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4)화 (334/385)
  • 334화. 불씨가 되살아나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자 강왕부는 등불을 밝혀 곳곳이 불빛으로 환했다.

    복도에서 시립하고 있던 시녀들이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세자 전하께서 그리 화가 나셔서 세자비를 찾아오신 건 결판을 내러 온 것이 아니었나? 어째서 한바탕 싸우고 나서 오히려…….’

    “언니…….”

    어린 시녀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다른 시녀가 손가락을 입에 갔다 대며 “쉿” 했다. 

    할 말이 있어도 지금은 하면 안 됐다. 주인이 들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어린 시녀는 잠시 말을 참았다. 하지만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했던 그녀는 결국 시녀의 귓가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언니, 세자비께서는 괜찮으시겠지요?”

    얼마 전 세자비의 곁을 수행했던 시녀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로 인해 저택 안의 인심이 흉흉해져 다들 다음 차례가 자기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세자비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그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시녀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정말 상식 밖이야!’

    시녀는 전에 분명히 세자비가 밖에서 남자를 만났다고 들었다. 설사 평민이라 할지라도 부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참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 현주를 가장 아끼던 세자가 현주를 가두어두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정말 이상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자 전하가 이곳에 와도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무미건조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간절해진 것인가?

    10년 동안이나 같이 살아서 벌써 노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신선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째서 불씨가 되살아난 걸까?

    시녀들은 오랫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딱따기(*梆子: 밤에 야경(夜警)을 돌 때 서로 마주쳐서 ‘딱딱’ 소리를 내게 만든 두 짝의 나무토막)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침내 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후, 강왕세자가 문을 밀고 나왔다.

    시녀들이 황급히 인사했다.

    “세자 전하.”

    강왕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녀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안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비마마!”

    방 안은 온통 어수선했고 세자비는 몸을 반쯤 가리고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녀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세자비마마!”

    잠시 후 세자비의 눈꺼풀이 떨렸다. 숨결은 미약했지만 목소리는 꿋꿋했다.

    “물을 가져오너라.”

    시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을 정리하고 물을 따랐다. 

    세자비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두 모금 마셨다. 조금 진정이 되자 세자비는 계속 지시했다. 

    “떡 두 개만 가져오고 목욕물을 준비해라.”

    “예.”

    이각쯤 지난 후 목욕통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세자비를 보며 물을 끼얹던 어린 시녀가 전전긍긍하며 물었다.

    “세자비마마? 세자비마마?”

    세자비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그녀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며 웃었다.

    “왜,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어린 시녀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소, 소인이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일어나거라, 탓하려 한 건 아니다.”

    세자비가 스스로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하(小荷)입니다.”

    세자비는 이름을 한 번 불러보더니 어린 시녀에게 물었다.

    “지금 내 곁에 사람이 부족하니, 네가 방에 남아서 시중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 직무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어서 예전이었다면 소하 같은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 저택 안의 모든 사람이 맞아 죽은 시녀를 보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린 시녀는 겁이 났지만 세자비의 모습을 보니 동정심이 들었다. 소하는 결국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예.” 

    세자비가 웃으며 일어나더니 말했다.

    “자, 그럼 수건을 가져오너라.”

    * * *

    강왕비는 요즘 아주 의기양양했다.

    그 탕약 사건이 있고 난 뒤 강왕세자는 세자비를 의심하여 강왕비의 저택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바꿔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왕비는 또 세자가 세자비를 가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강왕비는 길길이 날뛰었다. 강왕비는 사람을 불러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세자비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강왕비가 세자비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시녀들이 복도에 앉아 있었는데 노는 사람도 있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자비는 창문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강왕비는 기세등등하게 뛰어 들어가서 세자비를 보자마자 화를 냈다. 

    “이 천한 년을 당장 끌고 나와 쳐라!”

    세자비가 분부한 것도 아닌데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시녀가 하고 있던 일을 내려놓고 몰려와서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왕비마마, 고정하십시오!”

    “뭣들 하는 짓이냐? 손 치워라!”

    강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은 전부 새로 온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강왕비가 따로 가르친 것도 없으니 어디 세자비 쪽 사람들처럼 서로 마음이 맞을 수가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왕비의 시녀들은 모두 가로막혔다. 

    강왕비는 잔뜩 성이 나서 불같이 화를 냈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왕비를 가로막는 게야? 이 왕부의 주인마님인 내가 이 천한 계집 하나 단속할 수 없단 말이냐?”

    세자비가 책을 내려놓고 천천히 마중을 나오며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머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지금 나한테 감히 묻는 게냐?”

    강왕비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녀자의 도리도 지킬 줄 모르는 이 천한 계집아, 너를 때려죽이지 않으면 어디 강왕부의 체면이 서겠느냐?”

    ‘그리 오랫동안 줄곧 저것한테 욕을 먹기만 했는데, 이제야 마침내 내가 법도를 내세워 저 년에게 욕을 할 수 있겠구나. 어찌나 통쾌한지!’

    강왕비는 아주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세자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머님,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곤란합니다. 소문이 나면 우리 왕부의 망신입니다.”

    강왕비는 세자비가 이렇게 뻔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자신에게 저런 말투로 말을 하다니. 강왕비는 순식간에 화가 더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오씨, 이 천한 것이! 바람을 피워놓고 아직도 이 자리에 서 있을 면목이 있느냐. 내가 너였으면 벌써 목매달아 죽었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 무슨 마가 꼈길래 저런 염치도 없는 천한 계집이 며느리로 들어왔을꼬!”

    세자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어엿한 왕비이신데 말끝마다 천한 계집이라 하시다니 정말 체통을 잃으셨군요. 그런 말은 그만하십시오. 세자 전하께서 들으시면 또 화내실 겁니다.”

    강왕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아직도 감히 나를 훈계하는 게냐? 하, 오히려 나야말로 담이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내가 욕하는 것이 듣기 싫은지 아니면 네가 간통한 것이 잘못된 건지!”

    강왕비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너희들은 우두커니 뭘 하는 게냐? 나는 왕비이고 저 년은 곧 쫓겨날 세자비일 뿐이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느냐?”

    그리고 다시 밀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크게 일갈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해라!”

    강왕세자가 입구에 선 채 어두운 얼굴로 이 난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강왕비는 아들이 온 것을 보고 비빌 언덕이라도 생긴 것처럼 과시하듯 소리쳤다. 

    “담아, 서두를 것 없다. 이 어미가 화풀이해주마. 내가 때려죽여야지 이 바람이나 피우는……!”

    강왕비의 입에서 나오려던 ‘천 것’이라는 두 글자는 강왕세자의 호통에 나오지도 못했다. 

    “입 다무세요!”

    강왕비는 어리둥절했다. 강왕비는 아들이 그녀를 지나쳐 오씨 앞으로 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먼저 세자비가 다쳤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강왕비에게 돌아와 말했다. 

    “어머니, 헛소리 그만하십쇼. 사람들이 듣고 일부러 헛소문을 퍼트려 왕부의 명성을 훼손하면 어찌 가세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담아…….”

    강왕비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저 오씨를 욕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욕하는 게야? 이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강왕세자는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모두 잘 들어라. 그날 어떤 사람이 현주를 납치하여 세자비가 사람을 구하러 가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앞으로 무슨 외도니 바람이니 하는 말이 본 세자의 귀에 한 글자라도 들리면 전부 때려죽이겠다!”

    “네, 전하!”

    저택에 가득 찬 노복들이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됐다, 다들 물러가라.”

    그는 강왕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곁에 있는 나이 든 시녀에게 말했다. 

    “왕비마마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모셔가서 잘 보살펴 드리거라. 너희가 제대로 못 모시면 다른 사람으로 바꿀 것이다!”

    시녀들이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시녀들은 서둘러 강왕비를 이끌고 물러갔다.

    강왕비는 이를 뿌리치려고 하며 아들을 불렀다. 

    “담아!” 

    애석하게도 강왕세자는 강왕비를 철저히 무시했다. 강왕비는 그렇게 끌려갔다. 

    * * *

    강왕세자가 방에 들어가니 세자비는 평소와 같이 강왕세자에게 차를 따라주고 수건을 건네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녀의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을 본 강왕세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신, 설마 이 일이 이렇게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세자비가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부군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군요. 당신은 그저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뿐이지 않습니까. 신첩도 알고 있습니다. 이 목숨은 빌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거두어 가십시오.”

    강왕세자는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잊기 힘들 만큼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강왕세자는 결국 무겁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알고 있으면 됐소!”

    그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본 세자비의 웃음이 천천히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구나.’

    * * *

    소식지를 뜯어본 지온은 읽으면 읽을수록 놀랐다.

    루안은 그녀가 이상한 표정으로 가끔 자신을 흘끗거리기까지 하자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거요?”

    “당신이 직접 봐요.”

    그녀가 소식지를 던졌다.

    루안이 빠르게 훑어보더니 가볍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사람을 안배해서 소현주를 구할 필요는 없겠군. 오히려 시간을 절약한 셈이 됐소.”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강왕세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 사람은 무슨 상대가 바람을 피우면 더 불타오르는 성향이라도 있는 걸까요? 예전에는 세자비와 미적지근했는데, 지금 이런 일이 생기고 오히려…….”

    지온은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루안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소? 옛날에 세자비는 자기 본분에만 충실해서 마치 맹물 같았지. 그녀는 떠날 수도 없는 사람이니 무슨 매력이 있었겠소. 하지만 지금은 과거를 떠올릴 때 짜증이야 나겠지만 훨씬 짜릿하지 않겠소. 이 세상에는 과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오. 잘 생각해보면 강왕세자가 한 번 갔다 온 여자랑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 당신은 그가 남의 집 부인에게 반한 거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지온이 그의 비유에 웃었다.

    “그게 뭐예요! 바람난 부인한테 스스로 장가든 거란 말이에요?”

    루안도 웃었다.

    “아무튼 이 세자비는 정말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살길을 찾아내다니 말이오.”

    “그러게요, 정말 우리의 수고를 덜어주었어요.”

    지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 말했다. 

    “근데 좀 무섭네요.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여자랑 앞으로도 왕래해야 하잖아요.”

    루안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소! 그녀가 강세안을 상대하는 걸 보시오. 독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도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지. 솔직히 말하면 강왕세자보다 훨씬 낫소.”

    지온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얘기하면 내가 못 참고 사람을 보내 암살할 것 같아요.”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만 해요. 시간이 늦었으니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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