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혼약의 유래
유신지는 강가로 걸어가면서 지온을 훔쳐보았다.
지온이 말했다.
“이렇게 훔쳐보면 당신이 아직 나한테 마음이 남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유신지가 이마를 때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쩐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익숙하더라니. 당신의 이런 말투가 우리 할아버지와 정말 똑같소. 설마 두 집안의 아이가 바뀐 건 아니겠지?”
지온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나랑 신지 공자도 나이 차이가 나잖아요! 당신 집에 나랑 동갑인 사람이 있나요?”
지온은 또 진지하게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유신지가 눈을 흘겼다.
“됐소, 됐소.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벌써 골치가 아파 죽겠소. 내 골칫거리를 두 배로 만들어줄 셈이오?”
지온이 아직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유민이 웃음을 터뜨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큰 오라버니, 어제 그랬잖아. 경 언니가 아주 말썽꾸러기라 오라버니 골칫거리를 엄청 많이 만들었다고. 이것까지 다 합치면 골칫거리가 한 여덟 배쯤 되겠는데?”
“…….”
유신지가 말했다.
“왜 여덟 배야?”
유민이 말했다.
“한 번에 두 배가 되면 그거에 두 배면 네 배가 되는 거고 그다음은 여덟 배가 되지 않겠어?”
“허허허.”
유신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숫자를 잘 세면서 왜 개구리는 안 세?”
“개구리?”
"개구리 한 마리에 네 다리, 두 마리에 여덟 다리, 세 마리에 열두 다리…….”
그들 남매는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지온은 부끄러워서 정말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유씨 가문의 별원은 강을 끼고 있었는데 거기에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멀리서 유 노태사가 느릿느릿 불에 부채질하는 것이 보였다.
물가에서 차를 마시며 꽃을 감상하고 파도를 구경하는 것은 정말 운치가 있었다.
지온은 곧 음식 냄새를 맡았다.
유 노태사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빙그레 웃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평범한 집의 할아버지 같았다.
“자, 자, 자, 불이 딱 좋구나.”
지온은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훠궈를 먹었다.
젊은이 셋이 자리에 앉자 유 노태사는 솥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닭고기탕이 들어 있었다.
시녀가 와서 탁자 위에 각종 나물과 버섯을 가득 차려놓았다.
“얼른 먹자, 얼른 먹으렴!”
유 노태사가 젓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
지온은 유씨 가문 남매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 밥을 든든하게 먹는 걸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게 됐다.
시기가 딱 나물이 나올 시기라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맛이 신선하고 연했다.
한 명의 노인과 세 명의 젊은이들이 솥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들은 코끝에 땀이 나도록 먹고 나서야 겨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시녀가 화로를 치우자 유 노태사는 아직도 흥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2년이나 집에 못 와서 이 맛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유신지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나물은 어디에나 있고 별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닭고기탕을 끓여서 나물을 넣어 먹는 건데 그걸 지역을 따지나요?”
유 노태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네가 뭘 모르는구나! 물도 땅도 다 다른데 같은 나물도 다른 지방에서 자라면 맛이 다르지 않겠느냐? 귤도 회남에서 자라야 귤이 되는 것이지, 안 그러냐?”
“예, 예, 맞아요. 할아버지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유 노태사가 빙그레 웃었다.
“네 이놈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는 게로구나.”
“아니, 아니에요, 감히 어찌 그러겠습니까.”
유신지는 정말로 감히 할아버지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유신지는 자기 부모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주장을 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했다.
* * *
할아버지와 손자 두 사람이 잠시 말다툼하다가, 할아버지 되는 유 노태사가 손에 들었던 부채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유신지와 유민이 곧 입을 다물고 단정하게 앉았다.
분위기는 꽤 엄격하고 단호하게 변했다.
지온이 자기도 모르게 곁눈질했다.
다들 유 노태사가 느릿느릿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말해 보거라, 지씨 가문 손녀딸과 둘째의 혼사는 어떻게 된 게냐?”
유신지는 다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런 일을 자기 여동생에게 설명하라고 하기는 곤란했다. 그렇다고 지온에게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작년 초에 지온 소저가 귀경하였는데 지온 소저는 집안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항간에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무지막지하고 학식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몰래 조방궁에 찾아가서 보고 오시더니 둘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셔서 파혼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씨 가문에서 혼약서를 가지고 있어서 파혼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신부를 바꾼 것입니다…….”
유 노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는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정곡을 찔렀다.
“그러니까 네 어미가 이 아이가 싫다고 억지로 파혼을 시킨 거란 말이지?”
유신지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 노태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 어떻게 보상해주면 좋겠니?”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보상은 그 당시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지금은 소용이 없습니다.”
유 노태사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도 그렇겠구나.”
유민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지온 언니는 오늘 처음 만난 것 아닌가? 어째서 대화하는 게 나랑 하는 것보다 더 익숙한 것 같지?’
유 노태사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유신지에게 말했다.
“네 어미가 내가 그때 이 혼약을 맺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던 게로구나! 물리게 되어 너무나 아쉽구나.”
유신지가 물었다.
“할아버지, 거기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요?”
유 노태사는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그에게 반문했다.
“너는 지 재상이 왜 황제의 신임을 얻었는지 아느냐?”
유신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걸 굳이 물을 필요가 있나? 재상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설사 그 사람에게 서체가 빼어나다는 등의 다른 장점이 있다고 한들, 그게 주요한 이유는 아니었겠지. 어쨌든 선대 황제는 실용적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유 노태사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건 지 재상이 천명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신지와 지온은 멍해졌다. 유민도 깜짝 놀라 소리치며 물었다.
“할아버지, 점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대 황제께서 그걸 좋아하셨어요?”
지온은 선대 황제가 신이니 귀신이니 어쩌고 하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읽는 것이야.”
유태사가 바로잡았다.
유민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지온은 생각에 잠겼다. 지온은 자신이 막 깨어났을 때 서재에서 찾았던 책 두 상자를 떠올렸다.
지 재상은 과연 사문에 정통한 비상한 인물이었다.
“천명은 하늘의 운을 읽는 것이고 점을 치는 것과는 다르단다.”
유태사는 손녀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그는 자기 손녀의 팔자가 괴이하고 살기가 중중하지만, 동시에 행운이 깃들어 있다고 했었다. 만약 어른까지 성장할 수만 있으면 반드시 천명을 받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지.”
유신지와 유민은 마치 천서(*天书: 하늘의 신선이 쓴 책)라도 읽은 것처럼 일제히 지온을 바라보았다.
“이 혼약을 맺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우리 유씨 가문이 덕망이 높으니 이 아이의 살기를 눌러 성인이 될 때까지 도와주려 한 것이지. 그 재난을 넘기고 나면 우리 가문의 운을 트이게 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유 노태사가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생각해보거라. 이 아이가 귀경했을 때, 어른이 되어 온 것을 보면 우리 집의 덕을 빌린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으냐. 우리가 낼 것은 이미 다 냈고, 이제 우리 집안에 행운이 들기만 기다리면 되는데 기어코 너희가 혼약을 깨버렸으니, 이 어찌 헛수고가 아니겠느냐?”
“…….”
유신지와 유민은 진땀이 다 났다.
“할아버지, 무슨 운명이에요, 실체도 없는 것을 어찌 진짜라고 믿으십니까?”
유신지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어째서 지온 소저에게서 살기를 느낄 수가 없을까요? 우리 같은 정상적인 사람과 다를 게 없잖아요!”
유 노태사가 손사래를 쳤다.
“지 재상이 안 계시니 나도 알아볼 방법은 없단다. 어쨌든 이미 다른 집에 시집 가버렸으니 우리가 손해 본 건 확실해진 셈이지.”
지온은 듣다 보니 이 말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온은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어르신, 저 들으라고 일부러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설마 댁에서 이 결혼을 파투 내셨으면서 또 제가 댁에 진 빚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허허…….”
유 노태사가 부채를 흔들었다.
“무슨 살기니 도겁이니 그냥 지어내신 거죠? 어르신, 어찌 아랫사람을 이렇게 속이실 수가 있으십니까?”
유 노태사가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됐다, 됐어, 그만하자.”
그의 이런 태도는 유신지와 유민을 더욱 헷갈리게 했다.
‘도대체 진짜야, 지어낸 거야?’
유 노태사가 또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넷째 아가야. 주방에서 과자를 만들고 있으니, 네가 이 할아비를 대신해 가서 좀 보고 와라.”
이것은 유민을 따돌리려는 의도였는데 유민 역시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럼 전 가볼게요.”
유 노태사가 이번에는 유신지를 바라보았다.
유신지가 얼른 말했다.
“전 다 알고 있으니 저한테까지 감추실 필요 없습니다.”
유 노태사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를 내쫓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가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너희가 한 일을 이 늙은이가 이미 다 알고 있다.”
지온은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요 몇 년 동안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니, 바깥세상이 별로 평온하지 않더구나.”
지온은 작년 한 해가 절로 떠올랐다. 대장공주는 주위 현부(县府)에 재난이 발생하는 것이 마치 국운이 쇠퇴하는 것 같다고 했었다.
“이 늙은이 마음이 아주 복잡하구나! 경성이 조금 어지러워지니 바깥은 훨씬 더 어지러워졌어.”
유 노태사가 지온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심사숙고하도록 하려무나.”
그의 말에서 호의가 느껴져 지온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유 노태사가 손을 뻗어 다리를 만지고는 한탄하며 말했다.
“밖에서 몇 년을 뛰어다녔더니 팔다리가 늙어서 걷기가 힘들구나.”
유신지가 힐끗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이제 고희(*일흔 살)밖에 안 되셨는데 벌써 팔다리가 늙으셨다니요?”
유 노태사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예부터 일흔 살까지 사는 사람은 드물었다, 넌 그게 다 농담인 줄 아느냐? 너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될 것이야.”
유신지가 그에게 차를 더 따라주며 말했다.
“그럼 집에 좀 가만히 계세요!”
“이제는 가고 싶어도 못 갈까 걱정이구나!”
유 노태사가 웃으며 물었다.
“원씨 가문은 요즘 어떠하냐?”
유신지가 대답했다.
“외사촌 형이 얼마 전에 과거에 합격했고 또 귀한 아들도 얻었습니다. 지금 원하는 일이 전부 이루어져서 아주 의기양양하시지요.”
“그 녀석한테 대운이 온 게로군.”
유 노태사가 이렇게 한 마디 논평하고는 곧바로 지온에게 물었다.
“대장공주께서 너를 양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구나? 요즘 그분은 잘 지내시느냐?”
지온이 대답했다.
“양어머니께서는 잘 지내십니다. 아주 혈기 왕성하시고 매일 저희 시어머니와 티격태격하시는데 거기서 또 다른 재미를 찾으신 것 같습니다.”
“아, 북양태비 맞지?”
유 노태사가 말했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그리 말하며 지온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좀 전에 우리 둘째랑 결혼한 게 아니냐 어쩌고 했던 것은 유 대부인을 깎아내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란 말이야? 자기가 정한 혼사를 며느리가 물러버린 것이 언짢았던 거군? 역시 노인이란 어린애랑 다를 것이 없어.’
“딴소리하지 말고 어서 말해 보거라.”
유 노태사는 시치미를 뗐다.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두 분은 앙숙이시지요. 그래도 늘 사이는 좋으십니다.”
유 노태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한 사람에 관해 물었다.
“그럼, 태후께서는?”
지온이 깊게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태후께서도 그런대로 잘 지내십니다. 매일 마음을 다해 예불을 하시고 궁에 은거하시면서 외출은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유 노태사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