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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21)화 (321/385)

321화. 생각이 트인 황제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루안은 자신도 모르게 밖을 내다보았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서 맘이 급한가? 루 통정, 예전이랑 달라졌구먼. 역시 장가를 가니 좋은 게로군?”

루안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정무 처리도 거의 끝나서 황제는 신이 나서 캐물었다.

“자네가 전에는 지온 소저를 싫어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짐이 비록 몇 번밖에 못 봤지만, 성격도 좋아 보이고 용모도 아름답더군. 가세가 너무 기울지만 않았으면 고모께서는 아마 더 좋은 집에 시집보내려고 하셨을 거네.”

루안은 집안일에 관해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이렇게 캐묻자 억지로 대답했다.

“그럭저럭 잘 맞는 편입니다.”

황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자네 입에서 잘 맞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면 정말 잘 맞는가 보군. 역시 짐이 중매를 잘못 서지는 않았어.”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황제가 손을 흔들었다.

“됐네, 자네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딴 데 가 있구먼. 짐도 더는 붙잡지 않겠네. 신혼인데 떨어져 있기 아쉬운 것이 정상이지. 짐과 옥비의 처음을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말한 황제는 입을 다물고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짐이 오히려 자네를 부러워하고 있군…….”

황제가 슬퍼하니 마땅히 루안이 위로를 해주어야 했지만, 루안은 이미 한참 전부터 여기서 꾸물거리는 것을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그는 황제의 마음을 모르는 척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물러 나왔다.

* * *

그가 간 후 황제는 오랫동안 혼자 앉아있었다. 갑자기 내시가 고하는 소리가 들리고 류 첩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규율을 잘 알고 있는 류명주가 짐이 아직 전조(*前朝: 궁전의 바깥채 거실)에 있는데 어찌 와서 짐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녀가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웃으며 물었다.

“폐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십니까?”

황제는 멍해졌다.

류명주가 책망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요즘 정무가 바쁘시니, 분명 잊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신비 언니의 생일입니다! 장복궁에서 초대가 와서 저도 자매들과 가서 축하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첩이 생각해 보니 신비 언니께서 늘 폐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 언니를 대신해서 감히 폐하를 모시러 온 겁니다.”

황제가 그제야 깨닫고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수고가 많았구나. 짐이 장복궁으로 축하 선물을 보내라고 하마.”

“폐하!”

류명주가 설득하며 말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폐하께서 직접 가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작년 겨울부터 장복궁에 가시는 횟수가 뜸해지셨습니다. 신첩도 폐하께서 신비 언니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좀 불편하신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으니 이제 좀 풀어주셔야지요. 따지고 보면 그 일은 청녕궁에서 내린 명령인데 폐하께서는 태후마마까지 오해하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황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옥비는 자업자득이라 할 만했지만, 황제는 신비가 태후와 결탁해 황자를 이용하여 이런 계략을 꾸민 것만 생각하면 이 여인에 대한 친밀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류명주의 말도 맞았다. 계속 장복궁에 가지 않으면 태후 쪽에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또 고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황후가 들어왔다. 

황후는 류명주가 여기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아무 말 없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말했다. 

“폐하, 오늘은 신비의 생일입니다. 비빈들이 모두 장복궁에 모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종일 고생하셨을 텐데 가서 같이 즐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당신도 그 얘길 하러 왔소?”

“당신도라뇨?”

황후가 류명주를 바라보았다.

“설마 류 첩여가…….”

류명주가 무릎을 굽히고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오실 줄 몰랐습니다. 신첩이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자네가 이리 세심했다니 본궁이 아주 흐뭇하네.”

그녀는 말을 끝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에게 권했다.

“폐하, 기분 나쁜 일을 계속 생각하시면 더 기분이 나빠지는 법입니다. 비록 폐하를 저버린 사람도 있지만, 또 이렇게나 많은 비빈이 폐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위해 슬퍼하십니까?”

황제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래. 옥비는 짐의 마음을 소중히 여길 줄 몰랐지만, 이 후궁에는 내 눈빛 한 번이면 앞뒤를 재지 않고 따를 여인이 많아. 황제로서 그녀들의 환심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알겠소. 호은아, 장복궁으로 가자.”

* * *

루안이 집에 도착하자 벌써 초저녁이었다.

북양은 일 년 내내 전쟁을 해서 일가족이 모두 군영을 시시때때로 오가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 규칙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북양태비는 그저 식사 시간이 되면 늘 먹던 것처럼 식사를 했다. 

지온은 침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지온은 시녀들에게 물과 밥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이쪽은 준비가 다 되었고 저쪽의 루안도 참모들과의 이야기가 끝났다.

지온이 식사하는 루안 앞에 앉아 물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서남쪽에서 상소문이 올라왔는데 전쟁이 날 것 같다고 하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됐소.”

루안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먹었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께서 기다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온 가족이 기다리면서 굶고 있을 필요 없다고요.”

루안이 웃었다.

“난 진작부터 당신이 어머니랑 잘 지낼 줄 알았소.”

“시어머니께서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런 분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내가 복이 많은 거지요.”

지온이 진심으로 말했다. 

루안이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옛날에 할머니께서 살아 계셨을 때 어머니께서도 고생을 많이 하셨소. 할머니는 명문가 출신이셔서 예의와 교양을 아주 중시하셨지. 늘 어머니가 궁에서 온 것 같지 않게 교양이 부족하다고 하시며 사사건건 구속하려 하셨소. 어머니께서는 그때 맹세하셨지. 나중에 본인이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 며느리한테 그런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말이오.”

지온은 이런 일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머님께서 계속 구박당하신 건가요?”

루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나중에 안서(安西)를 칠 때 우리 북로 대군이 착각해서 하마터면 본진을 공격할 뻔한 일이 있었지. 어머니께서는 아이를 안고 전장에 나가 사람들을 이끌고 습격해오는 기병들을 격파하고는 그 길로 부왕의 부대를 쫓아 전선으로 갔다오. 전쟁터에서 큰형을 낳았지. 그 후로 어머니는 부왕과 함께 병사를 다스렸고 할머니도 더는 관여하지 않으셨소.”

‘이건 노태비를 억지로 굴복시킨 거나 다름없잖아!’

지온은 정말 자기 시어머니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루안이 밥을 다 먹고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 옆집에 가서 산책하면서 소화를 좀 시키는 게 어떻소?”

그가 말한 옆집은 대장공주에게 판 집이었는데 집안에 큰 화원이 하나 있었다. 경성에서 이런 집은 아주 비싸서 루안이 팔 때도 대장공주에게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두 집 사이에 문을 달고 매일 산책하면서 드나들고 제집 화원처럼 쓰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지온에게 말할 때도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이제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 돈을 좀 아껴야 하지 않겠소? 어쨌든 대장공주마마께서 혼자 계시니 우리가 자주 가서 적적하지 않게 해드립시다.”

“내가 가져온 혼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당신이 부양할 필요 없어요.”

“그건 안되오. 당신 혼수는 아이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하오. 내 봉록이면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소.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일로 어른들께 선물을 드려야 할 때도 있지 않소. 그러니 모아두었다 나중에 쓰시오.”

지온은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생각해 보다가 또 웃었다.

‘북양 가문의 경성 사업들을 꽉 쥐고 있으면서 돈이 없을 리가 있나? 그저 자기 돈을 모아 서원을 짓고 싶은 거겠지.’

그것은 루안이 할아버지께 한 약속이자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그래서 루안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장공주는 부유한 황실 출신이고 또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옆집은 항상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그래서 초롱조차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정원에서 한참을 돌아다녔다. 지온은 오늘 광명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뒤 끝에 덧붙였다. 

“난 왠지 그 강십(姜十)이란 사람이 운수가 사나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루안이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대장공주가 정면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누가 운수가 사납다는 게야?”

대장공주는 평상복을 입고 머리에 두관도 쓰지 않은 채 식사 후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지온이 인사했다. 

대장공주는 손사래를 치며 정자로 먼저 들어갔다.

“너 요즘 비밀이 많은 것 같구나, 본궁한테 뭘 숨기고 있는 게야?”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에게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아직 애매해서 그래요.”

지온이 주위를 둘러보자 대장공주가 말했다. 

“안심하고 말하렴. 이 집은 내가 다 정리해 두어서 아무도 엿듣지 못할 게다.”

“예.”

지온이 다시 한번 광명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대장공주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이상해졌다.

지온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대장공주가 이마를 때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정말 공교롭기도 하지, 본궁이 강왕부에 심어둔 밀정한테서 오늘 어떤 소식을 좀 전달받았거든.”

지온은 깜짝 놀랐다. 

대장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조여화(曹丽华)가 정말 많이 발전했더구나. 몇 마디 일깨워주었더니 바로 며느리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아차렸어. 하긴, 아들이든 남편이든 총애를 다투는 일은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조여화는 강왕비의 규명(闺名)이었다. 지온은 이 말을 듣고 세자비가 돌아가자마자 시어머니에게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강왕세자가 강왕비를 연금하긴 했지만 강왕비는 분명 그의 친어머니였기 때문에 홀대할 수는 없었다. 

“본궁이 말하지 않았느냐, 요담 그놈은 아무래도 의심이 너무 많다고. 세자비가 그를 도와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의심을 하나 싶더니만 역시 그런 교묘한 계책을 썼던 거였어.”

영원에 남겨진 단서가 이미 강왕세자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상태에서, 지금 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가 어찌 세자비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지온은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강왕세자가 세자비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까지 알게 되면 그냥 홀가분하게 없애버리려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에는 좀 아까운데요!”

지온이 망설이며 손을 쓰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강왕세자비를 없애버리는 것은 강왕부 입장에서 치명상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장공주가 웃음을 거두었다.

“그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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