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친절한 사람
소현주가 어머니의 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어머니! 외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세자비는 우선 그녀를 끌어안고 나서 화가 난 나머지 아이를 아무렇게나 두어 번 때렸다.
“지난번에 덜 혼나서 그러니? 감히 또 하인을 따돌리다니, 정말 이 어미를 애태워 죽일 작정이야? 앞으로는 외출하지 못할 줄 알아라!”
소현주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이번에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면?”
한 남자가 가까이 걸어오자 강왕부의 시위들이 그를 주시했다.
오 부인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시오?”
그런 다음 무언가 떠올랐는지 오 부인은 세자비 모녀를 등 뒤로 보내고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현주를 데려간 게 당신이오?”
시위들은 그가 무공을 익힌 사람임을 알아채고 즉시 앞으로 나가 칼을 빼 들고 경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남자는 멈춰 서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방생지에서 큰 난리가 있었습니다. 이 어린 아가씨가 시녀들과 떨어져서 하마터면 사람들한테 밟힐 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마침 가족을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여러분들께서 찾으러 오신 겁니다.”
오 부인의 얼굴에는 의심의 기색이 가득했다.
“그 말은 당신이 현주를 구했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외손녀에게 물었다.
“윤아, 맞니?”
소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 아까 누군가 와서 부딪쳤었는데, 저 아저씨가 잡아줘서 안 넘어졌어요.”
그녀는 이미 열 살이라 함부로 남에게 거짓말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오 부인은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랬군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세자비가 그를 불러 세우더니 말했다.
“우리 현주를 구해주셨으니 당연히 보답을 해야지요. 선생께서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남자가 멈춰 서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돌아서 가버렸다.
오 부인은 그가 정말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보아하니 정말 그냥 친절한 사람이 맞는 것 같구나.”
세자비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눈가에 흘끗 몇 사람이 보이자 어리둥절해졌다.
지온은 들킨 김에 대범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유신지와 경소소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따라갔다.
강왕세자비가 인사를 하며 물었다.
“지온 사촌, 왜 여기 있는가?”
그녀는 의심이 생긴 듯한 표정이었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유씨 가문의 백모께서 정국공 부인과 예불을 약속하셨는데 저도 저희 어머니와 함께 놀러 왔습니다. 세자비께서도 향을 피우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녀가 대답하자마자 유신지가 앞으로 나가 인사하며 말을 가로챘다.
“소인, 세자비를 뵙습니다.”
강왕세자비는 잠시 멍해졌다.
“당신은……?”
“소인은 유씨 가문 장남입니다. 세자비께 실례했습니다.”
겅소소도 곧이어 인사했다.
“세자비마마. 공교롭게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유 대부인께서는 객원(客院)에 계십니다. 세자비께서 여기 계시는 것을 아시면 어머니께서도 분명히 반가워하실 겁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정말 우연의 일치인가 보군.’
강왕세자비의 눈에서 의심이 걷혔다.
“그쪽에 미리 선약이 있다니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되지. 나중에 공부로 한 번 인사하러 가겠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오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우리는 먼저 돌아가요.”
오 부인이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모녀는 소현주를 데리고 돌아갔다.
사람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경소소가 못 참고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사람 정말 그냥 친절한 사람 맞아? 설마? 친절한 사람이면 이렇게 멀리까지 데려올 이유가 없잖아? 난 그 사람이 소현주한테 뭔가 나쁜 짓을 하려는 줄 알았어!”
유신지는 이미 이 일에 대해 뭔가 짐작을 하고 지온에게 물었다.
“그 사내, 혹시 강왕세자비와 아는 사이요?”
지온은 그들에게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소현주 생일잔치에서 중간에 아이가 실종되는 일이 있었잖아요? 강왕부에서는 소현주가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녀를 따돌리고 나갔다고 했는데 사실은 이 사람한테 납치당했던 거예요. 그 남자와 세자비 사이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감정이 있다는 의미를 아주 명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유신지는 대리사(大理寺)에서 각종 기이한 사건을 겪은 덕분에 다행히도 이런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경소소의 경우 비록 용맹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착실한 국공부의 아가씨였기 때문에 평소에 화본과 그림책에서 보는 것 외에 이런 일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경소소는 곧장 눈이 휘둥그레져서 지온을 끌고 가더니 물었다.
“강왕세자비와 그 사람이 그런 관계라는 말이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소소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이마를 찰싹 때렸다.
“세상에나! 어찌 감히? 만약에 들키면 강왕세자는……!”
지온이 웃기 시작했다.
“안될 건 또 뭐야? 안 걸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그래도……!”
경소소의 단순한 머릿속에는 그저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있어서 이런 상황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유신지가 물었다.
“당신은 뭘 하려는 거요? 이 일을 폭로해서 강왕부에 내분이라도 일으키려는 거요?”
지온은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일단 상황을 보고 다시 얘기해요.”
유신지가 경고했다.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강왕부는 만만치 않은 곳이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대장공주마마께서 폐하 앞에 와서 소란을 피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왜냐하면 폐하가 왕부의 주인 역할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까.’
마지막 말을 유신지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지온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때 대부인이 돌아왔다.
지온이 물었다.
“방금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대부인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네. 그냥 탑 안에서 둘이 얘기하다가 밖에서 사람 찾는 소리를 듣고 나갔어.”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주로 이 남자가 소현주에게 평소에는 무엇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같은 걸 물었는데 소현주가 인형을 좋아한다고 하더구먼. 남자가 자기가 만들 줄 안다면서 다음에 갖다 주겠다고 하고…… 뭐 이런 잡담이었네.”
세 사람이 듣기에 이건 뭔가 이상했다. 경소소가 말했다.
“들어보니, 그 사람 정말 선의로 아이를 구한 것 같은데요? 두 분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지온은 그저 웃기만 했다.
유신지는 여기에 숨겨진 다른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영리하게 말했다.
“광명사 밖에 아주 유명한 과자 가게가 있소.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이라 내가 좀 대접을 할까 하는데 어떻소?”
경소소는 망설였다.
“우리 어머니와 유 대부인께서는 아직 객원에 계시잖아요!”
유신지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소, 하인을 시켜 우리가 좀 늦게 돌아간다고 전하면 되오.”
경소소가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요.”
사실 그녀도 얘기를 너무 듣고 싶었다.
지온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유신지를 한 번 쳐다보았지만 굳이 말을 꺼내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부인은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돌아갔고 유신지는 그녀들을 데리고 과자 가게로 갔다.
가게에 도착하여 안전한 곳을 찾은 뒤에 지온은 목소리를 낮추고 일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경소소는 너무 놀라 넋이 나갔다.
“그, 그러니까 강왕세자가 남의 자식을 키웠다는 거야?”
지온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너 절대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네 어머니한테도 절대 한 글자도 꺼내지 마.”
경소소가 연거푸 대답했다.
“알아, 말 안 해.”
유신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일이 폭로되면 강왕세자는 분명히 엄청나게 분노할 거요. 아마 오씨 가문에 화를 퍼붓겠지. 오씨 가문의 도움이 없어지면 강왕부의 세력이 조금 약해지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뼈대까지 흔들릴 정도는 아닐 거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세자가 장가를 들 때 강왕은 아직 힘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고결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오씨 가문을 뽑았던 것이다. 지금의 오씨 가문은 강왕부에 딱 달라붙어 있어 이 일을 까발리는 것은 강왕세자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 될 것이 뻔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은 별로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점심때가 된 것을 보고 우선 돌아가기로 했다.
정국공부와 유씨 가문이 선을 보는 자리였고, 유신지가 자신을 좋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온은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자 굳이 유 대부인에게 인사하러 가지는 않았다.
* * *
유신지와 경소소가 객원으로 돌아왔을 때 정국공 부인과 유 대부인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부인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게 놀았나 보구나? 얘들 좀 보게. 밥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올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이렇게 말하며 그녀들은 하인에게 절에서 주는 밥을 받아오라고 분부했다.
유신지는 눈치 있게 포장해 온 찬합을 꺼냈다.
“경 부인, 어머니. 방금 저희가 간식을 먹고 왔는데 아주 맛있어서 한 접시를 싸 왔어요. 아직 따뜻하니까 어서 드셔보십쇼.”
하인이 찬합을 열어 놓자 유 대부인이 보고 웃었다.
“이거 자항재(慈航斋)의 여의권(如意卷) 아니냐? 거기 가서 간식 먹었니?”
“예.”
정국공 부인도 물었다.
“너희 둘이서만?”
경소소는 지온이 그녀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예.”
두 부인이 눈을 마주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이 아주 의미심장했다.
경소소는 문득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저렇게 흐뭇하게 웃지? 내가 대공자랑 눈이 맞은 줄 아는 거야? 안 돼, 이건 해명해야 해!’
“저희가 그냥 지나가는데 과자가 맛있어 보여서…….”
정국공 부인은 유난히 자애롭게 웃었다.
“이 계집애, 식탐은 많아서.”
유 대부인도 아주 기뻐했다.
“우리 큰애도 맛있는 걸 좋아한단다. 경성 어디에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었는지 귀신같이 알지. 앞으로 소소를 데리고 자주 갈 수 있겠구나. 그렇지?”
마지막 한마디는 유신지에게 묻는 말이었다.
“아…….”
유신지는 그저 외마디만 흘릴 뿐 대답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내로서 여인을 눈앞에서 거절하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눈을 들어 경소소를 힐끗 쳐다보았다.
유신지가 경소소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며 눈빛으로 말했다.
‘나보고 거절하라고?’
유신지가 눈을 깜박였다.
‘맞소!’
경소소는 점점 머리 꼭지에 열이 올랐다.
‘지금 내가 거절하면 나중에 어머니한테 엄청나게 얻어맞을 게 뻔하단 말이야! 왜 나더러 후폭풍을 책임지라는 거야? 그럴 순 없지!’
그래서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국공 부인과 유 대부인의 눈에는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무슨 낌새가 있는 것 같아서 그녀들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녀들은 안심했다.
“됐다, 우선 식사부터 하자꾸나! 오후에 또 무비대사의 경전 강의를 들으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단다!”
‘내친김에 대사를 모셔 이 혼인이 적당한지, 또 순조롭게 진행될지 한 번 물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