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2)화 (332/385)
  • 332화. 나의 꿈

    루안이 손을 합장하며 인사했다. 

    “세자 전하, 따로 더 볼 일이 없으시면 하관은 먼저 일을 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강왕세자는 오늘은 루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강왕세자는 나중에 반드시 이 일을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그가 정사당에서 나가는 것을 본 루안은 뒤돌아 문서들을 안아 들고는 원창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원 재상, 하관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원창은 대답 없이 그를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자네 이렇게까지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군! 강왕부와 공개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셈이지 않나.”

    그러며 원창은 속으로 생각했다.

    ‘강왕부의 세력이 저리 대단한데, 이렇게 정면으로 맞붙으면 이길 수 있을까?’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원 재상께서 오늘 제 편의를 봐주셨는데 강왕부의 보복이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원창이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했다. 

    “본 재상이 법률에 근거하여 사건을 처리했는데, 무슨 구실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루안은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결국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하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가 떠난 후 원창은 잠시 앉아서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흙탕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어쩔 수가 없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문서 인장을 정리하고 퇴근했다.

    * * *

    소달의 사건은 아주 빨리 종결되었다.

    그의 일생은 독주 한잔으로 끝났다. 

    형을 집행하는 날 루안은 소달을 배웅하러 갔다. 

    루안이 말했다. 

    “폐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군신지간의 정을 생각해 자네의 체면만은 세워 주셨네.”

    소달이 그 독주를 보며 웃었다.

    “체면을 세워 주는 게 아니라 시간을 지체하면 변고가 생길까 두려운 게 아닌가? 참형이라면 가을을 보내고 반년이나 더 기다려야 하니 변수가 너무 클 테지.”

    루안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이 독주는 루안이 개인적으로 내리는 형벌이었다.

    성지에는 즉시 참수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작은 술수 정도는 다들 눈감아 주었다. 

    소달은 독주를 들어 올리며 약간 손을 떨었다.

    소달이 물었다. 

    “자네가 나한테 약속했던 건 지켜주는 거겠지?”

    루안이 말했다. 

    “죄가 가족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을 걸세.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네.”

    소달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번에 쭉 독주를 들이켰다. 

    독이 퍼지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아서, 루안은 그와 잡담을 나누었다.

    “내가 젊었을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네. 한 열 살까지는 한 끼를 먹으면 한 끼는 굶으면서 살았지.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서 경성으로 도망쳐 온 거라네. 처음에는 부두에서 막노동으로 시작했는데 물건을 하나 옮겨주고 한 푼씩 받아 겨우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부두에는 늘 그 동네 건달들이 상주해서 싸우는 일도 다반사였다네. 허허! 근데 내가 싸움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그런가 점점 형제들이 생겼지.”

    소달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얘기를 이어나갔다. 

    “17살에 장가도 못 들고 몇 명의 형제들과 이를 악물고 군대에 들어갔다네. 처음에는 정말 괴로웠지. 자네 같은 공자님은 상상하지도 못할 고생일 걸세. 하지만 운 좋게 공을 세우면 상으로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우리는 사력을 다해 공을 다투게 됐지. 싸움이 잦아질수록 우리 형제들은 하나둘 사라져갔네…….

    나중에 장가를 갔는데 그 여편네가 알다시피, 상인 집안에서 기녀처럼 키워진 여자였지. 얼굴도 예쁘고 거문고도 연주하고 춤추고 시중들 줄도 알지만, 식견은 없었다네. 그때 난 몰랐지. 그냥 누가 혼사를 제의하니까 기뻐서 장가를 갔네. 나중에야 그 여인이 나한테 일편단심이라는 것을 알았지. 아내는 나를 위해 아들을 낳아주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그렇게 그럭저럭 살았네.”

    소달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던지……. 그때 나는 절대로 아이가 그런 고생을 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네. 그러고 나서 나는 부귀를 쫓아 강왕부에 들어가게 됐지. 십여 년 동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네. 아무도 나한테 그런 도리를 가르쳐 준 적이 없고 글자도 장군이 되고 나서야 배우기 시작했거든. 이제 곧 난 죽을 텐데 하나뿐인 아들이 아직도 멍청하기 짝이 없네. 내가 쌓은 음덕이 없어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은 각자의 운명이 있고, 시시비비가 있으면 그에 따른 인과도 있게 마련이지.”

    소달이 웃었다.

    “이보게, 난 그런 고상한 말은 할 줄 모르네.”

    복부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고 소달의 이마에는 점점 식은땀이 솟아올랐지만, 소달은 여전히 말하려고 했다.

    “자네 강왕부를 무너뜨리려는 건가?”

    루안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달이 계속하여 물었다. 

    “왜? 폐하께서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건, 세자도 줄 수 있을 텐데!”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은 줄 수 없네.”

    소달이 루안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상대의 생각을 조금 알 것 같기도 또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선대 황제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선대 태자를 위해서인가?”

    “무애해각을 위해서네.”

    루안이 말했다. 

    “승진하고 부자가 되어 처자를 부양하는 것이 자네의 꿈이었듯이, 무애해각이 바로 내 꿈일세.”

    소달은 천천히 웃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잘 됐구먼!” 

    소달이 말했다.

    “앞으로…….”

    소달은 다음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며 그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옥졸이 다가가 콧바람과 심장박동을 확인해 보더니, 보고했다.

    “범인이 죽었습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범관의 가족에게 시신을 거두어 가라고 해라.”

    “예.”

    루안은 감옥에서 나왔다.

    따뜻한 빛이 태양으로부터 한창 내리쬐고 있었다.

    루안은 소매를 정리하고 손을 내밀어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손은 마치 지금껏 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는 것처럼 여전히 그렇게 희고 깨끗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루안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 * * 

    청명절에 지온은 조방궁으로 돌아갔다.

    영령당 안에서 그녀는 천천히 종이를 태웠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신 분이니 피를 보고 사람을 죽이는 일들은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제 성격이 너무 강직해서 쉽게 부러질까 봐 걱정하셨지요. 저는 늘 굽히지 않고 정의로 원한을 갚는 것이 세상의 정의라고 생각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할아버지의 길을 걸으셨으니 저도 저만의 길을 걸을게요. 그리고 이 빚들은 꼭 하나씩 갚아 나갈 거예요!”

    다음은 선대 태자를 위한 기도였다. 

    “전하가 등극했다면, 분명히 좋은 황제가 되셨을 거예요.”

    지온이 한숨을 쉬었다. 

    “전하를 직접 죽인 사람은 벌써 죽었어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지온이 나오자 청옥과 함옥이 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오송원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온이 이들을 보고 웃었다. 

    “여기 서서 뭐 해요? 도관에 다른 일 없어요?”

    청옥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사저의 일보다 중요한 다른 일은 없습니다.”

    이번 청명절은 능양진인이 떠난 뒤, 청옥이 조방궁을 인수하고 첫 번째로 맞는 청명절이었다. 

    젊은 주지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올해는 법사(*法事: 불가에서 행하는 행사)를 예약한 사람이 드물었다. 

    청옥은 이를 별로 개의치 않아 했는데, 그녀는 어떻게든 되는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성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청옥은 자신이 잘만 하면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온은 사방전으로 갔다. 요즘은 함옥이 점을 쳤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지온이 몇 마디 칭찬을 건네자 함옥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사저의 선례를 따른 것일 뿐인데요.”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해요.”

    지온은 법사가 끝나기도 전에 조방궁을 나섰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댔다.

    “저건 누구야? 조방궁의 도사(真人)들이 직접 배웅을 다 하고?”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직 못 들어봤어? 저분이 바로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야. 현재 주지의 대사저지! 저분이 화신의 제자라더군. 사방전의 그 화신첨을 바로 저분이 만들었대.”

    “어째서 아직도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야? 이미 루씨 집안의 부인이 됐어.”

    “그러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어.”

    “루씨 가문의 부인이라고? 그럼 남편이…….”

    “맞아, 아니면 누구겠어?” 

    루안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마중을 갔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농담을 하다가 마차에 올랐다.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함께 있다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거야?”

    누군가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루 낭중(郎中) 아닌가? 지온 소저는 왜 저런 사람한테 시집을 갔지?”

    옆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루 낭중?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가? 저분은 이제 통정이 되셨네. 그리고 저런 사람이라니 무슨 말이 그런가? 루 통정께서는 소달을 쓰러트리느라 강왕부의 미움까지 샀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 백성들을 위해 나쁜 놈을 없애주셨으니 정말 의인이 아니겠나! 또, 지온 소저가 아니라 지 부인일세!”

    좀 전의 그 사람이 헉 하며 놀랐다.

    “내가 경성을 떠나고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어쩜 이렇게 많이 변했지?”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했네! 처음에는 사람들이 루 통정이 재물을 탐하고 권세를 부린다고 수군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분이 무슨 재물을 탐냈나? 관청에서 출장 나온 사람 중에 찻값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애초에 저분한테 돈을 찔러줄 정도의 인간이면 저분이 꼭 탐관오리여서가 아니라 그래도 쌀만큼 나쁜 짓을 한 놈들이라 그러는 거겠지. 저분이 우리 백성들한테 손을 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그 사람은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사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권력을 휘두르며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 저분의 본업이지 않나? 이번에 소달이 실각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 하루 정도 걸렸는데, 관련 문서들을 합치면 석 자 두께나 된다고 하더군. 이게 다 평소에 해 놓은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아니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루 통정이 이날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르는 것일 뿐이지.”

    이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끔 했다. 루 통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까지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감동하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道)가 있는 곳이라면 천만 명을 마주할지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리니!”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대입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가슴이 울렁거리고 감동이 밀려왔다. 

    누군가 감격에 겨워 불쑥 한마디 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루 통정께서 강왕부의 미움을 샀군요! 그럼 혹시……?”

    사람들이 절로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소달은 뿌린 대로 거둔 것이야. 강왕부가 이 일 때문에 루 통정을 적대시한다면 그건 억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강왕부가 언제 도리를 알기나 하는 곳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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