을 주지 말게.”

형부상서는 망설이다가 상용을 쳐다보았다.

“상 수상, 그럼 이 사건은 누가 주심을 맡습니까?”

상용이 주저 없이 말했다. 

“본 수상이 주심을 맡을 것이오! 자네들은 전부 나에게 직접 보고하고, 사건의 경위를 보고할 때는 우리 세 사람이 함께 폐하를 뵙도록 합시다. 폐하,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덧붙였다.

“루 통정을 불러서 함께 조사하도록 하게. 이 일은 그가 알아낸 것이네.”

다들 별다른 이견이 없어, 그렇게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네 개의 상자는 대리사경과 형부상서가 각각 두 개씩 가져갔고 중신들도 천천히 승원궁에서 물러났다.

출궁하는 길에 누군가 상용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상 수상, 그 약봉지가 벽돌 밑에 50년 넘게 묻혀있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어찌 이리 공교롭게 루 통정이 발견했단 말입니까? 그 사람도 참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까?”

상용이 대답하기도 전에 형부의 설(薛) 상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钱) 재상, 말에 뼈가 있으십니다! 루 통정이 폐하의 눈앞에서 일부러 소동을 일으킨 거라고 암시하시는 겁니까? 이 물건은 그가 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전 재상이 웃으며 말했다.

“설 상서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루 통정이 상서의 자랑스러운 부하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의문을 제기하는 것뿐입니다.”

“무슨 의문을 이런 식으로 제기한단 말입니까?” 

설 상서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 뭐 왕년에 책도 안 읽어본 사람인 줄 아시나 봅니다. 말 속에 숨겨진 의도가 있는데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자리에 있던 대인들, 그러니까 관리로서 그 자리까지 오른 사람 중 진사 시험을 통과하는 고생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설 상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로 상대를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전 재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봐요. 설 상서! 자기 자식새끼도 이렇게까지 보호는 안 하겠구려! 내가 그를 의심하는 게 맞다 칩시다.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이오? 당신은 루 통정이 지금 어찌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소? 통정사의 직책이란 것은 위로는 업무를 보고하고 아래로는 하달해야 하는 자리요. 그 자리를 그자가 차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법령이 전부 그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바뀌었소. 

이건 그가 정사당을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수작 아니겠소? 폐하께서는 지금 아무도 믿지 않고 그 사람 하나만을 믿고 계시오. 그자가 아무렇게나 한 마디만 지껄여도 우리의 열 마디 말보다 훨씬 유효하단 말이오. 그자는 지금 정무에 그치지 않고 궁의 일까지도 손을 뻗치고 있소. 신하의 본분은 어디로 갔단 말이오? 지금 이런 행동이 간신과 뭐가 다르오?”

설 상서는 전 재상을 힐끗 쳐다보더니 경멸에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 

“아이고, 됐네요! 이봐요. 전 재상, 말은 참 그럴듯하게 하는데 그냥 당신이 루안을 질투하는 거 아니오? 말단 통정이 일을 가져가서 이렇게 잘 해내는 걸 보면 당신보다 능력이 훨씬 좋은 것 아니겠소? 자기는 고생스럽게 참고 견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이 젊은 녀석과 비교가 되니 맘에 안 들어서 그러는 것 아니냔 말이오? 하! 내가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리다. 당신 능력이 모자란 게 맞으니 질투는 좀 넣어두시오!”

* * *

출궁할 때 대장공주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온이 조용히 마차에 오르더니 그녀에게 팔을 둘렀다.

“뭐 하는 게야?”

대장공주가 지온을 쳐다보며 지온의 팔을 풀었다. 

지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장공주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가녀린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말했다. 

“어머니, 울고 싶으면 우세요. 참지 마시고요.”

대장공주는 지온을 밀어내려고 하다가 결국 입을 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지온을 안고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지온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어머니, 사실 어머니는 운이 좋은 분이세요!”

대장공주가 울먹이며 지온에게 말했다.

“운이 어디가 좋다는 게야? 가족들이 전부 불행하게 죽었는데.”

“그럴 리가요? 영종황제께서 이유 없이 음해당하셨으니 좀 불쌍하시긴 하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태어나셨고 몸도 건강하시니,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는 아이를 못 낳잖니.”

지온이 웃으며 대장공주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를 꼭 자기가 낳아야 하는 건 아니지요. 어머니께 황위를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를 좀 보세요. 어머니께서 힘들게 키울 필요도 없이 이렇게 어머니 앞에 나타났잖아요.”

대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눈물이 나오는 와중에 웃음까지 터져 괴로워하며 말했다. 

“이 뻔뻔한 것아.”

지온이 웃었다. 

“그러게요. 제가 뻔뻔하지 않았으면 어머니와 제가 어디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나 있었겠어요?”

그 당시 지온은 대장공주의 맘에 들기 위해 정말 별의별 궁리를 다 했었다. 

지온의 권유로 한바탕 울고 난 대장공주는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던 슬픔이 많이 해소된 것 같았다. 대장공주는 마침내 손을 놓고 천천히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네 말도 틀리지는 않구나. 태어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정말 행운이지. 선황제셨던 오라버니도 몸이 약했지만 근이를 낳았어. 근이가 결국 사고를 당했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오라버니에게 20년 동안 희망과 즐거움을 주었지.”

지온은 슬프고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지온은 선대 태자를 떠올렸다. 

이미 2대째 자손을 얻기 어려웠던 황실에서는 선대 태자에게 일찍 장가를 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몇 명의 궁녀를 선대 태자 곁에 붙여두었다.

하지만 그가 재난을 당할 때까지 그 궁녀들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