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23)화 (323/385)
  • 323화. 나와 함께 가자

    세자비는 객원에서 나와 시녀 한 명만 데리고 천왕전 쪽으로 걸어갔다.

    천왕전에 도착했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시녀가 약간 불안해하며 말했다.

    “세자비마마, 사람을 불러와서 찾아볼까요?”

    세자비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불탑 쪽으로 걸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스님들은 모두 아침 수업을 하고 있었고 불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이 없어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 * *

    강세안이 문을 열었지만, 소현주는 꼼짝하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는 말하면서 등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자 불탑 안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소현주가 망설이며 걸어 들어갔다.

    “강 아저씨, 날 왜 여기로 데리고 왔어?”

    강세안이 뒤를 돌며 아이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며칠 전에 해줬던 이야기, 마음에 듭니까?”

    소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세안은 매일 소현주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가장 많이 해준 이야기는 강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었다. 

    무슨 무림대회라던가, 무예를 겨뤄 데릴사위로 삼는다든가, 길을 가다 무슨 불공평한 일을 당한다던가……. 순진한 소현주의 귀에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강세안이 아이를 주시했다.

    “그럼, 직접 보러 갈래요?”

    소현주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강, 강씨 아저씨…….”

    강세안은 제사상 아래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그 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손을 뻗어 풀자 두껍게 층층이 쌓인 은표 묶음이 쏟아졌다. 

    “이것 좀 보세요. 사실 이 아저씨는 돈이 많아요. 이 정도 은냥이면 현주가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요. 아저씨와 함께 가면 절대로 현주를 고생시키지 않을 거예요.”

    소현주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쭈뼛쭈뼛 말했다.

    “아, 안 돼! 강 아저씨, 난 부모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

    강세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넌 더욱 나를 따라와야지.”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제 얼굴을 더듬더니 뭔가를 한 장 벗겨냈다.

    “악!”

    소현주가 소리를 지른 뒤 두려워하며 뒤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 사람의 피부로 된 가면?”

    아이는 요 며칠 그가 해줬던 이야기에서 인피 가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

    강세안은 흐트러진 머리를 털어내고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드러난 얼굴은 강건하고 훤칠하여 전보다 보기 좋았다. 

    “윤아, 너의 어머니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단다.”

    그는 천천히 소현주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큰 몸집 때문에 소현주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이는 벽에 달라붙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뒤로 물러났다. 

    “당, 당신…….”

    아이는 강세안이 칼을 꺼낼까 봐 강세안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세안이 움직였지만, 그가 꺼낸 것은 칼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강세안은 쪼그리고 앉아 소현주를 향해 거울을 비추고 자기 얼굴을 드러냈다.

    “윤아, 자세히 보거라. 네 얼굴이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소현주는 거울 속의 얼굴을 슬쩍 보고 가까이에 있는 강세안을 또 한 번 보더니 깜짝 놀라 넋이 나갔다.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높고 곧은 코가 자기 부모와 닮은 것이 아니라 이 강세안과 닮아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봤니?”

    강세안이 말했다. 

    “윤아, 너의 아버지는 요담(姚谈)이 아니라 바로 나란다.”

    * * *

    강왕세자는 광명사에 도착해 곧장 오 부인이 있는 객원으로 갔다.

    오 부인이 놀란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사위를 보며 말했다.

    “세자? 세자도 윤이를 데리러 왔습니까?”

    강왕세자가 음험한 표정으로 차갑게 물었다. 

    “세자비는 어디 있습니까?”

    “윤이를 찾으러 갔는데, 무슨 일이에요?”

    오 부인은 딸과 사위의 사이가 틀어진 줄 알고 몇 마디 타이르려다가 강왕세자에 의해 확 밀쳐졌다.

    강왕세자는 시녀를 붙잡아 세자비의 행방을 묻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오 부인은 영문을 몰랐지만, 왠지 간담이 서늘해져 급히 따라 나갔다.

    “세자!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로 하세요!”

    * * *

    강왕세자는 천왕전에 도착했지만, 세자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 있는 스님을 붙잡고 물어보았는데 애석하게도 그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올라 큰 소리로 호령했다.

    “찾아라! 땅을 석 자를 파내서라도 세자비와 현주를 찾아내!”

    바로 이때, 걱정이 태산 같은 소달이 광명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린 스님 하나가 그에게 정면으로 부딪치고는 사과도 없이 달아났다.

    소달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동자승을 잡으러 가지는 못하고 화를 내며 욕설을 몇 마디 퍼부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둥글게 말린 쪽지 하나가 자신의 몸에서 굴러떨어졌다.

    쪽지를 주워보니, 거기에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불탑.’

    * * *

    세자비가 불탑에 도착했을 때 딸의 가늘게 우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강세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도 네가 많이 놀랐을 거라는 건 알지만 사실은 사실이란다. 슬퍼하지 말거라. 이 아버지가 요담보다 더 너를 아끼고 사랑해 줄 거야. 너를 데리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천하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보여주마. 경성의 이런 난잡한 일들은 우리 신경 쓰지 말자꾸나. 네가 크면 어떤 멋진 낭군을 원하든지 아버지가 다 찾아줄게. 네 말을 듣지 않으면 아버지가 그놈의 다리를 부러뜨려 줄 거야…….”

    세자비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불탑으로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세안!”

    그녀를 본 소현주가 와앙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세자비를 안았다.

    “어머니! 어머니!”

    세자비는 딸을 끌어안고 분노를 담은 눈길로 강세안을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이 일을 아이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 당신과 함께 있게 해준 거예요. 그런데 지금 윤이를 데리고 가겠다고요? 당신은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군요!”

    강세안은 몸을 곧게 펴고 냉담하게 세자비를 바라보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이미 부귀영화에 사로잡혀 강왕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소? 하지만 윤이는 다르지, 이 아이는 내 딸이오. 나와 함께 불변의 진리를 찾아 떠날 거요.”

    세자비가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이랑 떠난다고요? 당신이 아이한테 어떤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는데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객지에서 고생이나 하는 거요? 난 천신만고 끝에 윤이를 낳아서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걱정하며 키웠어요. 그게 당신이랑 그런 삶이나 살게 하려고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건 왕부의 가장 천한 시녀만도 못한 삶이에요!”

    강세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역시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군. 내가 당신한테 같이 멀리 도망가자고 했을 때 당신은 부모님까지 연루되게 할 수 없다고 했었지, 나는 그런 당신을 믿었소. 하지만 결국 당신은 그저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나랑 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오.”

    “당신…….”

    세자비는 그를 자극할까 봐 바로 목소리를 풀고 애달프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었겠어요? 천하에 황제의 땅이 아닌 곳이 없는데 강왕부가 암위를 보내면 우리가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겠어요. 그래요, 나는 고생하는 게 두려웠어요. 당신은 어째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가요? 어릴 때부터 저택 안마당에만 있었던 내가 바깥세상을 본 적이나 있었겠어요? 무서운 것이 당연하지 않아요? 더구나 부인이라고 주장한들, 결국은 당신의 첩이 될 텐데요. 내가 당신을 따라가면 본처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잖아요.”

    강세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두려웠으면 그걸로 그만이지, 뒤에 한 말은 또 뭐요? 당신을 데려가면 내 미래도 포기하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어째서 당신을 첩으로 삼는단 말이오?”

    세자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에야 그 얘기를 하기엔 너무 늦었어요. 당신더러 날 생각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어찌 되었든 윤이를 위해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왕부에서 귀하게 자란 아이가 바깥 생활에 어떻게 적응하라는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시집도 보내야 하잖아요? 설마 정처 없이 떠도는 강호인에게 시집보내서 나중에 온 식구를 이끌고 떠돌아다니게 만들려고요?”

    강세안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왜 윤이가 나를 따라가면 꼭 고생할 거라고만 생각하오? 당신이 강왕부에 시집가던 그때 나는 남쪽에 있는 군대에 들어갔소. 꼬박 6년 동안 사병에서 교위까지 올라갔지. 상봉(*上峰: 고위 관직명)자리만 나면 거절될 이유도 없었소. 

    나는 목숨을 바쳐서 얻은 돈을 전부 모았소. 이 정도 돈이면 윤이가 편안하게 사는 데는 충분하오.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객지에서 노숙할 필요도 없고, 그저 천하를 유랑하며 산천을 구경하는 것인데 뭐가 나쁘단 말이오?”

    “이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세자비가 소리쳤다.

    “밖에 나가서 좀 봐요, 공명도 권세도 없는데 누가 당신을 존경하겠어요? 하찮은 현령(县令)이라도 그가 당신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당신은 무릎을 꿇어야 해요! 난 윤이에게 높은 신분을 주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뭐 잘못됐어요? 당신을 따라가면 아이는 앞으로 평민이 돼요. 아이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권세가한테 혹사당할 거라고요!”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강세안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꼭 윤이를 데리고 가야겠다고 한다면?”

    소현주는 이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며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세자비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윤이의 의견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아이한테 잘해주고 싶다면서 강요해서야 되겠어요?”

    강세안이 시선을 내리고 소현주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아, 겁낼 것 없어. 넌 바깥 생활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르지, 아버지를 따라가면 곧 알게 될 거야.”

    소현주가 세자비 뒤로 숨었다.

    강세안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자 두 모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들은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만약 소리를 질러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모두 끝장이었다.

    세자비는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세안,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우리 모녀가 살길을 좀 열어줘요. 난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당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얼마나 힘들게 숨기고 윤이를 낳았는지 몰라요. 내가 그간 겪은 고생을 당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거예요. 우리 모녀는 이제야 어렵게 안정을 누리며 살고 있어요. 제발 우리를 방해하지 말아요, 네? 애초에 당신한테 잘못한 건 저예요. 윤이는 놔줘요!”

    강세안은 그녀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해봤을 거라고 생각하오? 내가 막 경성에 돌아왔을 때 당신들 모녀를 발견했지. 처음에는 그저 윤이를 만나서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오. 당신들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 그런데…….”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예요?”

    세자비가 물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 일이 알려지면 윤이가 죽는다고!”

    “왜냐하면, 당신이 아이를 너무 말도 안 되게 가르쳤기 때문이오!”

    강세안이 차갑게 말했다. 

    “아이가 겨우 열 살인데 난폭한 행동이 버릇이 되어 화가 나면 사람을 때리고 시녀를 때려죽인 적도 있지 않소. 하지만 당신과 요담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 아이가 또 당신들을 따라가면 어떻게 변할 것 같소? 난 아이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라오!”

    세자비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부귀영화가 뭐가 나쁜가요? 당신이 못 얻으니까 깎아내리는 거 아니에요? 때리는 게 뭐 어때서요? 아이는 신분이 높은 현주에요, 그까짓 시녀 하나 때려죽이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요?”

    이 말을 들은 강세안은 정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게 당신 진짜 속마음이었군? 전에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 건 역시 어린 마음에 뭣 모르고 한 소리였을 뿐이었어!”

    세자비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강세안의 굳은 표정을 보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요?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강세안은 대답하지 않고 소현주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아, 이리 오렴, 아버지와 함께 가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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