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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12)화 (312/385)
  • 312화. 한마디 하다

    왕부로 돌아오는 내내 참고 있었던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 늑대 새끼가 끝내 참지 못하더군.”

    “무슨 일인가?”

    북양태비가 물었다.

    그녀는 의례적인 접대가 귀찮아 대장공주도 있는 것을 고려해 지온과 동행하지 않았었다. 

    지온이 강왕세자비의 초대에 대해 설명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강왕세자비가 태후마마 앞에서 초대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가기로 했습니다.” 

    루안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대장공주는 문득 한 가지 사건이 떠올라 말했다. 

    “전에 한 번은 수안군주 집안의 셋째 여식이 갑자기 별원으로 피서를 가자고 청했는데, 나중에 본궁이 조사해보니 강왕부에 다녀왔더구먼.”

    지온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올해 중반에 있었던 일인가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았던 걸까요? 그 후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던 걸로 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지온이 말했다.

    “어쨌든, 그들이 한참 전부터 뭔가 의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네요.”

    루안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같이 가시지요. 장모님도 함께요.”

    북양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요윤(姚昀)은 강왕세자의 장녀로 올해 열 살이었다.

    정식 초대장이 오자 지온은 선물을 준비하고 북양태비, 대부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그녀들이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수안군주의 가마가 같이 도착했다. 

    “온아!”

    지온이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며 인사했다. 

    “군주마마, 장기 언니.”

    장기(章琦)는 지온과 마찬가지로 연초에 결혼했는데 차림새가 벌써 부인처럼 변해있었다. 장기는 시집이 친정과 가까웠기 때문에 예전처럼 제 모친과 함께 왔다. 

    장기가 웃으며 북양태비와 대부인에게 인사하고 말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오자마자 너를 만나다니.”

    수안군주가 물었다.

    “네 양어머니께서는? 안 오셨니?”

    지온이 대답했다.

    “군주께 실망을 끼쳐 죄송합니다. 양어머니께서는 지금 수행하고 계셔서 외출하시기 어렵습니다.” 

    수안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물었던 것인데, 보아하니 대장공주는 조방궁을 떠났어도 외출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다섯 사람이 다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이름은 영원(荣园)으로 일찍이 강왕이 경성에 있을 때 만든 것이었다. 이 정원에는 기이한 꽃과 풀이 두루 심겨 있어서 경성에서 유명했다.

    지온은 어린 소녀의 생일잔치라 그다지 성대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들어와 보니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장기가 목소리를 낮추며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윤이는 겨우 열 살인데 이 생일잔치는 너무…….”

    수안군주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 그런 말을 하기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딸을 막으려는데 뜻밖에 북양태비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어린아이의 생일잔치를 너무 성대하게 하는 건 좋지 않지. 강왕부에 어른이 없어서 그런가, 정말 보기 안 좋아. 이건 너무 경박한 짓이야.”

    “…….”

    수안군주는 그녀의 말에 가로막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북양태비가 경성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수안군주는 하마터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잊을 뻔했다.

    이 곽씨 가문의 소저는 어릴 때 궁에서 자라서, 서로 간에 우연히 만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수안군주와 대장공주는 간신히 단짝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였지만, 북양태비와는 마음이 정말 안 맞아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였다. 

    처음부터 수안군주는 곽여단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궁에 맡겨져 자란 고아 주제에 감히 공주처럼 오만한 기세로 남들을 깔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군주인 자신도 그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곽여단은 운이 아주 좋아서 처음에는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고, 후에는 영종황제와 태후가 그녀를 보살폈다. 혼인할 나이가 되자 곽여단은 번왕에게 시집을 갔다. 계속 위로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올 줄을 모르니 지금껏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다. 

    ‘장기는 그저 조금 투덜댄 정도라 별로 큰일도 아니었어. 그런데 거기서 북양태비가 말을 저렇게 받아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듣고 내가 강왕부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수안군주는 말을 완곡하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열 살은 정생일(*整生日: 10, 20 등 0으로 끝나는 나이의 생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세자 부부가 늘 딸을 아끼고 사랑하니,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지.”

    그녀의 이 말에 북양태비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수안, 어찌 보면 자네도 강왕세자의 고모이지. 어른으로서 그리 말을 하다니, 강왕부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하군그래.”

    수안군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슨 소리야? 강왕부에서 소현주(*小县主: 왕세자의 어린 딸)의 생일잔치를 하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먼 친척 고모가 남의 아이 생일잔치까지 참견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곽여단 네가 지금 도리를 따진다고?!’

    애석하게도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강왕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북양태비는 그녀에게 반박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리고 가버렸다.

    지온이 미안한 얼굴로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말이 좀 직설적이시니 군주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장기 언니, 나중에 봐요.”

    그리고는 대부인과 함께 북양태비를 쫓아갔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수안군주는 손가락으로 북양태비를 가리키며 화가 치밀어 말도 잇지 못했다.

    장기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머니, 우리 집이 북양왕가와 무슨 원한이 있어요?”

    수안군주가 흥 하더니 말했다.

    “비수 같은 말 한마디면 원수도 될 수 있다고 했거늘, 저 곽여단은 온 경성에 원수가 그득하겠구나.”

    “하?”

    수안군주는 한숨 돌리고 딸에게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북양태비는 젊었을 적에도 성질이 저랬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장공주한테까지도 수틀리면 말로 쿡쿡 찔러댔지.”

    장기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이 말했다. 

    “북양태비께서는 원래 그런 분이니 어머니께서 화내실 필요가 없어요.”

    그래야 한다는 것쯤은 수안군주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웃는 얼굴로 다른 여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 * *

    다른 한쪽에서 지온이 북양태비에게 물었다.

    “어머님, 왜 일부러 수안군주의 화를 돋우신 거예요?”

    북양태비가 조소하며 말했다.

    “그 여자가 지난번에 강왕부를 도와 너에 대한 뒷조사를 했어. 내가 한마디 한 건 그에 비하면 이자도 안 되지.”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수안이란 사람은 권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저 사람을 한번 잘 살펴보거라. 겉으론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강왕부에 붙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을 사람이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비하면 장기는 일상적인 일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모친처럼 세상 물정을 잘 알지는 못했다. 

    이런 말들을 하고 있을 때 강왕세자비가 왔다.

    북양태비를 본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직접 앞으로 나와 맞이했다.

    “곽 태비, 오실 거라고 생각도 못 해서 태비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일잔치일 뿐인데 좀 민망스럽습니다.”

    북양태비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자네가 우리 집 온이를 초대했는데 내가 어찌 안 올 수 있겠나? 이 아이가 시집을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네. 그러니 별수 없이 이 시어머니가 데리고 다니면서 세상 물정을 좀 알려줘야지.”

    강왕세자비가 농담을 했다.

    “곽 태비께서 며느리를 정말 아끼시나 봅니다. 지온 사촌은 참 복이 많네.”

    말이 끝나고 강왕세자비는 정씨에게 말을 걸었다.

    “이분은……?”

    지온이 예를 갖추며 인사하고 말했다. 

    “세자비마마, 안녕하십니까. 이분은 저희 어머니십니다.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소현주의 생일이라기에 같이 왔습니다.”

    세자비가 웃으며 인사했다.

    “지씨 가문의 대부인이셨군요.”

    인사가 끝난 후 세자비가 직접 그녀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곽 태비와 지온 사촌은 우선 앉아서 화초를 좀 구경해보십시오. 영원에 만매화(晚梅)가 아주 예쁘게 피어서 꽃을 심은 사람이 조방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허풍을 다 떨었답니다. 마침 지온 사촌이 온 김에 감상해보고 그자에게 벌을 줄지 상을 줄지 판단을 좀 해주게.”

    북양태비가 손사래를 쳤다.

    “세자비는 바쁠 텐데 어서 가보시게. 내 오랜만에 경성에 돌아왔으니 아는 사람이 있는지 좀 찾아보고 가서 옛날이야기나 나누려네.”

    강왕세자비는 실례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 * *

    세 사람이 정청(正厅)에 도착하였다. 안쪽에는 봉관(*凤冠: 봉황 모양의 장식이 드리워진 관)을 쓴 노부인이 앉아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웃고 떠들며 아첨하는 모습이 보였다.

    북양태비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말했다.

    “평왕비께서 오시다니?”

    지온도 놀랐다.

    “저분이 평왕비이신가요?”

    평왕은 영종황제의 형으로 현재 종실에서 항렬이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종정(*宗正: 황실 친족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직)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대장공주는 그를 황백(皇伯)이라고 불렀다. 

    평왕 부부는 나이가 많아서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지온이 경성에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평왕비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북양태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강왕부가 아주 체면이 서겠어.”

    저쪽에서 평왕비가 그녀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했다.

    그러자 시녀가 와서 큰 소리로 물었다.

    “북양태비께서 오셨습니까? 왕비마마께서 보자고 청하십니다.”

    북양태비는 한눈에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평왕비의 눈이 날카로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가서 인사를 했다.

    “숙모님, 여러 해 동안 못 뵈었는데도 여전히 저를 알아보시네요.”

    평왕비는 일흔이 넘어 머리가 새하얘졌지만, 정신은 아직 멀쩡했다. 그녀가 북양태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계집애야,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꼴인데 늙은이가 어떻게 몰라보겠니?”

    북양태비가 말했다.

    “숙모님, 저도 이제 할머니가 됐어요! 그런데 숙모님은 여전히 정정해 보이시네요.”

    말을 끝내고 북양태비는 지온과 대부인을 소개했다.

    평왕비는 대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온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훌륭한 재목이구나. 너희 아들 녀석이 복이 있어.”

    북양태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숙모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집안의 며느리를 들일 때는 많이 고르면 고를수록 더 좋지요.”

    평왕비는 그녀가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북양태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늙은이가 인사치레에 익숙해져서 이 계집애가 예의를 차릴 줄 모른다는 걸 잠시 잊었어. 그래, 그래, 네 안목이 제일 좋다.”

    평왕비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정청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지온은 자리가 너무 붐비는 것 같아서 북양태비에게 이야기하고 대부인과 회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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