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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38)화 (338/385)
  • 338화. 또 한발 늦다

    벌써 사시(*巳时: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의 시간)였다. 강왕세자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방안에 가득 찬 음탕한 기운을 내보냈다. 

    세자비는 침대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옷을 반만 걸친 채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을 보았다.

    요 며칠 강왕세자는 예전처럼 시간 대부분을 세자비에게 와서 보냈다. 심지어는 전보다 훨씬 더 정열적이기까지 했다. 

    세자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남자란 정말 재미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혼한 지 10년이나 지나 부부 간의 감정은 무미건조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 남자가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들러붙었다.

    ‘천박한 놈.’

    공기가 맑아지길 기다렸다가 세자비가 입을 열었다.

    “부군께서는 오늘 외출하지 않으십니까?”

    강왕세자가 힐끗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왜, 날 쫓아내고 싶은 게요?”

    세자비가 입술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부군께서 요즘 집안일에만 몰두하고 계셔서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실까 봐 그러지요.”

    전에는 무언가 부적절한 일이 있으면 세자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거리낌 없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강왕세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오씨,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직도 현모양처 노릇을 하려는 게요? 이제는 본 세자한테 훈계까지 하는군.”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세자비는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제대로 맞아들인 정실 아내이자 앞으로 이 왕부의 안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어쩌면 다음 황위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녀의 의기양양한 웃음을 본 강왕세자는 더욱 불쾌해하며 비꼬았다.

    “다음 황위? 꿈이 아주 야무지시군! 언젠가 내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당신을 죽여 버릴 거요!”

    세자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군께서는 왜 화를 내십니까? 사실 이 일은 당신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 

    강왕세자는 조롱을 하면서도 그녀가 어떻게 변명하는지 듣고 싶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시겠습니까? 간통…….”

    세자비가 이 두 글자를 말하자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는 눈을 굴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강왕세자는 냉소를 그치지 않았다.

    “그럼 어디 윤이가 내 씨라고 말해보시지?”

    “물론 아니지요, 하지만 이 일은 당신이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세자비는 손을 뻗어 햇빛 아래에서 자신의 가냘픈 손가락을 감상했다. 

    “간통이니 외도니 하는 말들 말입니다. 신첩은 왕부로 시집을 와서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 집을 보살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정도를 벗어난 적이 없지요. 윤이는 시집오기 전의 일이고 그때는 당신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강왕세자가 “허”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과부가 재혼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신첩이 전에 한 번 시집갔다 온 걸로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강왕세자는 세자비의 뻔뻔스러운 말을 듣고 그녀를 목 졸라 죽이지 못한 것이 다 한스러웠다. 

    “감히 말을 그따위로 하다니? 본 세자가 어떤 규수한테 장가를 못 가서 너 같이 정조를 잃은 천한 여자한테 장가를 든단 말이냐?”

    세자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냥 일이 이미 이렇게 돼버렸으니 바꿀 수 없다는 걸 말한 것뿐입니다. 당신이 밤낮으로 그걸 가지고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생각을 좀 넓게 가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흥!”

    강왕세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수치를 모르는군!”

    세자비가 후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에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강왕세자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세자비가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당신에게 한 가지 일깨워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세자비를 얼핏 보니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소달은 이미 죽었고, 금군은 지금 누구 손에 들어가 있습니까? 설마 이런 중요한 일을 세자 전하께서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한 강왕세자가 벌떡 일어나 씻고 머리를 빗었다. 

    예전 같았으면 세자비가 바로 시중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누워 세자가 욕을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부군의 시중을 들 줄도 모르나? 게으른 여편네 같으니라고!”

    세자비는 그제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일어나 아무렇게나 겉옷을 걸치고 세자가 씻는 것을 도왔다. 

    얼마 후, 외출할 준비를 마친 강왕세자는 마차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세자가 바깥마당에 도착하자 측근 참모가 마중을 나왔다. 

    “세자 전하, 드디어 나오셨군요. 서둘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금군 통령의 일 말인가?”

    측근 참모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소달이 죽었으니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금군 통령 자리를 빨리 보충하는 것입니다.”

    강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마차에 오르라고 한 뒤 물었다.

    “자넨 누가 가장 좋을 것 같나?”

    부통령 중에도 강왕부의 사람이 있긴 했지만 다른 곳의 장수 또한 전근시킬 수 있었다.

    마차가 궁문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두 사람은 상의하고 최종적으로 인선을 정했다.

    사실 이 일은 참모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의가 끝났고 그저 강왕세자에게 전하기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참모의 전달이 끝난 후 강왕세자는 궁으로 들어갔다.

    황제에게 예를 올린 강왕세자가 말했다.

    “폐하, 소달이 자기 죄를 인정했으니, 이 금군 통령 자리는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됩니다. 신이 이미 인선을 정했으니 폐하께서 적합한지 한 번 봐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황제의 놀란 표정을 보았다. 

    “형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 일은 짐이 벌써 명령을 내렸습니다.”

    강왕세자는 멍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말했다.

    “금군 통령 자리이지 않습니까! 형님 말대로 그 자리가 너무 오래 비어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짐이 벌써 사람을 정해서 명령을 내렸지요. 아마 정사당에서 이미 인사발령을 냈을 겁니다.”

    강왕세자는 안색이 변하여 이를 악물고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누구를 임명하셨습니까?”

    “정국공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경씨 가문이 충성심이 강한 데다 정국공 또한 여러 해 동안 전쟁에 출정하여 경험이 풍부하지 않습니까. 경성에서 수년간 한가하게 보내셨으니 중책을 맡길 때도 되었지요.”

    강왕세자는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제하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그 사람이 왜 한가한지 모르는 거냐? 그 사람은 선대 황제의 사람이고 대장공주의 시아버지다. 부왕께서 큰 힘을 들여서 경성으로 보내 그 사람을 눌러 놓은 것인데, 네가 지금 그 사람의 손에 금군을 쥐여 준다고?”

    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황제가 얼굴에 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형님, 말을 삼가세요! 정국공은 나라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함부로 모욕하면 안 되지요. 그리고 선대 황제께 충성했던 것이 무엇이 잘못됐단 말입니까? 전에는 선대 황제에게 충성하였지만, 지금은 스스로 짐에게 충성하고 있습니다!”

    강왕세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 그래. 북양에 대해 말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했었던가. 정말 출세했군. 강왕부에서 찍어 눌러 놓은 적들을 오히려 하나둘씩 자신의 측근으로 키우다니.’

    물론 북양(北襄)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멀리 천 리 밖에 있어 그들은 지금 경성에 간섭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국공은 다르다. 그가 금군 통령이 되면, 이 경성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이런 쓸모없는 놈, 부왕께서 얼마나 애를 써서 이 경성을 손에 넣었는지 알긴 하느냐? 안 그랬으면 네 놈의 황위가 대체 어디에서 왔겠느냔 말이냐?’

    강왕세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제는 축객령을 내렸다. 

    “됐습니다. 짐은 또 할 일이 있으니 이만 가보세요.”

    “너는…….”

    강왕세자는 고개를 들어 성난 눈길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황제 역시 그 못지않게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덤벼들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정면으로 붙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강왕세자의 마음속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지만, 강왕세자는 끝내 이를 눌러 삼키며 화를 참았다.

    소달은 이미 죽었고 정사당의 재상들은 교활했기 때문에 지금 황제와 얼굴을 붉히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었다.

    “신, 물러가겠습니다.”

    강왕세자는 딱딱한 말투로 이 말만 던지고 물러갔다.

    궁전 안이 조용해지자 루안이 병풍 뒤에서 나왔다.

    “폐하.”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루안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옥좌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황제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미친 듯이 웃었다.

    “루 통정, 보았는가? 형님의 그 낯빛 말이네. 하하하,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게야? 자기가 금군 통령 자리에 누군가 앉히고 싶으면 마음대로 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나? 짐이 황제인데 당연히 짐이 임명해야지!”

    황제는 4년 만에 드디어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경험을 했다. 

    예전에는 그가 정무를 처리할 때 항상 옆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폐하,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합니다.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 그건 적절치 않습니다.

    ‘내가 정말 천하의 주인이 맞긴 한가? 왜 매일 내가 결재한 상소문이 되돌아올까 봐 걱정해야 하는 거지?’

    마치 어릴 적 숙제 검사를 받는 것처럼 황제는 진이 다 빠지곤 했었다.

    그러다가 루안이 통정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황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루안은 황제에게 이 정무들을 대략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또 정사당 쪽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든 다 루안이 마음속에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황제가 더 이상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이제 금군 통령 같은 자리조차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내 황제는 남의 집 개로 자기 집 대문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뒤돌아섰을 때 그 개가 자신을 물어뜯지라도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 * *

    강왕세자는 왕부로 돌아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방 안의 꽃병을 집어 던지더니 외쳤다.

    “부왕께 서신을 보내라! 여섯째가 반항하고 있다!”

    참모들도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강왕세자는 한동안 혼자 화를 내다 겸연쩍어져서 후원으로 갔다.

    세자비가 막 아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왜 이리 화가 나셨습니까?”

    “여섯째 그 개자식 때문 아니겠소!”

    강왕세자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놈이 금군통령이라는 요직을 정국공에게 주고서는 나한테 말도 안 했소. 그래 놓고 도리어 나를 책망하며 욕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세자비는 깜짝 놀랐다.

    “벌써요? 그걸 누가 알려 준 걸까요?”

    강왕세자는 연신 냉소했다.

    “누구긴 누구겠소? 틀림없이 그 루안이겠지! 그놈이 여섯째 옆에 달라붙은 이후로 여섯째가 번번이 나와 맞서고 있소.”

    세자비가 말했다.

    “폐하께서 그런 자리에 앉아계시니 분명 자신의 측근을 양성하려 하시겠지요.”

    그러고 나서 세자비가 물었다. 

    “세자께서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십니까?”

    강왕세자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난 황제를 통제할 수 없으나 부왕께서도 여전히 황제를 통제하지 못하실까? 일단 참모들에게 부왕께 편지를 보내라고 했소.”

    “안 됩니다!”

    세자비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강왕세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세자비가 말했다.

    “아버님께는 폐하도 당신도 모두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본래 아버님을 대신해서 정세를 살피려는 목적으로 먼저 경성으로 오신 게 아닙니까. 근데 당신이 폐하한테 옴짝달싹 못 할 정도로 짓눌려 결국 도움을 요청한다면 아버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당신이 무능해서 폐하보다 못한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언젠가 아버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면 당신을 후계자로 뽑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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