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11)화 (311/385)
  • 311화. 연약함과 이기심

    두 사매에게 당부를 마치고 지온은 오송원(五松园)에 들렀다.

    루안은 벌써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는 것을 본 루안이 손을 내밀었다.

    “자.”

    두 사람은 영령당(英灵堂)으로 들어가 옥형 선생의 위패 앞에서 멈춰 섰다.

    지온이 향초에 불을 붙여 영전에 올렸다.

    루안이 지온과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그녀가 모아 두었던 원고를 불태우며 말했다.

    “아마 할아버지를 뵈러 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보세요, 이 글자들에 더 이상 옥종화의 흔적이 없지요? 이제부터 옥종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잘 지낼게요.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해서 그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무애해각과 얽힌 과거는 영원히 과거로 묻을 거예요.”

    루안이 이어서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저는 무애해각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욕심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평화롭게 가르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무애해각이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요. 마음 놓으십시오. 스승님께서 사랑한 사람은 제가 대신해서 지키겠습니다. 언젠가 저희가 그곳으로 돌아가 새로운 무애해각을 세우겠습니다.”

    원고가 다 타자 지온은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재를 꼼꼼히 빻았다.

    “가요.”

    지온이 일어서며 말했다.

    루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온의 손을 잡고 천천히 영령당을 나갔다.

    * * *

    난택산방 한쪽에서 매고고가 대장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비가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오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장공주가 경서(经书)를 정리하며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나도 이리 쉽게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매고고가 걱정했다.

    “이렇게 나가시면 궁에서 뭐라 하지는 않겠지요?”

    대장공주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 본궁이 이사 나가는 것뿐이지 환속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조방궁에 들어간 것은 일종의 의사표시였다.

    의도가 변하지 않았다면 궁에서 대장공주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예전과 지금은 상황이 달라서 황제는 지금 대장공주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장공주가 웃음을 거두고 천천히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리가 조용하게 살 수는 없을 거야.”

    매고고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마마…….”

    대장공주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아니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 아닐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요 씨(姚氏) 가문의 죄인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후회할 것 같아.”

    매고고가 대장공주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그럼 하십시오. 소인은 대의가 뭔지 모릅니다. 그저 마마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소인은 기꺼이 마마를 돕겠습니다.”

    * * *

    루안의 휴가가 끝나기 전에 지온은 그와 함께 입궁해 감사 인사를 드렸다.

    황제는 오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청녕궁에서 태후를 모시고 있었다.

    그 외 종친의 명부(*命妇: 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 몇 명도 궁으로 들어와 안부 인사를 드리고 곁에서 시중들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궁궐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과연 붉은 꽃에 푸른 잎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이 둘을 폐하가 중매해 준 거라 들었는데, 사촌 여동생에게 정말 좋은 혼처를 찾아주었군요.”

    궁전 안의 사람들이 웃으며 놀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궁에 들어온 대장공주가 말했다.

    “원래 제가 온이한테 선자리를 많이 주선해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이 아이도 이 혼사를 바로 승낙하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그 당시 제가 매에게 이 아이가 십중팔구 외모를 보는 것 같다고 했었지요.”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지온 소저는 본인이 하늘에 있는 선녀 같으니 당연히 인간세계에 내려온 선인 같은 사람과 어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후와 대장공주가 모두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종친 명부(*命妇: 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들이 맞장구를 쳤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랑은 유능하고 신부는 아름다우니 천생연분이지요.”

    옆에 있던 평왕세자비(平王世子妃)가 웃으며 바로잡았다.

    “황후마마, 이제 지씨 부인이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오, 그렇군.”

    황후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이 잠시 잊었네.”

    황제는 이런 말들에 별로 흥미가 없어 호응해주듯 웃으며 말했다.

    “황후, 여기서 어머니와 고모를 모시고 이야기 나누시오. 짐은 아직 정무가 남아있어 먼저 가보겠소.”

    황후가 일어났다.

    “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

    태후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무가 바쁠 테니 이만 가보세요.”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안을 불러 함께 나갔다.

    “루 통정, 신혼 생활의 기분이 어떤가?”

    청녕궁에서 나오자 황제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쓸데없는 일을 물었다.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 그냥 그렇습니다.”

    황제가 그를 쓱 보더니 놀리며 말했다.

    “자네 얼굴에 봄이 다 온 것 같은데, 그냥 그렇다고?”

    루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자네한테 장가를 가라고 할 때는, 그리 안 내켜 하더니만. 이제야 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좀 드나?”

    루안이 손을 합장하며 인사했다.

    “폐하의 혜안 덕분입니다.”

    황제가 감탄하며 말했다.

    “장가갈 나이가 되면 곁에 여자가 있는 것이 좋다네. 다른 것은 제쳐 두고, 누군가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공무에 전념할 수 있으니 좋지. 게다가 심란할 때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네. 그럴 때는 혼자 있을수록 더 답답해지게 마련이거든.”

    루안은 요 며칠 동안의 변화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두 사람은 화원으로 가서 구곡교에 올라 난간을 짚고 물고기를 보았다.

    황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루안이 물었다.

    “폐하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황제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한숨을 쉬었다.

    “옥비가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군.”

    루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폐하……그분이 그리우십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쑥 물었다.

    “루 통정, 자네는 짐을 원망한 적이 없나?”

    루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음에 짐이 옥비를 데리고 궁에 들어왔을 때 자네가 아주 반대했었지. 그때부터 자네는 좋은 얼굴로 그녀를 대한 적이 없지 않았나.” 

    황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짐이 종화의 이름을 쓰게 해주었다고 원망한 적이 없는가?”

    루안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대답했다.

    “신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황제가 웃었다. 

    “자네가 감히 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원망한 적이 있는 게로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짐은 예전에 자네를 질투했었네. 짐도 자네처럼 스승님의 귀염을 받고 싶어서 감히 태자셨던 형님과 경쟁하기도 했었지. 참, 자네는 왜 경쟁에 끼지 않았나? 설마 자네는 종화를 안 좋아했던 건가?”

    루안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그때는 옥 소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태자 전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황제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때 우리 중 누가 태자이셨던 형님과 경쟁을 할 수 있었겠나?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였고 앞으로 천하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는데.”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자신이 은연중에 질투심을 드러낸 것을 알아차리고 화제를 돌리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짐도 종화라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짐이 옥비에게 그녀의 이름을 쓰게 했으니 자네는 분명히 싫었겠지. 그런데 루 통정, 자네는 그런 감정을 아는가? 정말 오랫동안 원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을 때 마음속이 텅 비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것 같은, 그런 감정 말이네.”

    루안은 말없이 다리 밑으로 모여드는 물고기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도 그저 하소연하고 싶었을 뿐이라 그가 대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옥비를 찾았을 때 짐은 이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네. 옥비에게서 종화의 그림자를 보고 비로소 다시 살아있는 느낌을 찾을 수 있었지. 루 통정, 자네도 이제 결혼했으니 아마 당시의 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살아있는 여자가 곁에 있어야 그런 상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는 걸 말이네.”

    루안은 말없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계속 물고기를 보았다.

    “지온 소저는 정말 종화랑 닮았어. 안 그런가? 옥비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다네. 확실히 종화의 느낌이 있지. 내 생각엔 자네도 지온 소저와 같이 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이 아직 무애해각에 있고 종화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말이네. 물론 다 착각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게 고통을 덜어주고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네.” 

    황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3년 동안 옥비와 함께 지내다 보니 짐의 마음속에서 종화의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고 그녀의 모습도 점점 생각나지 않게 되었네. 나중에는 종화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전부 옥비의 모습이 되어버렸지. 옥비가 너무 주제넘지만 않았더라면, 짐은 그녀를 끝까지 받아주고 사랑했을 걸세. 어쨌든 옥비는 짐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으니까. 루 통정, 짐이 이렇게 말하면 좀 알겠나? 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루안은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은 폐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이미 알고 있지. 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이름조차 그녀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자신이 좀 나아지기 위해 그녀가 죽은 뒤에도 온갖 것들을 짊어지게 했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사칭한 가짜가 악랄한 인간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싸려고 했지.’

    황제는 루안과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 착각하고 편한 얼굴로 웃었다.

    “짐은 자네가 짐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네. 이제는 짐이 자네를 부러워해야겠구먼! 신혼의 단꿈에 빠져 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네는 이제 그런 일들은 생각나지 않을 테지. 하지만 짐은 옥비를 잃고 언제 다시 괜찮아질지 모르겠네.”

    루안이 천천히 말했다.

    “폐하의 곁에 아직도 많은 분이 계십니다. 황후, 신비, 류첩여……. 언젠간 천천히 옥비를 잊게 되실 겁니다. 마치…… 종화를 잊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 * *

    청녕궁 안은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지온은 대장공주가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이사했던 이야기를 꺼내어 태후를 웃겼다.

    “봉접, 결국 자네는 북양태비와 경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북양태비는 시어머니니까 며느리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지. 자네는 그게 맘에 안 들어서 굳이 따라간 거고, 안 그런가?”

    대장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올케가 절 잘 아시네요. 제가 어렵게 얻은 딸을 왜 곽여단에게 줘야 합니까? 그 여자가 경성에 얼마나 더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북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때가 되면 딸은 원래 제 딸이었고 그 여자의 아들도 쌍으로 제 것이 되는 거지요.”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뻔뻔하기는!”

    강왕세자비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이런 것을 바로 인연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고모님께서 아무도 성에 안 차 하시더니 지온 사촌만은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니까요.”

    “맞아!”

    대장공주가 숨김없이 말했다.

    “내 평생에 자식 인연이 다 저 아이에게 갔나 보네. 자네들이 앞으로 나와 함께 저 아이를 잘 돌보아줘야 해.”

    강왕세자비가 빙그레 웃었다.

    “고모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카며느리는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마침 며칠 뒤면 우리 윤(昀)이 생일인데 혹시 제게 지온 사촌을 초대할 영광이 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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