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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35)화 (335/385)
  • 335화. 우연히 길에서 만나다

    3월 말이 되자 봄바람이 딱 좋았다.

    유씨 가문은 지온 일가를 영산(灵山)으로 초청하여 봄나들이를 하러 갔다.

    대장공주는 외출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북양태비가 남아서 그녀를 모셨고 대부인 정씨는 지온을 따라갔다. 

    길에 수레와 말이 많아서 가다 보니 유씨 가문의 마차와 지온이 탄 마차는 점점 멀어졌다.

    지온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시는데, 제가 늘 어머니를 귀찮게 하네요.”

    정씨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뒷방 마님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찍이 밀정 일을 할 때는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도 많았고 바쁠 때는 가까운 곳에서 잠깐씩 자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

    지금은 그저 가끔 지온을 데리고 외출하는 일밖에 없어서, 더 이상 한가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좋지 않으니 바람이나 쐬러 나온 셈 치면 될 일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자 지온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머니, 우리 아버지를 알기 전에 도대체 어느 가문에서 밀정 일을 하신 거예요?”

    대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온이 단념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지금도 말하면 안 되나요?”

    대부인이 말했다. 

    “우리 남매가 그 가문을 배신해서 도망치듯이 떠난 건 절대 아니라네. 옛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 예전의 일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을 뿐이지.”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지온도 더는 묻지 않고 다른 화제를 찾았다. 

    “어머니, 일전에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대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생활은 이미 경험해 보았잖은가. 지금 아주 잘 지내고 있어서 그럴 생각은 없네.”

    “그럼 외삼촌은요? 두 분, 이제 밀정 일은 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분도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까요?”

    대부인이 말했다.

    “오라버니는 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다고 하셨네.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걱정스럽다고.”

    지온이 말했다. 

    “하지만 이 일은 빨리 끝나지 않을 거예요. 만약에 10년, 20년이 걸린다면요?”

    “상관없네. 오라버니가 저래 봬도 사실 아직 서른도 안 됐으니 말일세. 10년 정도 더 기다려도 괜찮네.”

    지온은 깜짝 놀랐다. 

    “외숙부가 스물 몇 살밖에 안 됐어요?”

    “그래! 나보다 고작 두 살 많네.”

    “…….”

    지온은 할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정 사장은 겨우 이십 대 중반이었던 것이다. 차림새가 그러해서 지온은 정말 외숙부의 나이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두 모녀가 말을 하는 도중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잠시 후 마부가 와서 보고했다. 

    “앞에 노새가 끄는 차가 고장 나서 길을 막았습니다. 부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온이 발을 걷자 과연 노새가 이끄는 차 한 대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차를 몰던 사람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차 안의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대부인이 마부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가서 물어보게.”

    마부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상대편 차로 가서 말을 걸었다. 노새가 이끄는 차를 몰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마부에게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마부는 도리어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거절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노새 마차를 몰던 하인이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마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는가?”

    마부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쪽 차에 어르신이 계신데 다리가 불편하다고 저희 마차를 태워달라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마차에 계신 건 모두 여인들인데 불편하지 않습니까!”

    지온이 물었다.

    “저 댁 마차는 어디가 고장 났나? 임시로 수리가 안 되는 건가?”

    “바퀴가 갈라졌습니다. 제 작은 아이가 살펴보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지온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저쪽 하인한테 노새를 풀어 어르신이 먼저 타고 돌아가시게 한 다음 도와줄 사람을 부르라고 말해주게.”

    얼굴이 밝아진 마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그렇게 하면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얘야 저 사람한테 가보거라.”

    저쪽의 차를 몰던 하인이 이 얘기를 듣자마자 차에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가 잠시 의논을 하였다. 지온은 차 안에서 한 노인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상대편 하인은 노새를 풀고 노인을 부축하여 올려주었다. 

    그 노인은 예순 몇 살에 청색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몇 가닥 늘어뜨린 인자한 얼굴이었다. 탈것만 푸른 소로 바뀌면, 정말 노자가 관문을 나서는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았다. 

    노인은 지온의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향해 끄덕였다.

    지온도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인사했다.

    노인은 미소를 짓고 노새를 때리며 한발 앞서 나갔다. 

    마부는 노새가 이끄는 차를 한쪽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돌아와서 마차를 다시 몰았다.

    반 시진쯤 후에 지온은 유씨 가문의 별원에 도착했다.

    유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두 사람을 잃어버린 줄 알았잖나!”

    “오는 길에 일이 좀 생겨서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지온은 곧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을 감지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유 백모, 저기는……?”

    유 대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집 바깥 어르신이시네. 밖에서 실컷 놀다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셨어.”

    ‘유 노태사?’

    지온이 귀경한 지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지온은 자자한 명성만 들어보았을 뿐 한 번도 그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이 노태사께서는 벼슬길에 오른 이후부터 줄곧 여기저기 유람하느라 일 년 내내 집을 비운다고 들었다. 

    ‘좀 이따가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지온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까 길에서 본 그 노인이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지온의 눈에 보였다.

    지온은 어안이 벙벙했다.

    한 무리의 남녀들이 앞으로 나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외할아버지라고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외숙부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분이 바로 유 노태사란 말이지? 방금 길에서 우리한테 도움을 청했다 거절당한 그 어르신이?’

    지온은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직면해야 할 것은 역시 직면하는 게 맞았다.

    지온은 조용히 한숨을 쉬고 그 친척들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앞으로 나가 인사했다. 

    유 노태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씨 가문 손녀딸이었구나!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아직 예닐곱 살밖에 안 됐었는데!”

    지온은 옆에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뜻밖에도 유 노태사는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다.

    “내 일찍이 이 계집애가 복이 많을 줄 알았지. 어렸을 때 네가 능운진인과 집을 떠나 유람하지 않았니. 네 할아버지가 결혼을 물리겠다고 하는 걸 이 늙은이가 죽어도 안 된다고 했지. 이것 봐라, 네가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옆에 있던 유신지가 어색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지온 소저는 다른 가문 사람이랑 혼인했습니다!”

    “하?”

    유 노태사가 마치 큰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결혼을 했어? 우리 집 둘째랑 한 게 아니야?”

    유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셨으면 분명 일부러 우리 가문을 궁지에 빠트리려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유씨 가문 사람들은 속으로 이리 생각하며 곤혹스러워했다. 

    유 대부인은 훨씬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혼사는 애초에 그녀가 강력히 주장해서 무산된 것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시아버지가 밖에서 유람 중이라 전달되는 과정에서 편지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녀는 사후 보고하는 셈이 돼버린 것이다. 며느리로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솔직히 말해서 불효라 할 수 있었다.

    지온은 웃음을 참았다. 불편했던 마음이 단번에 풀렸다.

    유신지는 어머니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게 눈짓으로 몇 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유 노태사가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을 가로채고 물었다. 

    “아가, 우리 집 둘째가 맘에 안 들었니? 어째서 시집을 안 온 게야?”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모지 공자님은 아주 괜찮은 분이지요. 그저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네가 먼저 그 아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한 게냐, 아니면 그 아이가 먼저 너를 마음에 안 들어 한 게냐?”

    지온은 유 대부인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대답했다.

    “동시에 마음에 안 들어 했습니다.”

    “그랬구나!”

    유 노태사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마침내 지온을 놓아주었다. 

    “정말 아쉽게 됐구나.”

    유신지가 상황을 보다가 급히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부녀자들이 화림(花林)으로 이동하자 유 대부인이 연거푸 지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 집 어르신께서 성정이 저러시네. 잘 넘겨줘서 고마워. 아니었으면 오늘 아주 체면이 상할 뻔했어.”

    지온이 대답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파혼했을 당시 지온은 유씨 집안에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이 군자의 도(君子之道)를 져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씨 가문과 접촉이 많아지고 친분이 생긴 이후에는 다시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유 대부인은 어머니로서 그저 자신의 자식을 위해 생각했을 뿐이었다. 군자의 도리고 뭐고 그런 건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지온의 관심은 전부 유 노태사에게 쏠려 있었다. 지온은 아주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르신은 평소에도 이러시나요?”

    유 대부인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성격이 이러셔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저리 보시다가…….”

    유 대부인은 자신이 시아버지에 대해 험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말을 거두며 지온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네가 좀 이해해 주렴.”

    지온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건 어르신께서 나 대신 화를 내주신 것이나 다름없지. 그거에 기뻐하기에는 좀 늦은 것뿐이지.’

    유민이 한참 놀던 중에 시녀가 다가와 유민에게 말을 전하자 유민이 지온을 불렀다.

    “지온 언니, 시회(诗会) 들으러 가려는데 언니도 같이 갈래요?”

    지온은 눈을 똑바로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정씨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도 같이 갈까?”

    지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분명히 어르신께서 부르신 거예요. 괜찮아요.”

    한 번 협박을 당한 이후로, 모두 지온의 안전에 아주 신경을 썼다. 대장공주는 암위를 바꿨고 루안은 마부 등 수행 인력을 배치했다. 정씨도 지온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온이 유민과 함께 숲길로 나서자, 역시나 유신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조부께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시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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