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14)화 (314/385)
  • 314화. 세자비의 비밀

    지온이 다가가 물었다.

    “현주가 없어졌을 때 인형을 갖고 있었지?”

    시녀들이 서로 쳐다보고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주가 그 인형을 좋아해서 오늘도 계속 가지고 다녔지?”

    “예…….”

    “너희들이 돌아갔을 때는 그 인형을 못 봤어?”

    “예.”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버렸다. 그 시비들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대부인이 물었다.

    “왜 그러나?”

    지온이 말했다. 

    “그 인형들은 일단 움직이면 땅에 떨어지기 쉬워요.”

    대부인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움직이는 말이며, 돌아가는 바퀴며, 한 상자 가득 그런 것들이 들어있어서 조금만 부주의하면 떨어뜨리기 십상이었다.

    “만약 현주가 누군가에게 급하게 납치를 당한 거라면 어떻게 하나도 안 떨어졌겠어요?”

    대부인은 문득 깨달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 데려간 걸까?”

    지온이 말했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지요.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아주 조심스럽다는 거예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은 아직 정원에 있을지도 몰라요.”

    “설마?”

    대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남아서 뭘 노리는데?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무섭지도 않은가?”

    지온이 말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 하필이면 벽에다 한눈에 바로 보이는 흔적을 남기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대부인은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한번 조사할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 발자국을 제외하면 정말로 다른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 말이 맞구나.”

    대부인은 깨달았다. 

    “소현주는 너무 눈에 띄어서 설사 납치한다고 해도 들키기 쉬워. 우리가 밀정으로 쓰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지. 그 사람, 정말 정원에 남아있을 수도 있겠어.”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세자비가 돌아왔다.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계속 울다가 기절했던 것 같았다.

    그녀를 모시는 나이 든 시녀가 사람들에게 해명했다. 

    “여러 부인께 죄송합니다. 세자비께서 상심한 나머지 잠시 기절하셨습니다. 주인께서 쉴 수 있게 좀 모셔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위로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세자비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지온이 갑자기 말했다.

    “어머니, 세자비를 좀 지켜봐 주세요.”

    대부인이 급히 물었다.

    “세자비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겐가?”

    “어머니는 딸이 갑자기 실종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야 손님들이 당황하지 않게 먼저 손님들을 안심시킨 다음에 사람을 보내서 찾겠지.”

    “맞아요. 그런데 세자비는 그 반대로 했어요.”

    처음에는 모두가 소현주가 노느라 잠시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심각해진 것은 확실히 강왕세자가 밖으로 찾으러 가면서부터였다. 이럴 때 세자비는 우선 손님들을 안심시켜야 마땅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가 정말 쓰러졌다 하더라도 그걸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저렇게 알리는 것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을 반 바퀴 빙 돌더니 벽 옆에 붙어서 자세히 엿듣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창문!”

    지온은 대부인을 따라 바깥쪽으로 돌아가 복도 구석에 멈춰 섰다.

    대부인이 머리를 내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왔다.”

    지온이 다가가서 보니, 역시 뒤에 있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시녀 한 명이 그곳에서 손을 뻗어 강왕세자비를 부축하며 밖으로 끌어냈다.

    세자비는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를 하고는 몸을 돌려 시녀를 데리고 급하게 걸어갔다.

    “자.”

    대부인은 지온을 데리고 그녀들의 뒤를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따라붙었다.

    세자비와 시녀가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대부인은 경험이 아주 풍부해서 지온을 데리고 가면서도 전혀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화림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자 대부인이 갑자기 지온을 잡아당기며 돌 뒤로 숨었다.

    곧 강왕세자비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시녀에게 몇 마디 지시하자 시녀는 멀리 가서 매화림 입구를 지켰다.

    세자비가 고개를 돌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왔어요, 나와요!”

    잠시 후, 저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몸을 숨기고 있던 곳에서 걸어 나왔다. 

    지온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누구지? 납치범인가? 납치범한테 소식을 듣고 몰래 만나러 온 건가?’

    그 남자는 회색 상의를 입고 머리에는 삿갓을 써서 정원에서 일하는 막노동꾼처럼 변장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몸을 숨긴 각도에서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몸집이 건장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장년인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부루퉁했다. 

    “세자비, 오랜만이오.”

    그를 보자마자 강왕세자비는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급하고 빠르게 말했다.

    “윤이는요? 아이를 어디다 숨긴 거예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의 억눌린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질투가 숨어 있었다. 

    “뭘 두려워하는 거요? 설마 내가 친딸을 해치기라도 하겠소?”

    지온은 너무 놀라 얼른 제 입을 틀어막고 대부인과 눈으로 이야기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죠? 소현주가 그의 딸이라고요? 그럼 세자는요?’

    ‘세자 부부가 남의 딸을 빼앗은 건가? 아니면 세자비가 몰래 남의 씨를 품은 건가?’

    세자비는 몹시 당황하여 서둘러 사방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입 다물어요! 그런 말을 어쩜 이렇게 함부로 해요?”

    남자가 비웃기 시작했다.

    “왜, 누가 알게 돼서 세자비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그러는 거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적의가 마치 냉수를 정수리에 붓는 듯해서 강왕세자비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감정을 누그러트렸다. 그러더니 반쯤은 책망, 반쯤은 걱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긴 해요? 내 자리를 못 지키는 것이야 별일 아니지만 윤이는 죽을 거예요. 알아들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그저 윤이 걱정만 하고 있다?”

    “당연하지요!”

    세자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거면, 처음부터 내가 왜 윤이를 낳겠다고 결심했겠어요?”

    그녀의 표정은 분한 것 같기도 또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진심을 짓밟힌 것 같은 모습이어서 이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온의 눈에도 그녀가 아주 서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자비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더욱 놀라운 것은 겉으로는 첩실이 한 무리나 되는 강왕세자가 이미 오래전에 부인에게 배신당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거 아주 멋진데!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진짜 남자네!’

    할 수만 있다면 지온은 그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고 싶었다.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지난번에 난 그저 윤이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당신이 안 보여줬잖소.”

    세자비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한테 윤이를 보여줘요? 그래요, 당신 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강왕부의 소현주예요. 사람들이 알게 되면 아이가 죽어요.”

    그녀의 눈이 빨개졌다.

    “내가 아이한테 친아버지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보여줄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현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의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겠어요? 

    설마 그 아이가 당신을 따라 강호를 떠돌아다니게라도 하란 말인가요? 누구를 탓하고 싶으면 차라리 나를 탓해요. 내가 가문의 말에 따라 왕부에 시집온 건 당신과 함께 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방법이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혼사를 어떻게 마음대로 하겠어요? 종실의 친왕에게 죄를 지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녀는 말하면서 손수건을 쥐고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았다.

    지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강왕세자비 정말 대단하시네!’

    그녀는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이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확실히 그에게서 느껴지던 적의가 사라졌고 심지어는 옛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울지 마시오. 내가 뭘 어쩌려는 게 아니오. 그냥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한번 보러 온 거요.”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세자비가 화를 내며 말했다.

    “아이를 보더라도 이렇게 큰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지요. 그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지금 세자가 사람을 데리고 쫓고 있으니 어서 가세요! 절대 들키면 안 돼요.”

    이 말은 마치 그를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그들은 날 못 찾을 거요.”

    세자비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왕부의 밀정은 실력이 뛰어나요.”

    남자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알겠소. 그럼 지금 바로 가겠소.”

    세자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윤이는요?”

    남자가 턱짓을 했다.

    “저기서 놀고 있소!”

    세자비는 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가산석(假山石) 몇 개를 돌자 정말 소현주가 멀쩡히 거기에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상자 주변에 인형이 놓여 있었고 손에는 새로운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어머니.”

    소현주가 큰 소리로 불렀다. 

    세자비는 그제야 정말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왔어? 이 어미가 놀라서 기절할 뻔했잖아.”

    “죄송해요…….”

    세자비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아까 대화를 했던 장소로 갔지만 그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세자비는 허전한 마음으로 매화림을 나가면서 딸에게 당부했다.

    “여기서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고양이를 쫓아왔다고 하거라. 누구를 만났다고는 말하지 말고. 알았지?”

    소현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머니, 저랑 같이 안 가요?”

    세자비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절대 이 어미를 봤다고 하면 안 돼.”

    소현주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별로 힘도 들이지 않았는데 딸이 그냥 수긍해버리자 세자비는 주저했다.

    “너…… 정말 이해한 거 맞아?”

    소현주가 매화림 안을 바라보더니 세자비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좀 전에는 제가 연기한 거예요. 그 사람 정말 대단해요. 사람을 부를 겨를조차 없어서 그냥 계속 놀고 있는 척했어요…….”

    세자비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것.”

    소현주가 손에 든 인형을 보고 또 물었다.

    “그 사람이 어머니를 알아요? 이 인형, 어머니가 저한테 준거랑 똑같아요…….”

    남자는 그녀들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나무 뒤에서 나와 한참 동안 그녀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춤에 있는 비수를 더듬었다.

    그가 비수를 잡는 순간 대부인이 은신처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가루약 한 봉지를 뿌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넌 누구냐? 감히 강왕부에 무단 침입하다니! 어서 나를 따라 세자 전하께 가자!”

    남자는 가루약 때문에 잠시 눈이 멀어 대부인에게 마구잡이로 몇 번 칼을 휘두르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부인은 몇 걸음 쫓다가 뒤처지는 척하며 그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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