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1)화 (331/385)
  • 331화. 한발 늦었다

    * * *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왕세자는 하녀를 몸으로 내리깔고 있다가 소리를 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꺼져라!”

    잠시 조용해졌다 측근 참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 전하, 주씨가 돌아왔습니다. 불탑에서 뭔가를 발견했답니다.”

    강왕세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침내 참아내며 하녀를 밀쳤다.

    “나가!”

    하녀는 아픔을 호소할 새도 없이 급히 허리띠를 매고 나갔다. 

    참모들은 강왕세자의 성질을 알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한 명의 참모만 밀정 주씨와 함께 세자의 방에 들어갔다.

    “세자 전하.”

    강왕세자는 옷을 반은 걸치고 반은 벗은 채로 차를 마시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라!”

    그러며 강왕세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가 화가 난 걸 모르는 건가? 이리 몰려와서 짜증 나게 하다니.’

    주씨가 말했다.

    “세자 전하, 제가 광명사에 다녀왔습니다.”

    강왕세자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눈치도 없이 남의 아픈 곳을 찌르더니! 이제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러 온 건가.’

    주씨는 눈을 딱 감고 계속 말했다.

    “제가 불탑을 위아래로 샅샅이 뒤져 보다가 2층에 피가 한 방울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강왕세자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뜻이냐?”

    “그 핏자국은 새것이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전하께서 사람을 데리고 불탑에 뛰어 들어갔을 때 누군가가 위층에 숨어 있었던 겁니다.”

    강왕세자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우리가 계략에 걸려들었습니다.”

    주씨가 말했다.

    “소 장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자비와 만난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누군가 소 장군을 불탑으로 유인해 금비녀로 똑같은 상처를 만든 뒤에 강세안을 위층에 숨긴 것입니다. 우리가 불탑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그들은 태연히 떠났을 겁니다.”

    강왕세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렇게 강세안을 데려갈 수 있을 정도의 상대라면 증거를 날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강왕세자는 이마를 짚고 생각해보다 잠시 후 말했다.

    “내일 소달을 빼내 오자.”

    측근 참모가 말했다.

    “세자 전하, 그냥 오늘 가시지요. 시간을 오래 지체하면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강왕세자는 잠시 생각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세자는 마음이 불편했다.

    소달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오씨 그 천한 계집이 진짜로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화풀이 상대를 잘못 찾았던 것이다. 

    “그 강세안의 이력은 알아봤나?”

    주씨가 대답했다.

    “부하들더러 며칠 내로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과 신분을 알고 있으니 조사하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라.”

    “예.”

    강왕세자는 잠시 홀로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분노를 풀 길이 없었다.

    방금 하녀와의 잠자리도 도중에 중단되어 다시 색욕을 풀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후원으로 갔다.

    잠시 후에 그는 한쪽 벽 옆에서 멈춰 섰다.

    안에서 소현주가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그는 딸을 너무 아낀 나머지 아이가 조금만 눈살을 찌푸려도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에서 혐오감만 일었다.

    ‘오씨는 남자와 만나는데 왜 딸을 데리고 간 거지? 그 강세안이란 자가 왜 윤이를 보러온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강왕세자는 옛일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윤이가 태어났을 때, 그는 결혼한 지 10개월이 채 되지 않았었다. 산파는 아이가 태어날 때 열흘에서 보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윤이는 아주 건강해서 태어나자마자 새까만 눈을 또렷하게 떴다. 

    모친은 아이를 보더니, 생각 없이 배 속에서 보름은 더 있다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에 강왕세자는 제 모친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싫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인 당일 밤도 오씨가 수줍어해서 방안에 용봉초 한 쌍만 켜두었었기 때문에 어두컴컴하여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부왕은 제 아들인 강왕세자를 아주 귀하게 여겨 소년 시절에 강왕세자를 엄하게 단속했다. 그래서 결혼 직전이 되어서야 그에게 방사를 가르쳤다. 그때는 강왕세자도 아직 뭘 몰랐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 세자비의 맥을 짚었던 태의도 가문에서 자주 부르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강왕세자는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빈틈이 너무도 많았다.

    ‘만약 윤이가 정말 내 딸이 아니라면…….’

    강왕세자는 차갑게 웃으며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 * *

    날이 채 어두워지기도 전에 소달의 자백서가 어안(*御案: 황제의 책상)에 올라왔다.

    황제가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그는 이런 사건은 정리하는데 적어도 한 달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루안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폐하께서 소달에게 불만이 많으신 것을 보고 신이 일찌감치 증거를 수집해두었습니다.”

    황제의 얼굴에 칭찬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선대 황제께서 일찍이 짐에게 하신 말씀이 있네, 신하가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면 합격이라 할 만하고, 일하는데 빈틈이 없다면 유능한 신하이니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 하셨지. 만약 시야가 넓고 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신하이니 나라를 맡기기에 충분하다 하셨네. 루 통정, 짐이 자네를 잘못 보지는 않았군.”

    하지만 선대 황제가 그에게 했던 말 중 그가 까맣게 잊어버린 한 마디가 더 있었다. 

    ‘만일 신하의 모든 것이 네 마음에 들어 전혀 잘못을 찾아낼 수 없다면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대부분은 교묘한 말로 아첨하는 간신이다.’

    황제는 문서를 넘기면 넘길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달 이 자가 이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다니!”

    루안이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이제 더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겁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증거가 명확하니 판결하도록 하지! 자네 생각에는 어떻게 판결하는 게 좋겠나?”

    루안이 미리 생각해둔 복안을 황제에게 읊어 주었다.

    황제는 루안의 말대로 써서 인장을 찍은 후 그에게 건네주었다.

    루안은 그 두꺼운 문서를 받아 들고 보고했다.

    “일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되니 신이 바로 정사당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가보게.”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강왕세자는 황제가 루안을 주심(*主审: 재판장)으로 임명하였다는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왕세자는 즉시 옷을 갈아입고 궁으로 갔다.

    궁문이 닫히기 전에 강왕세자는 가까스로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황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폐하. 소달의 그 사건, 혹시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천천히 조사해주십시오.”

    황제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형님,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소달의 사건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자기가 죄를 다 인정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왕세자는 깜짝 놀랐다.

    황제가 말했다.

    “그가 자백서를 썼습니다! 짐이 벌써 결재해서 정사당에 넘겼지요.”

    강왕세자의 머릿속이 위잉 거렸다.

    ‘이제 겨우 하루, 아니,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이렇게 큰 사건이 끝나다니? 대체 누구 짓이란 말인가? 정말 빈틈없는 계획이구나!’

    그는 뒤돌아 정사당을 향해 달려갔다. 

    정사당에서 도장을 찍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 했다.

    황제는 그가 물러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벼루를 집어던졌다.

    ‘개새끼! 아직도 날 황제로 생각하지 않는 게로군?!’

    * * *

    강왕세자는 정양문(正阳门)을 나와 곧장 정사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관아가 가까워 도착했을 때 정사당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상태였다.

    “상(常) 수상!”

    그는 소리를 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당직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에는 상용(常庸)이 아니라 원창이 있었다.

    원 재상이 루안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강왕세자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세자, 상 수상을 찾으십니까? 수상께서는 시찰을 하러 가셔서 오늘은 하관이 당직을 맡았습니다.”

    강왕세자는 그와 이야기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서 루안의 손에 있는 성지가 눈에 띄자 바로 빼앗아 갔다.

    강왕세자는 위에 쓰인 판결문과 그 밑에 찍힌 새빨간 인장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손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떨려본 적이 없었다. 강왕세자의 눈 또한 분노로 점점 붉게 물들었다.

    ‘한발 늦었어, 이미 재상의 관인이 떨어졌구나, 판결에 효력이 발생했어!’

    강왕세자는 눈앞에 있는 루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구나! 너였구나!”

    강왕세자를 음해한 사람은 바로 루안이었다.

    루안이 웃었다. 

    “세자 전하, 왜 그러십니까? 이리 손을 떠시다니 혹시 무슨 병이라도 나신 겁니까? 그럼 밖에서 찬 바람을 쐬지 마시고 어서 왕부로 돌아가 태의의 진료를 받으십시오.”

    강왕세자는 손을 뻗어 루안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원창이 황급히 소리쳤다.

    “세자! 세자 전하, 그 손 치우십시오! 여기는 정사당입니다!”

    하급 관리가 소리를 듣고 급히 와서 가로막으며 계속 소리쳤다. 

    “세자 전하, 고정하십시오.”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강왕세자를 멈추게 했다.

    그는 정사당에서 주먹다짐을 하다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트집이라도 잡히면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그 일이 불가능하게 될까 봐 애써 자제했다. 

    하지만 루안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고 그로 인해 공연히 자신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 잘려 나갔다는 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강왕세자는 팔을 휘두르며 낮은 소리로 일갈했다.

    “이 손 놓아라!”

    그가 이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관리들은 머뭇거리다가 그를 놓아주었다.

    강왕세자는 옷섶을 정리한 뒤 머리를 쳐들고 여느 때처럼 거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네, 이건 본 세자에게 선전포고를 한 거라고 봐도 되겠지?”

    그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안이 한숨을 쉬었다.

    “하관은 세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강왕세자는 비웃으며 책상 위의 문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증거를 이렇게나 많이 수집해둔 걸 보니,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린 것 같은데?”

    루안은 여전히 차분하게 응대했다. 

    “세자 전하께서 혹시 잊으셨는지요. 하관은 형부의 낭중(郎中)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저 맡은 일을 충실히 했을 뿐입니다.”

    “맡은 일 좋아하시네.”

    강왕세자가 또다시 냉소했다. 

    “그래서 자네가 다른 사람은 조사하지 않고 하필 소달만을 조사했다?”

    “세자 전하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하관은 조사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어쨌든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그 사람 하나만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이론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강왕세자는 늘 그의 말속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강왕세자는 속으로 조금 긴장하며 강왕부 문하의 많은 관원을 떠올렸다. 

    ‘루안이 설마 다른 사람도 조사하고 있다는 말인가? 다음은 또 누구 차례지?’

    이 잠깐의 침묵으로 인해 좀 전의 흉흉한 기세는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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