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진화한 강왕비
한편, 지온은 대부인 쪽으로 돌아가 이 일을 이야기했다.
“소소의 혼사가 결론이 난 것 같아요.”
“그 두 집이 선을 보고 있었던 거구나? 유씨 집안의 대공자가 동의한 게야?”
지온이 말했다.
“방금 대공자가 과자 가게에 가자고 했었거든요. 하인이 가서 말을 전하면 아마 두 어머님께서는 둘이 눈이 맞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유신지 공자는 원래 엄청 영리한 사람이에요. 그가 오해를 살 만한 일을 굳이 한다는 건 그 결과 역시 싫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거지요. 지금 당장은 좋아한다고 까지는 말 할 수 없겠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소소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상대일 거예요.”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의 그 까칠한 성격에 안 싫어하는 것만 해도 쉽지는 않지.”
지온이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누가 아니래요?”
두 사람은 강왕세자비가 강왕부로 돌아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오후 내내 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뒤이어 전해진 소식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멍해졌다.
“소현주가 안 돌아갔다고?”
보고하러 온 여자 호위가 대답했다.
“오 부인께서 간선원(间禅院)을 빌려 며칠 동안 머물면서 예불하시겠다고 하자 강왕세자비께서 소현주를 남겨두고 혼자 돌아가셨습니다.”
지온과 대부인이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 어린 당혹감을 보았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후 지온이 다시 물었다.
“그 남자는? 알아봤어?”
“예.”
여자 호위가 보고했다.
“자칭 강십(姜十)이라고 하는 자로 작년 연말쯤에 광명사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이 재해를 입어 경성에 친척을 찾아왔으나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지 스님께서 그 사람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힘도 센 것을 알아보시고 남아서 막일을 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절에서 서너 달 정도 살았는데 부지런하고 말도 적은 편이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합니다.”
대부인이 물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우리도 며칠 더 있을까?”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무 눈에 띄잖아요. 우선 돌아가요. 사람을 시켜서 감시하면 돼요.”
대부인이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 * *
광명사를 떠나기 전 강왕세자비는 딸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정말 저 안 데리고 가실 거예요?”
소현주가 별로 안 내켜 하는 기색으로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강왕세자비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착한 윤이, 조금만 참거라. 며칠 후에 이 어미가 데리러 올 거야.”
소현주가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잠시 있다가 말했다.
“어머니, 무슨 말 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 왜 그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하세요? 그 사람 정말 이상해요. 인형을 만들어주겠다면서 어떤 모양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더니 자기를 강씨 아저씨라고 불러 달래요. 그 사람이 뭔데요? 숙부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머니는 또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마지막 말을 할 때, 소현주의 눈빛에는 경멸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강왕세자비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는 이 10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까스로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을 상기했다. 마침내 결심한 그녀는 딸의 어깨를 잡으며 자기 눈을 보게 했다.
“윤아, 잘 들어라. 이 어미가 그 사람한테 약점 잡힌 것이 있어. 그것이 누설되면 우리 모녀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단다. 네 동생도 세손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 거야. 그래서 이 어미가 너를 미끼로 삼을 수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네가 말을 잘 들어야 해.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네가 계속 강왕부에서 사랑받는 현주로 살 수가 있단다.”
강왕세자비는 집으로 돌아와 뜻밖에도 강왕세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들어오셨습니까?”
강왕세자가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셨소?”
세자비가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어제 어머니를 모시고 광명사에 가서 예불을 올릴 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강왕세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세자비가 또 말했다.
“윤이가 저번에 놀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무비 스님께서 놀란 기운을 좀 누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기에 윤이한테 어머니를 모시고 광명사에 좀 있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강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명사? 윤이가 그런 데서 어떻게 지낸단 말이오?”
“우리 어머니도 같이 계신 데 불편할 게 뭐 있겠습니까? 아이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우려 하지 마세요. 벌써 열 살이고 삼, 사 년만 더 지나면 선을 볼 나이입니다. 그렇게 응석받이로 자라면 시집가고 나서 어떡하겠습니까?”
강왕세자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뭐 어때서? 누가 감히 내 딸을 괴롭힌다고?”
세자비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살짝 화를 내는 듯하다가 웃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당신 여양 고모께서 저리 강건하신 걸 좀 보세요. 조방궁에 가야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강왕세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윤이는 그분과는 다를 거요.”
부부가 한창 이런 대화를 하는 와중에, 밖에서는 시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벽지 언니, 세자 전하께서는 돌아오셨나요?”
이 벽지라는 시녀는 머리를 벌써 부인처럼 틀어 올리고 있었지만 사실 강왕세자의 통방(*通房: 시녀이면서 첩을 겸하는 여자)이었다. 벽지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강왕비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였다. 벽지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 채운(彩云)이지? 무슨 일이야?”
채운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비께서 편찮으신데 계속 세자 전하를 보고 싶어 하세요. 벽지 언니, 제발 세자 전하께 한번 가보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벽지가 바로 대답했다.
“조급하게 굴지 마. 세자비께 벌써 말씀드렸으니 곧 문안하러 가실 거야. 넌 일단 돌아가도록 해. 왕비마마를 돌보는 게 중요하잖아.”
채운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럼 세자 전하는요? 왕비께서 세자 전하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벽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알아서 말씀드리긴 하겠지만 세자 전하께서는 일이 바쁘셔서 아마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안심하고 가봐. 세자 전하께서도 꼭 시간을 내셔서 가실 거야.”
채운은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려고 뒤를 돌다가 문득 창문을 힐끗 보았다. 어렴풋이 한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마도 강왕세자인 것 같았다.
‘세자께서 안에 계셨잖아? 방금 벽지는 분명히 세자 전하가 안 계시는 것처럼 말했는데!’
채운은 마음이 급해져 큰소리로 외쳤다.
“세자 전하! 세자 전하! 소인은 왕비마마를 모시는 채운입니다. 왕비께서 병이 나셨으니 제발 한번 와서 봐주십시오!”
벽지는 그녀가 이렇게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방 안에 강왕세자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 그녀가 눈짓하자 마당에 있던 시비가 얼른 채운을 둘러싸고 밀어냈다.
“왕비를 모시는 사람이 어찌 이리 법도를 모르니? 세자 전하께 아뢰겠다고 이렇게 떠들어 대다가 상전께서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돌아가서 왕비마마나 돌봐,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
강왕비가 별장으로 옮겨진 후부터, 이 왕부는 세자비 한 사람이 마음대로 주물렀다. 설사 강왕비가 돌아오더라도 그건 세자비가 점잖은 체하며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둔 것에 불과했다.
벽지는 울분을 참으며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래서 벽지는 자신이 몇 마디 위협하면 상대가 눈치 있게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강왕비는 그 자신조차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니, 하물며 그녀의 시비가 그런 것을 알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채운은 시녀들에게 떠밀리자 아예 머리를 들이받으며 크게 소리쳤다.
“세자 전하! 세자 전하! 왕비께서 병세가 좋지 않습니다. 제발 한 번만 가보십시오!”
벽지가 다급하게 사람을 시켜 채운을 막으려는데 강왕세자가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무거운 얼굴로 소리쳤다.
“너희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벽지는 잠시 당황했다.
‘세자께서 화가 나신 건가?’
그녀가 즉시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전하, 이 아이는 왕비마마를 모시는 채운입니다. 왕비마마께서 아프신데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소인이 일단 돌아가서 왕비마마를 돌보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 아이가…….”
세자비가 이를 보고 대뜸 꾸짖기 시작했다.
“넌 언제부터 이리 일의 경중을 구분할 줄 몰랐던 게야? 왕비께서 병이 나셨다니. 그런 큰일이 났는데 바로 들여보내지 않고 뭘 꾸물거렸단 말이냐? 너는 나중에 벌을 받으러 오너라.”
벽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지만,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자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세자 전하, 어머님께서 병이 나셨다고 하니 바로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강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들을 상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 * *
그가 도착했을 때 강왕비는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를 본 강왕비는 버둥거리며 일어나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담(谈)아! 어미가 이렇게 널 보는구나.”
강왕세자는 방안 가득한 약 냄새에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는 강왕비의 손을 다독이고 몸을 돌려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머니께서 병이 나신 지 얼마나 된 것이야? 너희는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
마지막 말을 할 때 그는 세자비를 쳐다보았다.
반년 동안 왕부의 모든 사무는 세자비가 처리하고 있었다.
세자비는 속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강왕비는 갇혀 있다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소란을 피우고 꾀병을 부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게다가 세자비는 요 며칠 그 일에 마음을 쓰느라 이곳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강왕비가 정말로 병이 났고 더구나 이렇게 심각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 잘못입니다.”
그녀는 두말없이 바로 사죄했다.
“며칠 전 어머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여 관례대로 평소에 맥을 짚던 태의를 불렀었는데 이렇게 심하신 줄 알았다면 원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미 태의를 부른 적이 있다고? 그럼 신경을 안 쓴 건 아니로군.’
강왕세자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 병이 나셨으니 푹 쉬시면서 보양하십시오. 먹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주저하지 말고 사람을 불러서 말씀하시고요. 아들이 요 며칠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썼습니다. 너무 속 끓이지 마세요.”
강왕비가 울며 말했다.
“네가 일이 바쁜 것은 나도 알지. 이 어미가 네 발목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저 매일 이 정원에만 갇혀 있으니 답답해서 병이 난 것뿐이야. 작년에 그 일은 어미가 잘못했으니 화내지 마라. 앞으로는 어미가 외출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돌아다니마. 극단을 불러다 연극 공연이나 보면 되지 않겠느냐?”
강왕세자가 화를 참았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외출하지 못하게 한 것도 태후 쪽에 해명이 안 될 것을 염려해 괜한 벌을 준 것뿐입니다. 어머니는 왕비시잖아요. 이 왕부의 주인 마님이시니 집 안에서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마음대로 가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태의원의 원사를 불러와 강왕비를 진찰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사가 와서 강 왕비의 맥을 짚고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반적인 감기일 뿐이니 약을 몇 첩 드시고 잘 쉬시면 좋아질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처방전을 써주었다.
이때 시녀가 약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강왕세자가 눈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원사가 와서 진찰했는데 약을 당연히 새것으로 달여야 할 것 아니냐, 어서 치우거라!”
시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문턱을 넘으며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약사발이 쨍그랑, 바닥에 떨어졌다.
시녀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왕세자는 이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것도 귀찮아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물러가라!”
“잠깐!”
처방전을 다 쓴 원사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약 냄새를 맡더니 걸어가서 약을 찍어 맛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이건 누가 내어준 처방전입니까? 왕비께서 땀을 흘리고 오한이 드시는데 어찌 마황을 쓴단 말입니까? 이건 좋을 게 없는데요?”
시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세자비를 바라보았다.
세자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윙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병풍 뒤의 강 왕비를 바라보았다.
‘패악질만 부릴 줄 알았던 멍청한 시어머니께서 언제 날 이렇게 음해하는 법을 배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