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4)화 (304/385)
  • 304화. 속이 쓰리다

    한밤중이 되어, 루안은 마침내 북양태비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왕부에 안 머무르시고 어찌 오셨습니까? 형님이 맞은 곳은 괜찮나요?”

    북양태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락부락한 놈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니? 네가 걱정할까 봐 이리 서둘러 온 거 아니냐?”

    루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 갈수록 말씀을 아름답게 하시는군요.”

    “말하는 것 좀 보게, 이 어미가 언제는 말을 듣기 싫게 했다는 게야?”

    몇 마디 말다툼을 한 뒤, 북양태비는 루혁의 일을 이야기하고 끝으로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네 형을 괴롭히는 게야?”

    루안이 천천히 말했다.

    “이 수법은 지난번 서영왕세자를 모함한 사건과 거의 비슷합니다. 아마 같은 놈들이 한 짓이겠지요.”

    “그래서 누구란 말이야?”

    루안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소달.”

    북양태비가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지난번에 단서가 끊어지지 않았어? 소달은 혐의가 없는 거 아니냐?”

    루안이 말했다.

    “그게 이상한 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난번 사건에서 어전 시위대에 누군가 침투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소달은 처음엔 나서서 큰소리치더니 나중에 조사할 때가 돼서는 거의 제대로 조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이 발생한 걸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북양태비가 깨달았다.

    “그러네, 늙은 개는 자기 땅을 잘 지키는 법인데 이렇게 신경을 안 쓸 리가 있나.”

    그녀가 다시 캐물었다.

    “설마 네 큰형을 해치려는 게 강왕부의 개새끼인 게냐?”

    루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강왕세자는 막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 여기저기 일을 벌이고 다니다가 황제에게 체면을 깎인 이후 점점 몸을 사렸다.

    루안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찔러 죽인 일을 강왕세자가 분명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안에 대한 오명이 점차 벗겨지고 있는 지금, 강왕세자가 루혁에게 손을 쓰는 것은 루안을 도와주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과연 강왕세자가 이런 골칫거리를 스스로 만들까? 당연히 아닐 거야!’

    이런 이유로 당분간 이 일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큰형님은 빨리 북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성에 머무르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 * *

    한 해가 이렇게 흐지부지 지나갔다.

    지온은 정월에 친척집에 다녀온 뒤 시집갈 준비를 했다.

    대부인 정씨는 이런 큰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한씨 집안의 노부인이 직접 외숙모 둘을 데리고 나서 지온의 혼례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했다.

    덕분에 지온은 오히려 아주 한가했다.

    그녀는 혼수에 수도 놓지 않고 매일 이래저래 놀면서 지냈다.

    아, 가끔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상상을 하긴 했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자 유씨 가문의 넷째 아가씨가 사람을 보내어 등불을 보러 오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아쉽게도 지온이 한발 앞서 외출하는 바람에 이 초대장은 전달되지 못했다.

    회신을 받은 유민이 고개를 들어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유신지가 신경질을 내며 초대장 두 개를 내팽개쳤다.

    “같이 와서 놀자고 했더니 다들 어딜 간 거야! 나 몰래 자기들끼리 어울리려고?”

    유민이 화등에 그림을 그리면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큰 오라버니는 눈치가 없어? 정월 대보름이니 당연히 노을이 진 이후에 보자고 약속을 잡았을 테지. 그리고 누가 같이 놀아준대!”

    유신지는 목이 메어 하마터면 화가 나서 울 뻔했다.

    ‘얘는 어디 좀 갖다 버릴 수 없나? 어쩜 이렇게 남의 속을 긁지?’

    유민이 계속 말했다.

    “큰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자기 일을 좀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올해가 지나가면 오라버니도 스물셋이야, 큰어머니께서 재촉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당당하게 홀아비로 지낼 거야?”

    유신지가 굳은 얼굴로 차를 마셨다.

    “조그만 계집애가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으냐.”

    “내가 오라버니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거지! 그리고 계속 이렇게 끌고 가면 정말 좋을 거 없어. 얼마 전까지는 말이야, 내가 외출하면 아가씨들이 다 나한테 오라버니에 관해서 물어봤었거든? 근데 오히려 지금은 편해졌어. 물어보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거든. 난 오라버니가 장가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야.”

    유신지가 호기심에 유민에게 물었다.

    “왜 물어보는 사람이 점점 없어진다는 거냐? 이 오라버니가 안 잘생기길 했어? 재주가 없어? 아니면 젊고 유능하지를 않아? 스물셋이 뭐 어때서, 아직 난 안 늙었다!”

    유민이 그를 동정하듯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줘?”

    “필요 없다! 네 거짓말을 들어서 뭐 하겠느냐?”

    유민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

    “오라버니가 계속 혼례를 미루니까 지금 다른 처녀들이 전부 오라버니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무리 잘생기고 재주가 많고 젊고 유능해도 문제가 있는 남자한테 시집갈 수는 없잖아?”

    “…….”

    유신지는 말문이 막혔다.

    유민은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큰 오라버니, 좀 들어봐. 더 이상 시간 끌면 선녀는커녕 정상인한테도 장가 못 가.”

    유신지가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럴 리가? 너무 과장하지 말아라.”

    ‘내가 설마 이 가문, 이 얼굴, 이 능력으로 좋은 아가씨 하나 못 얻겠어?’

    유민이 반박했다.

    “내 생각에 오라버니는 꼭 장가를 가야 할 것 같아. 홀아비로 오래 있으면 몸에는 병이 없을지 몰라도 마음엔 병이 생길 거야. 지금도 봐, 오늘같이 좋은 날 누가 약혼한 예비부부에게 같이 등불을 보자고 하겠어? 다들 한 쌍씩 있는데 굳이 그사이에 끼려는 게 이상하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걸 보는 게 눈꼴시지도 않냐고? 솔직히 말해봐, 큰 오라버니는 대체 지온 언니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루 통정을 좋아하는 거야? 난 아직도 헷갈려.”

    유신지는 어이가 없어서 반쯤 만든 초롱을 그녀에게 던졌다.

    “또 엉뚱한 소리 하면 셋째 숙모에게 일러서 화본을 못 쓰게 해주겠다.”

    “아이, 큰 오라버니 왜 이래? 내 말에 찔리는 거 아니야? 뭘 그렇게 펄쩍 뛰고 그래. 말로 못 당하니까 일러바치려고, 파렴치하긴!”

    유민은 뒤에서 계속 재잘재잘 떠들었고, 유신지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그는 유민에게서 간신히 빠져나와 복도를 지나 유 대부인의 방으로 갔다.

    유 대부인은 동서들과 웃고 떠들다가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신지야, 왜 그러니? 누가 기분 나쁘게 했어?”

    “아닙니다.”

    유신지는 숙모들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어머니, 저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맞선 좀 주선해주세요.”

    이 말을 꺼내자 집안의 여인들이 모두 놀라 잠시 조용해졌다가, 그를 에워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신지야, 너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든 게냐?”

    “혹시, 마음에 든 아가씨가 있어?”

    “얼른 말해 봐, 숙모들이 가서 좀 보겠다.”

    유신지는 머리가 다 아파서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맘에 든 사람이 있으면 맞선을 볼 필요가 있겠어요?”

    “그건 그러네.”

    유씨 집안 식구들이 냉정을 되찾고 하나씩 물었다.

    “그럼 왜 그래? 며칠 전 설날에 저녁밥을 먹을 때만 해도 네 다섯째 숙부가 한마디 물었다고 그리 싫은 티를 내더니!”

    “그래!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무슨 충격 받을 만한 일이 있었니?”

    “아니면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라, 사람들이 다들 쌍쌍이 놀고 있는 걸 보고 부러워서 그러는 게냐?”

    유신지는 그냥 인정해버렸다.

    “맞아요!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하나씩 아버지가 되니 너무 부럽더라고요. 집안에 누군가 있는 걸 상상해보니 그것도 좋고요.”

    유씨 가문의 부인들은 명절 때보다 더 기뻐하며 합장을 했다.

    “정말 잘 됐어요! 형님, 여태까지 잘 참고 버티셨어요.”

    “그러게 말이야. 드디어 손주를 안아볼 수 있겠어.”

    “우리 가문에 4대가 함께 살게 되겠어요!”

    “…….” 

    유신지는 침묵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맞선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왜 벌써 아이 계획까지 세우고 난리야?’

    유 대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내일 소개해 주마. 이번에는 절대로 못되게 굴면 안 된다.”

    그렇게 한참 놀다가 유씨 가문의 부인들은 하나씩 작별을 고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유 대부인이 손을 저어 여종들을 모두 물렸다.

    방안에 두 모자만 남자 유 대부인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미한테 솔직히 말해 보거라.”

    유신지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 것뿐이에요!”

    유 대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선녀(仙女)랑 결혼하려던 것 아니었느냐? 이젠 싫으냐?”

    유신지가 말했다.

    “선을 안 보는데 선녀가 어디서 떨어지겠어요!”

    “…….” 

    침묵하던 유 대부인이 그의 두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온 소저의 약혼 때문에 충격받아서 그러는 것 아니니?”

    유신지는 고개를 숙이고 부채질만 했다.

    유 대부인이 말했다.

    “네가 혼인하겠다면 이 어미가 당연히 반대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네가 그저 잠깐 충격을 받아서 이러는 것일 뿐, 아직 네 마음이 지온 소저에게서 떠난 게 아니라면 이 어미가 널 돕는답시고 남의 집 귀한 딸을 괴롭힐 수야 있겠니. 스스로 잘 생각해보거라.”

    유신지가 말했다.

    “사실 이 일에 대해서 전에도 고민해보았습니다. 좋아하는 규수와 혼인할 수 없다고 평생 홀아비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습니까! 생각해보니 민이의 말이 맞아요. 저는 그 두 사람이 맺어지고 혼자 내팽개쳐진 것이 아주 속이 쓰립니다. 정월 대보름은 연인들이 만나기 좋을 때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저도 꼭 참석하려고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속이나 쓰려하고 재미없다고 불평만 할 바엔 차라리 나가서 제 짝을 찾는 게 낫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유 대부인은 마침내 안심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니 정말 잘됐구나. 마음에 안 드는 아가씨와는 결혼하면 안 되는 것이 맞지. 하지만 네가 선을 보지 않으면 어디 가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날 수 있겠니? 길거리에서 만날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잖니, 안 그래?”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부인이 흐뭇하게 그를 토닥였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단다. 이 어미가 좋은 소저들을 몇 명 찾아볼 테니 천천히 만나보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유신지가 밖으로 나오고 보니 달빛이 아주 밝았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함께 달구경을 하고 있겠지? 그 둘은 즐거운데 나만 홀로 외롭구나……. 오늘 밤에 둘 사이에 껴서 셋이 같이 놀았어도, 둘만 즐거울 뿐 나 홀로 마음만 쓰렸을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이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유모지가 방에서 나오더니 혼자 서서 달구경을 하는 형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형, 할 일 없으면 술 한잔하자!”

    유신지가 말했다.

    “그래. 식초(*醋: 질투라는 함의가 있음) 한 주전자도 추가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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