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9)화 (339/385)
  • 339화. 약혼

    강왕세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당신 말은 서신을 보내지 말라는 거요?”

    “물론 보내야 합니다. 소달의 죽음은 예삿일이 아니니까요. 세자께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참모들이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강왕세자는 세자비의 말에 무언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이 서신은 내가 직접 쓰겠소.”

    세자비가 웃으며 먹을 갈아주었다.

    부부는 한 구절 한 구절 세심하게 다듬어 마침내 서신을 완성했다. 

    강왕세자는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고 한숨을 돌렸다. 그는 세자비에게 시선을 돌리고 세자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아주 밉살스러운 여자였지만, 자신에게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었던 지난날,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사실상 참모들보다 더 믿을 만했다. 

    강왕세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여자를 그냥 참모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할 일이 없으면 잠자리도 함께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부인이 시집오기 전의 그 구질구질한 일들은 계속 생각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아들은 자신의 씨가 분명했다. 

    강왕세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 세자비를 다시 보니 그렇게 밉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시 방금 전까지 하던 고민을 떠올린 세자는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여섯째한테 내가 그냥 당한 거란 말인가? 정말 분해서 참을 수가 없군.”

    세자비가 무심코 말했다.

    “겉으로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남모르게 혼을 내줄 수는 있겠지요.”

    강왕세자는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어떻게 혼을 낸단 말이오? 말해 보시오.”

    세자비는 사색에 잠겼다.

    * * *

    4월이 되자 정국공부에는 경사가 끊이지 않았다.

    우선 몇 년 동안 빈둥거리던 정국공이 금군 통령직을 맡았고, 이어서 경소소의 혼사가 윤곽이 잡혔다.

    지온은 대장공주를 따라 손님 자격으로 정국공부에 갔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경소소의 불평을 들었다. 

    “난 혼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게 했어.”

    지온이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르더니,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필 그 사람이야?”

    경소소가 손을 펼치며 말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다른 사람들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걸.”

    지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국공부의 큰아가씨인 데다 이렇게 귀엽게 생기기까지 했는데, 장가를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있나?”

    경소소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 언니, 나 정말 귀여워?”

    지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소소는 얼굴이 둥글고 볼에 보조개가 두 개 있었는데 생김새가 류명주와 조금 비슷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출신이 너무 달라서 기질도 확연히 달랐다. 

    류명주는 부드럽고 청아해서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경소소는 활발하고 귀여웠지만, 조용히 있을 때는 수려하고 아리따웠다. 

    지온이 긍정해주자 경소소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조금 의기양양해진 것 같았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지온은 경소소가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물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누가 또 그런 말을 한 거 아니야?”

    경소소는 바로 정색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아니야. 언니가 칭찬해줬잖아. 난 그냥 좀 기뻐하면 안 돼?”

    지온도 굳이 더 따지지 않고 그냥 모르는 척해주었다.

    “알았어.”

    그리고 말을 돌렸다.

    “왜 아무도 너한테 장가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야? 믿을 수가 없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말을 꺼내면 국공부에 와서 구혼할 사람이 한 무더기는 될걸.”

    “아이고, 그게 아니라…….”

    지온이 넌지시 떠보자 경소소는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입을 열고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집으로 돌아온 유 노태사는 장손이 홀아비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 대부인은 일전에 자신의 반대로 지온과의 혼사가 틀어진 일 때문에 시아버지를 볼 때마다 제 발이 저려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점찍어 둔 사람이 있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유 노태사는 그게 정국공부의 아가씨라는 말을 듣고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해 혼사를 빨리 확정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직 종손조차 보지 못하고 있어 옛 친구를 만날 때 고개도 들기 힘들다고 여기고 있었다.

    유신지는 자신의 조부 앞에서는 아주 온순해져서 감히 그의 의견에 토를 달지 못했다.

    유신지가 갑자기 약혼하자는 말을 꺼내니, 경소소는 당연히 이를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신지는 슬그머니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며 이 일을 상의하자고 했다. 

    “반대로 생각해보시오. 이 혼사를 거절하면 우리는 계속 선을 봐야 하오. 안 그렇소?”

    경소소가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요 며칠 그녀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더니 그녀의 어머니는 벌써 다음번 선 자리를 고르고 있었다. 

    “선을 보는 것도 귀찮지 않소? 매번 치장해야 하지 옷도 갈아입어야 하지 장신구도 바꿔 차야 하지 거기다 점잖은 척까지 해야 하오. 누굴 만나면 또 바로 가지도 못하고 대화도 해야 하오. 모르는 사람들이라 대화를 해도 하나도 즐겁지 않지. 끝나고 나면 또 핑계를 찾아서 거절해야 하오. 

    상대방이 좋다고 하는데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바로 눈이 왜 이렇게 높냐고 욕을 먹지. 기껏 좋다는데 왜 응해주지 않느냐며 말이오. 이러저러해서 그 사람이 싫다고 해도 욕을 먹긴 마찬가지지. 너는 얼마나 잘나서 다른 사람을 싫어하느냐고 말이오!”

    경소소는 그의 말에 동의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매번 선을 볼 때마다 이런 상황이 펼쳐져서 굳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매우 힘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우리끼리 혼인을 맺읍시다! 나중에 놀러 나오고 싶으면 나한테 편지를 보내시오. 내가 엄호해 주겠소. 경 백모께서 당신한테 또 뭐라 하시면 내가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면 할 말이 없으실 것 아니오?”

    이 말이 경소소의 마음에 콕 박혔다.

    ‘하긴, 어머니는 늘 나한테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안 된다고 하시지. 난 태어날 때부터 이랬는데 대체 누구 탓을 하는 거야?’

    “혼사가 정해지면 결혼 날짜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끌면 되지 않겠소! 아무 이유나 둘러대서 몇 달 미루고 또 미루고 하다 보면 꽤 오래 미룰 수 있을 거요.”

    경소소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유신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쩐지 우리 큰 오라버니가 당신이 똑똑하다고 그리 칭찬하더라니, 역시 뱃속에 못된 심보가 그득했군요.”

    그 말에 유신지는 말을 잃었다.

    “…….”

    ‘이건 대체 칭찬인가, 욕인가? 아무렴 어때, 혼사만 확정할 수 있으면 되지.’

    정신을 차린 유신지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신이 다른 사람을 찾는 것도 여의찮을 거요. 그렇게 많은 사람과 선을 봤어도 다들 각양각색으로 문제가 있지 않았소? 그리고 나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도 없지 않소?”

    경소소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알았어요. 당신이랑 할게요!”

    지온은 이야기를 다 듣고 동정하는 눈길로 경소소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유신지 공자한테 속았구나?’

    혼사가 어디 장난인가? 결혼하기로 해놓고 미루면 대체 언제까지 미룰 수 있단 말인가?

    ‘됐다. 됐어. 한 사람은 속이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꺼이 속아주겠다는데, 이것도 천생연분인 거지.’

    * * *

    이 일을 알게 된 루안이 유신지에게 술을 한 잔 샀다.

    유신지는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재차 물었다. 

    “잠깐, 나더러 계산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 오늘 돈 안 가져왔네.”

    루안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다 낼 거니까 안심하고 마시게!”

    유신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루안, 자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건가? 자진해서 술을 다 사다니!”

    같이 초대를 받은 원씨 집안의 대공자가 말했다.

    “사촌 동생,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루 통정이 너한테 이렇게 친절한데.”

    술을 얻어먹으러 온 유모지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외사촌 형님, 형님이 몰라서 그래요. 우리 형이 북양왕부 넷째 공자와 친구가 된 지 그렇게 오래됐어도 여태 한 끼도 얻어먹어 본 적이 없어요. 이 자식은 무뢰한이라니까요. 아주 인색하기 짝이 없어요.”

    루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한턱내는 것 아니겠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네. 그래서 오늘 먹을 건가 말 건가?”

    “먹어야지!”

    유씨 형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루안이 한턱내다니 이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양껏 먹어서 지금껏 들어간 원금을 회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 * *

    날이 점차 어두워지자 황제는 승원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흔들의자에 누워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호은이 와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폐하, 오늘은 어느 마마께 가시겠습니까?”

    황제는 눈을 감고 손을 저었다.

    “안 가련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구나.”

    황제는 때로는 후궁에 여자가 많은 것이 아주 성가셨다. 매일 전조(*前朝: 궁전의 바깥채 거실)에서 돌아오면 어디로 갈지 생각해야만 했다.

    황후 쪽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지금 심씨 가문을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황후와 감정적인 유대가 필요했다. 신비 쪽도 한 번씩 들여다봐야 했다. 지난번 같은 큰일을 태후가 신비에게 알려준 걸 보면 그녀가 태후의 환심을 산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대씨 가문의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 

    류명주는 온화하고 영리하였으며, 자신이 강제로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으니 잘 돌봐줘야만 했다. 다른 미인들도 하나같이 자신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서, 때론 그녀들이 느긋하게 성총을 기다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하나뿐이고 한 달은 30일밖에 안 됐다. 후궁의 비빈에게 각각 은혜를 내리려면 자신은 팽이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아주 삐뚤어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기방의 아가씨들조차 삐치면 손님을 받지 않는데, 황제인 짐은 되려…… 아, 더는 생각하지 말자. 나 자신을 기방의 기녀와 비교하다니, 정말 내가 실성을 했구나. 아무튼 오늘은 쉬어야겠다.’

    잠시 누워있던 황제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소희는?”

    호은이 대답했다.

    “차 방에 있습니다! 와서 민보(民報)를 읽으라고 할까요?”

    “이참에 요즘 새로운 소식들 얘기나 해달라고 해야겠구나.”

    “예.”

    소희가 곧 도착했다. 한참 민보(民報) 읽는 것을 듣고 있던 황제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물었다. 

    “오늘 루안이 안 왔지? 어째 뭔가 빠진 것 같더라니.”

    호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 오늘 루 통정은 휴가입니다!”

    “아, 그랬군.”

    황제는 생각할수록 염증이 났다. 

    “신하들은 그래도 휴가라도 있지, 짐은 대체 이게 뭔가. 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한가하게 쉴 수도 없으니.”

    호은은 뭐라 대답하기도 곤란해서 그저 함께 웃었다. 

    소희가 갑자기 말했다.

    “폐하, 루 통정은 아마 오늘 술을 마시러 갔을 겁니다.”

    황제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소인, 어제 루 통정을 배웅하다가 슬쩍 들었습니다. 유씨 가문 대공자가 약혼을 해서 루 통정이 술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유씨 가문의 대공자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기억하기로는 루안과 사이가 꽤 좋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냈던 것 같은데……. 그래 어느 집 아가씨로 정했다고 하더냐?”

    “정국공부의 아가씨입니다.”

    “그랬구나!”

    황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루 통정이 나서서 술을 다 청한다 했구나. 루안이 정국공부의 조카사위이니 유씨 가문의 대공자가 정국공부의 아가씨한테 장가를 들면 두 사람이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황제는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루안의 혼사는 대장공주를 묶어두고 그 참에 정국공부에까지 한 다리 걸치기 위해 자신이 재촉하여 성사한 것이다. 이제 루안이 유씨 가문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문무가 다 갖추어진 셈이 아니겠는가?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말했다. 

    “호은아, 창고에 가서 문방사우(*文房四宝: 종이, 붓, 먹, 벼루의 네 가지 문방구) 한 채를 챙기고 황후에게 가서, 옥여의(玉如意) 같은 것을 받아다 그 두 가문에 보내거라.”

    “예.”

    호은이 대답하고 나갔다.

    황제는 소희가 민보(民報)를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편으로 여러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잠이 들었다.

    소희는 황제의 숨결이 점차 안정되는 것을 보고 민보를 읽는 것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어 준 뒤 대전을 나왔다. 

    황제는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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