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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05)화 (305/385)
  • 305화. 최장(*催妆: 옛날에 신부가 시집을 갈 때 여러 번 재촉해야만 몸치장을 하고 출발하는 것)

    달구경을 나온 지온은 물에 비친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루안은 그녀를 이끌고 천수서원(天水书院)으로 갔다.

    오늘은 학생들이 쉬는 날이라 서원 안은 아주 조용하고 평온했다.

    유신지의 약속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 둘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강(吕康)이 난로에 부채질을 하면서 물었다.

    “모처럼 정월 대보름인데 자네들 둘은 등불 감상하러 안 가는가?”

    루안이 말했다. 

    “사형과 달구경 하는 게 등불놀이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여강이 하하 웃으며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 소저를 앞에다 두고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게냐?”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소녀도 선생님과 달구경을 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여강이 아주 즐거워했다.

    “젊은 사제가 마음이 통하는 배필을 얻었구나!”

    루안은 그저 웃었다.

    술이 다 데워지자 여강이 그들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내 벗이 고향에서 가져온 건데, 마셔보게.”

    지온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술을 조금 마셔보았다. 술맛은 아주 담백했는데 처음 맛은 약간 떫은 듯하다가 나중에는 다시 달콤해졌다. 그녀가 잔을 비우고 말했다.

    “맛있습니다.”

    여강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 술이 좋다고 한 아가씨가 있었지. 고향에 가면 한 병 가져다주기로 했었는데 아쉽게도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 돌아갈 기회가 없었어.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땐 그 아가씨는 이미 마실 수 없게 되고 말았지…….”

    뒤로 갈수록 그의 얼굴의 웃음기도 좀 옅어졌다.

    지온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들여다보았다.

    ‘옥종화 시절의 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이 술을 마신 적이 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여강이 무애해각에 있었을 때, 그녀는 아직 어렸다.

    여강은 루안에게 한 잔 더 따라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자네가 무애해각에 갔을 때 나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 사실 우리는 함께 지낸 적이 없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무애해각의 참사로 인해 죽었다.

    이 여강 사형과 루안의 왕래가 잦아진 것은 그날 이후의 4년 동안이었다.

    처음에 루안이 도망쳐 상경할 때, 여강은 마침 부모의 상을 치르는 중이었다. 루안은 북양을 떠나기 전에 여강에게 경성의 상황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그렇게 루안은 처음으로 동문의 도움을 받았다. 여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루안을 믿어준 첫 번째 사람이기도 했다.

    여강이 조정에 없는 이 3년 동안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탐색하고 신뢰를 쌓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문의 우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린 여강은 한숨을 쉬며 술잔에 남은 술을 호수에 뿌렸다.

    늙은 노복이 배를 몰아 호수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여강이 갑자기 물었다.

    “옥비의 일은, 안지 얼마나 됐는가?”

    루안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오호라…….”

    여강이 말했다.

    “어쩐지, 자네가 옥비와 전혀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더라니. 전에 사제한테 스승님이 자네를 손녀사위 삼고 싶어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네.”

    지온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여강이 미안한 듯 웃으며 해명했다.

    “지온 소저, 이건 다 지나간 일이네.”

    지온은 물론 개의치 않았다. 그건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루안은 오히려 좀 놀란 눈치였다.

    “어느 사형이 그리 말했습니까?”

    “하 사제!”

    루안이 조용해졌다. 하씨 성을 가진 사형은 곁에서 스승님을 따른 지 아주 오래되었던 사형이라 거의 반은 아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라면 틀릴 리가 없었다.

    루안이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다들 알고 있었는데 저만 몰랐을까요?”

    여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런 일은 당연히 당사자한테는 감춰야지. 그때 스승님께선 그저 그런 마음이 좀 들었을 뿐이지 아직 결심하신 것도 아니셨네. 만약에 성사가 안 되면 자네가 난처해지지 않았겠어?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 자네 신분이 보통 신분은 아니잖나. 스승님께서는 손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셨는데 만약 자네가 북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또 문제인 거지.”

    ‘그러니까 내가 무애해각에 남아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해서 스승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잖아?’

    루안은 실소했다. 옛날 일을 알게 될 때마다 그는 아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자신이 전혀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미래가, 뜻밖에도 자신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었다는 걸 루안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자리가 파한 뒤, 루안이 지온을 배웅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아주 바빠질 예정이라 아마 당신을 만나러 가기 힘들 거요.”

    “네.”

    루안은 지온이 오해할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

    “혼례를 연유로 휴가를 며칠 더 내려면 일을 미리 처리해두어야 하오.”

    지온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말에는 관아가 봉인(*封印: 관아의 사무를 중지하는 것, 고대의 연가(年假))하고 연초에 업무를 재개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쌓여 있어 지금은 한창 바쁠 때였다. 하필 자신들의 혼례 날짜가 2월이고, 곧이어 춘당(*春闱: 봄에 치는 회시(会试))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비우기 위해서 루안은 지금 일을 많이 해두어야 했다.

    * * *

    루안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지온이 집으로 돌아오니 지서가 집안에 앉아서 시큰둥하게 인사를 했다.

    “큰언니, 들어왔어?”

    지온이 웃었다.

    “응!”

    지온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지서가 물었다.

    “이거 루 통정이 준 거야?”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지서의 얼굴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남의 약혼자는 어찌나 눈치껏 잘하는지! 정월 대보름에 데리고 나가 놀고, 등불도 보내줄 줄 아는구나. 내 약혼자란 사람은 시험 준비한다면서 밖에 나오지도 않고 쓸데없는 시 한 수만 보냈는데 말이야.’

    지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아예 생각을 접어버렸다.

    * * *

    정월 대보름이 지나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2월이 되었다.

    혼례식 전날 신랑 측에서 와서 최장(*催妆: 옛날에 신부가 시집을 갈 때 여러 번 재촉해야만 몸치장을 하고 출발하는 것)을 했다.

    지씨 가문의 저택은 올 친척들은 이미 다 온 상태라 아주 시끌벅적했다.

    한씨 집안의 노부인이 외숙모 두 명을 데리고 와서 도와주었고 지온은 방안에 앉아서 그녀들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정씨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일은 자네가 가르쳤는감?”

    대부인 정씨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요. 저녁이 되면 자세히 말해주려고요.”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위가 점잖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걸 세세히 알려나 모르겠구먼.”

    지온은 곧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고는 어떻게 가르칠지 궁금해서 그들을 힐끗 훔쳐보았다.

    지온은 아직 아무렇지도 않은데, 두 어른이 오히려 어색해하기 시작했다.

    노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온아, 이제 넌 시집가는 게다. 남의 며느리가 되면 집에서 딸 노릇을 하는 것과 다르니 성질을 좀 죽일 줄 알아야 해.”

    지온이 영리하게 재빨리 대답했다.

    “외할머니 안심하세요, 저도 알아요.”

    노부인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렇게 예쁜 딸을…… 네 어미가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아했겠니!”

    지온은 괜히 눈물이 나올까 봐 웃으며 말했다.

    “외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제가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어머니가 기뻐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이 말에 노부인은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려 지온을 따라 웃었다.

    “그럼, 그럼,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아야 네 어미가 안심하지.”

    그러고 나서 노부인은 지온에게 물었다.

    “북양태비는 계속 같이 사는 게야?”

    지온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마 아닐 거예요. 어쨌든 북양 쪽에 가족이 있으니까요.”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태비는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시어머니와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사이가 틀어지기 쉽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혼자 참지 말고 여기 와서 얘기하렴.”

    지온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할머니와 손녀 두 사람이 한창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씨 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최장(*催妆: 옛날에 신부가 시집을 갈 때 여러 번 재촉해야만 몸치장을 하고 출발하는 것)하러 왔니?”

    서아가 물어보러 나갔다가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대부인! 큰일 났어요! 루씨 가문의 최장례가 오는 길에 부서졌어요.”

    대부인이 멍해져서 되물었다.

    “뭐라고?”

    지온은 이 말을 듣고 뭔가 익숙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최장례를 누가 부쉈어? 북양왕부니?”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북양왕께서 직접 사람을 데리고 와 부쉈습니다.”

    지온이 무릎을 꿇었다.

    ‘루안이 미리 말을 안 했구나! 그러니까 북양왕이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게 이거란 말이야?’

    한편 손님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경사스러운 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요?”

    “그러니까요! 북양왕이 형제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중요한 날까지 난동을 피우다니요.”

    “루 통정도 그래요, 혼례같이 중요한 일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어쨌든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지서는 이 말을 들으면서 요 며칠 동안 쓰렸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게, 좋은 건 혼자서 다 차지하더니.’

    이 루 통정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니 앞으로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것이 뻔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지서는 위로의 말이 절로 나왔다.

    “언니, 걱정하지 마. 우리 아버지와 셋째 숙부가 바로 달려갔어. 소란이 크지 않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서가 또 말했다.

    “어차피 북양왕은 얼마 안 있어 돌아갈 테니 앞으로는 방해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지온이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둘째가 정말 많이 늘었구나! 전에는 확실히 사회를 보는 눈이 부족했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스스로 터득하게 된 건가?’

    “응, 둘째 네 말이 맞아.”

    실은 지온은 정말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까짓거 최장(*催妆: 옛날에 신부가 시집을 갈 때 여러 번 재촉해야만 몸치장을 하고 출발하는 것)을 안 하면 그만 아니야? 혼례식만 망치지 않으면 괜찮아, 내 생각에 북양왕이 혼례식까지 훼방 놓을 용기는 없을 거야.’

    * * *

    평온한 거리에는 루혁이 거들먹거리며 서 있었다.

    “너희가 멍청하게 본왕에게 와서 부딪혔잖으냐. 본왕은 누가 암살하려는 줄 알고 발로 걷어찬 거다. 뭐 문제 있느냐?”

    선두에 서 있던 한등이 분노하며 말했다.

    “전하, 그런 말씀을 하시고도 안 부끄러우십니까? 저희가 이 물건들을 들고 어떻게 전하께 가서 부딪히겠습니까? 우리 공자님 혼례식을 망치려고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와, 이놈이 나한테 또 이렇게 뒤집어씌우려고. 이게 뭔지 내가 알게 뭐냐? 본왕은 얼마 전에 다쳐 방안에서 한참을 고생하다가 이제야 괜찮아졌느니라.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대로 못 본 것뿐이야.”

    루혁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공연히 생트집을 잡았다.

    한등이 몹시 화를 내며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신……!”

    루혁이 그의 손을 탁, 치며 욕을 했다.

    “네놈은 뭐 하는 놈이냐? 감히 본왕에게 손가락질을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는 정말 위풍당당하시군요! 여기가 북양이 아닌 것도 잊으시고,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시다니요!”

    소란을 구경하러 왔던 구경꾼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들이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려보니 역시나 루안이 사람을 데리고 와 있었다.

    루혁이 그를 보며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오, 이제야 나와 볼 생각이 드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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