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7)화 (337/385)
  • 337화. 누가 누구를 비웃는단 말인가

    이윽고 유 노태사가 귀경한 일로 또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지온은 이미 영산에서 인사를 드렸으니 거기에 끼지 않아도 되어 오히려 좋았다.

    * * *

    지온은 집으로 돌아와 루안에게 유 노태사의 말을 전하며 물었다. 

    “당신 생각에 어르신께서 무슨 의도로 말씀하신 것 같아요? 우리한테 경고하는 걸까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경고였으면 그렇게 친절하게 하시지 않았을 거요. 전에 유 대공자가 몇 번 조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말에 뼈가 있고 그런 분은 아닌 것 같았소. 당신을 부른 건 그냥 아랫사람이니까 챙겨주려고 그러신 것 아니겠소. 우리가 따로 추측할 필요 없이 그냥 그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태사가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던 것은 아마 진심일 것이다.

    중병에 걸린 사람을 보는 것처럼 치료하자니 너무 심하게 괴로울까 걱정이고, 치료를 안 하자니 또 그가 나날이 나빠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런 심정이지 않을까.

    이 노태사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로 제국의 전성기를 경험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이 나라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아플 것이다.

    * * *

    이틀 후, 루안은 휴가를 받아 기분전환을 하러 유신지와 광명사에 갔다. 그런데 거기서 예상치 못하게 유 노태사를 만났다. 

    “할아버지.”

    유신지가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정말 공교롭네요!”

    유 노태사는 수염을 쓰다듬고 빙그레 미소 지으며 농담했다.

    “너 이 녀석, 이렇게 좋은 봄날에 아가씨와 나들이를 가는 게 아니라 이런 젊은 공자와 놀고 있다니. 어쩐지 이 할아비가 귀경하고 나서 이상한 소문이 귀에 들린다 했다.”

    ‘이상한……?’

    유신지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빌었다.

    “할아버지! 그건 양심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말이니, 믿으시면 안 됩니다.”

    유 노태사는 더 상냥하게 웃었다.

    “나야 당연히 안 믿지! 근데 넌 뭘 또 그리 긴장하고 그러느냐?”

    “…….”

    루안이 앞으로 나섰다.

    “소인, 유 노태사를 뵙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에게도 예를 올렸다. 

    “무비 대사, 원 재상.”

    무비 대사는 아미타불을 외웠다. 

    원창은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왔으니 이리 와서 차나 한잔하자꾸나!”

    유 노태사가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비 스님의 차는 아무나 마실 수 없단다.”

    루안이 눈을 반짝이며 몸을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앉자마자 유 노태사와 무비대사가 선(禅)에 대해 논하는 것을 들었다. 원 재상도 인자한 말투로 몇 마디 끼어들었다. 

    유신지는 아랫사람이라 옆에 앉아 물을 끓이고 차를 따랐다. 

    이 대화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자 유 노태사가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 늙은이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스님, 우리 다음에 다시 모이시지요.”

    무비 대사가 일어나서 아미타불을 외고 웃으며 말했다.

    “노승은 언제든 괜찮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창도 일어나 배웅했다.

    유신지는 할아버지를 마차까지 배웅하고 돌아와서 루안과 함께 계속 한가롭게 거닐었다.

    “자네는 정말 조급하지도 않은가 보군. 오후 내내 이야기만 들었는데, 무슨 소득이라도 있나?”

    루안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불게(*佛偈: 부처를 찬탄하는 시가)를 읊더니 말했다. 

    “이거 아주 재미있군.”

    유신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네 정말 진지하게 들은 겐가?”

    루안이 그를 힐끗 보았다.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데 어찌 진지하게 듣지 않을 수 있겠나?”

    유신지가 이마를 때리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루 통정, 내가 누구한테도 지는 사람이 아닌데 자네한테만은 항상 지는군, 알고 보니 나 혼자만 괜히 거기 앉아서 고민하고 있었구먼.”

    루안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자네는 뭘 그리 고민했나? 그분이 자네 조부이신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으면 그냥 물어보면 될 것을!”

    “…….”

    유신지가 또 이마를 때리며 말했다. 

    “자네 말이 옳군.”

    몇 걸음 걷다 그가 또 말했다. 

    “자네 생각에 우리 외숙께서 또 무슨 연유로 여기 오신 것 같나?”

    루안이 말했다.

    “원 재상께서도 여기서는 후배이니 그저 윗사람을 모시고 선(禅)에 대해 들으러 온 것이지, 뭐 별다른 게 있겠나?”

    유신지는 믿을 수 없었다. 

    “외숙께서는 미꾸라지 같은 분이네. 우리 집과 친하다고는 하지만 조정의 일과 관련해서는 우리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신다네. 그런 분이 우리 할아버지를 모시고 선(禅)을 들으러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루안이 웃으며 잠시 걷다가 말했다.

    “며칠 전 소달을 단죄할 때 나는 정사당 쪽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네.”

    루안이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유신지는 얼른 귀를 쫑긋 세웠다. 

    루안이 힐끗 그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날 상 수상이 자리에 안 계셨는데 때마침 당직이 원 재상이셨지. 내가 들어가자마자 원 재상이 문서를 보고 바로 도장을 찍어 주셨네.”

    유신지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외숙께서…….”

    “날 깜짝 놀라게 하셨지.” 

    루안이 말했다. 

    “난 미리 원 재상을 어떻게 움직일지 구상을 해놨었다네. 그런데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줄은 몰랐지. 어쨌든 안 그랬으면 제시간에 처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거네.”

    정사당은 성지를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의 이 황제와 같이 권력을 제대로 휘어잡지 못했을 때는 많은 경우 성지를 내리는 수단인 정사당에서 직접 정책 명령이나 법령을 내렸다.

    만약 원창이 도장을 찍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그 일은 계속 거기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왕세자가 도착해서 이 일에 대해 옥신각신하기 시작하면 소달을 죽이는 일은 난이도가 배로 높아졌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원 재상은 그날 특별히 편의를 봐준 것이다.

    유신지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손을 뻗어 루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이 자식, 운이 좋았구나.”

    * * *

    황제는 요즘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후궁이 모두 화목하여 가슴 아팠던 옥비의 일은 점점 잊혀 갔다.

    소달이 죽자 그의 마음은 훨씬 더 후련해졌다. 

    이 전까지는 마치 누군가가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코를 골며 자고 있고, 그놈이 데려온 못된 개 한 마리까지 대문을 지키고 있어 도리어 집주인이 전전긍긍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정말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황제는 세자비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황제는 서재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루안을 보며 배가 아플 때까지 껄껄 웃어댔다. 

    끝으로 황제는 웃다가 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형님은 자기가 짐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줄은 몰랐겠지? 남의 자식을 10년이나 키웠는데 이제는 이를 악물고 그걸 숨겨야 하니 말일세. 안 그러면 이 간통 사건이 온 경성에 퍼질 테니.”

    루안은 그런 황제를 보며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하여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를 비웃어대는 것을 보니 현비의 일은 까맣게 잊으신 것 같군?’

    이 간통 사건은 형제 둘 다 겪은 일이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비웃는단 말인가?

    물론 루안은 이 말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는 다시 진지한 말을 내뱉었다.

    “세자께서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대외적으로 현주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세자비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구하러 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풍파도 서서히 가라앉을 겁니다.”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신 지 보고 싶군. 부인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그 여자를 살려둘 수밖에 없다니.”

    루안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틀렸어. 그 사람은 죽이고 싶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녀에게 깊이 빠져 있지. 사내자식들이란 정말 등신 같구나, 흥! 나는 빼고 말이야.’

    황제가 다 웃기를 기다렸다가 루안이 물었다.

    “폐하, 소달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 생각해두신 새 통령이 있으십니까?”

    황제가 멍해져서 물었다.

    “자네 말은, 나더러 임명하란 말인가?”

    루안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는 황제이십니다. 이 금군 통령의 임명에 대해 폐하 말고 누가 입을 열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황제 이 말에 깨달은 듯 말했다. 

    “금군 통령이 평범한 직책은 아니지. 그가 지키는 것은 황실의 대문이니 반드시 황제의 심복이어야 하네.”

    황제가 등극했을 때는 이미 소달이 금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이때는 특수한 상황이라 황제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소달이 죽었는데 자기 사람을 임명하지 않고 뭘 더 기다린단 말인가?

    하지만 황제는 또 난처한 기색이었다.

    “지금 있는 부통령 중에 누가 믿을 만한가? 만일 또 형님 쪽 사람이면…….”

    루안이 말했다.

    “폐하, 굳이 부통령 중에서 뽑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폐하의 측근 중에서 뽑으시면 됩니다.”

    황제는 멍해졌다.

    “측근이라고?”

    루안이 넌지시 제시했다. 

    “예를 들면, 정국공부 말입니다.”

    “아!”

    황제는 탄성을 지르더니 조금 주저했다. 

    “정국공이 적합할까? 그쪽 가문과 고모께서 그런 관계인데…….”

    루안이 반문했다.

    “폐하, 잊으셨습니까? 애초에 왜 신에게 대장공주의 양녀에게 장가가라고 하셨습니까?”

    대장공주를 끌어들이기 위해 소씨 가문에서 계략을 쓸까 봐 그래서 어느 순간 강왕세자가 이득을 차지할까 봐 걱정되어 그랬던 것이다.

    황제는 문득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지난 일 년 동안 고모께서 짐에게 아주 많은 도움을 주셨지. 이런 관계를 고려해보면 짐이 정국공부를 좀 더 신임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루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황제가 스스로 장점을 생각해냈다.

    “정국공부는 예로부터 믿을 만한 곳이었지. 개국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충직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짐이 그들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나? 지난번에 소씨 가문과 소송을 했을 때도 분명히 소달의 아들이 먼저 손을 댔는데 오히려 잘못한 소달 쪽에서 고소했었지. 그런데도 정국공은 일단 와서 사죄했네. 정말 인품이 하늘과 땅 차이지!”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황제는 말할수록 흥분했다.

    “짐이 곧 명을 내리겠네.” 

    그러더니 또 망설였다. 

    “설마 기각되는 건 아니겠지?”

    루안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닐 겁니다. 금군 통령의 임명은 정사당에서 기각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 직위는 황제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황제는 기뻐하며 손을 흔들면서 지시했다. 

    “성지를 작성하지!”

    루안이 즉시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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