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3)화 (303/385)
  • 303화. 누가 그랬을까

    태후가 문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은 북양왕을 보며 노기를 띤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그랬나?”

    루혁이 변명했다.

    “태후마마, 신, 신은 몰랐습니다! 신이 술을 먹고 취해서 자다가 일어나보니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변명하는 게야!”

    태후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여봐라, 끌고 나가 곤장 오십 대를 쳐라!”

    “어머니!”

    “태후마마!”

    먼저 태후를 부른 것은 황제였다. 북양왕은 실권을 가진 번왕이었기 때문에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냥 끌고 가서 곤장을 50대나 때리는 것은 적절치 못했다.

    그다음 그녀를 부른 것은 북양태비였다. 태후를 따라왔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그녀는 얼른 나와서 소리쳤다.

    “태후마마, 고정하십시오! 뭔가 좀 이상합니다!”

    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다고? 눈앞에 사실이 뻔히 보이는데 뭐가 이상하다는 것인가? 북양태비, 내 자네가 아들을 아끼는 것은 알고 있네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 벌을 안 줄 수는 없네!”

    북양태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마마, 우리 북양은 날씨가 추워 겨울에 밖에서 훈련할 때는 몸을 녹이기 위해 다들 소주 한 병씩은 가지고 다닙니다. 혁이는 원래 술을 잘 마시는 아이인데 어째서 이렇게 쉽게 취했을까요? 

    거기다 술에 취했으면 취했지, 이유도 없이 태원전으로 달려온 것도 이상합니다. 이곳에는 선대 황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주위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습니까? 왜 혁이를 들여보냈을까요? 태후마마, 이 일은 정말로 이상하니 꼭 진상을 밝혀주십시오!”

    그녀의 말을 듣고 황제는 문득 깨달았다.

    ‘그래, 얼마 전에 만수연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 지난번에는 서영왕, 이번에는 북양왕…….’

    태후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북양태비, 자네 말은 자네 아들이 모함당했다는 뜻인가?”

    북양태비가 완곡하게 말했다.

    “신은 그저 의문점이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 아들이 모함당했다고 쳐보세, 그럼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태후가 말을 마치고 눈으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루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 통정, 설마 자네는 아니겠지?”

    루안이 앞으로 나와 섰다.

    “태후마마, 신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북양태비가 또 당황하여 급히 소리쳤다.

    “태후마마, 신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됐네!”

    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자네가 아들이 죄를 모면하게 하려고 이런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자네가 북양왕이 누명을 쓴 거라 주장한다면 나는 루 통정이 혐의가 가장 크다고 주장할 테야. 이의는 없겠지? 루 통정은 확실히 궁에 대해 훤히 알고 손아귀에 이상한 약들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네. 자네가 두 아들 중에 하나를 고르게.”

    “태후마마…….”

    북양태비의 말문이 막히자 태후가 다시 큰 소리로 호령했다.

    “뭣들 하느냐. 북양왕이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며 선대 황제께 불경스러운 짓을 했으니 곤장 오십 대를 때려 궁 밖으로 내쫓아라!”

    곤장 오십 대를 한 번에 다 맞으면 북양왕은 경성에서 몇 달이나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게 뻔했다!

    황제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 태후가 때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직 조사도 안 해보았는데…….”

    태후가 차갑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가 모함당한 것이든 아니든 선대 황제에게 불경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황제가 흐트러진 제사상을 보고 인정했다.

    “예…….”

    “근데 또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황제가 낮은 소리로 사정했다.

    “어머니, 이번 설이 지나면 북양왕에게 곤장을 친 일로 조정에서 분명히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북양왕이 당연히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선대 황제까지 연관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태후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럼 서른 대로 하지요. 쫓아내지 않을 테니 스스로 알아서 가라고 해라.”

    “예.”

    “태후, 태후마마, 신 억울합니다!”

    루혁은 소리를 지르면서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끌려 나갔다.

    북양태비는 눈물을 흘리며 태후에게 사죄한 뒤 북양왕을 쫓아갔다.

    루안은 시종일관 냉담한 표정이었다.

    내시들이 와서 빠르게 제사상을 치웠다. 황제와 태후는 다시 향을 피우고 나서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지온은 소식을 듣고 북양왕이 태원전에 잘못 들어가서 태후에게 벌을 받았다고 경소소에게 얼버무렸다.

    신하가 추태를 부려 벌을 받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으므로 모두 두세 마디하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온은 너무나 궁금했다. 

    ‘이 일은 이렇게 해결된 건가? 그러니까 화를 자초하는 내 체질과는 상관없는 일이란 말이지, 그렇지?’

    * * *

    연회는 무사히 끝났고 그녀는 대장공주를 모시고 궁을 떠났다.

    궁문을 빠져나오자 대장공주가 갑자기 말했다.

    “북양왕을 노리는 자가 있는가 보다.”

    지온이 급히 물었다.

    “어머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대장공주가 사건을 대충 한번 훑더니 말했다.

    “원래라면 북양왕을 가두어 두고 조사를 해보아야 해. 그러니 태후께서 선대 황제에게 불경하다는 이유를 들어 때리는 것으로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어 버리신 거다. 그럼 폐하 쪽에서도 이미 벌을 받은 사람을 또 가두긴 힘드니 일단 궁 밖으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왕은 신분이 특수해서 일단 궁에 남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단서를 하나 잡았다.

    “이 수법, 혹시 지난번에 서영왕세자를 모함한 사람이 한 짓일까요?”

    “모르겠구나. 하지만 의도가 불순한 건 확실하지.”

    지난번 서영왕세자가 모함당했을 때 끝까지 조사해서 혐의가 있는 시위를 모조리 찾아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서는 거기서 끊겨버렸다. 

    ‘지금 비슷한 일이 또 생긴 걸 보니, 배후 조종자가 나타난 건 아닐까?’

    * * *

    “아이고, 조심, 조심……! 아야! 살살 가라는 말 못 들었어?”

    궁에서 실려 나온 북양왕 루혁은 가는 내내 짜증을 부렸다.

    북양태비가 훌쩍거리며 마차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혁아, 혁아, 괜찮으냐!”

    루혁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그 자식밖에 모르시는 분 아니셨습니까? 여긴 뭐 하러 오셨습니까?”

    북양태비가 말했다.

    “이 못된 놈아, 어미 마음을 꼭 그렇게 찔러야겠어! 걘 내 아들이야. 너도 내 아들이 아니더냐? 이 어미를 봐서 너희 둘이 화목하게 지내라는 게 뭐 잘못됐니?”

    루혁이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예, 어머니께서는 잘못이 없으시지요. 그럼 다 제 잘못이겠네요! 형을 헐뜯은 건 그놈인데 잘못은 제가 한 것이 되는군요. 도대체 누가 잘 지내기 싫은 거랍니까?”

    “그 아이는 네 아우잖니, 네가 좀 양보하면 안 되겠느냐?”

    “아직도 저더러 양보하라고요? 제가 뭘 더 어떻게 양보해야 합니까? 이 북양왕 자리를 그놈에게 넘겨주어야 양보했다고 하실 건가요? 어머니, 편애가 너무 심하십니다. 말 한마디도 없이 경성으로 가버리시지를 않나! 대체 다른 사람들이 절 뭐로 보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제가 이 왕작을 이어받은 게 잘못되었다고 수군거리고 있고, 그놈은 오히려 무고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잖습니까!”

    “그럼 그 아이가 왕작을 탈취하려 하기라도 했다는 게냐? 그건 말도 안 되지! 안이가 어떻게 네 작위를 뺐을 수 있겠느냐?”

    “그놈은 안 그랬고, 전 그랬다는 건가요?”

    “아니, 아니, 어미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너희 형제끼리 오해가 있으니까…….”

    마차가 왕부로 들어가자 더 이상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과 동행한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북양왕부는 참 재미있네요. 형제 둘 다 자기는 떳떳하다고 우기고,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게 말이오! 지난번에 조당에서 루 통정이 자기 형한테 한바탕 퍼부었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감명 깊던지. 이번에 북양왕이 동생을 욕할 때도 아주 거리낌이 없더구먼. 게다가 북양태비는 막내아들을 믿고 있으면서 큰아들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고 말이오. 이상하지 않소? 만약 그들이 모두 아니라면 선대 북양왕은 도대체 누가 해쳤단 말이오?”

    이건 정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문제였다.

    “루씨 가문의 방계 쪽에서 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요? 방계 쪽에서 그런 짓을 해봐야 좋을 게 뭐 있다고? 루연은 적자와 적손이 다 있어서 어떻게 해도 방계 쪽으로 차례가 돌아갈 수가 없소.”

    “그렇긴 하지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만약 선대 북양왕의 죽음이 정말 그들 형제와 무관하다면 대체 누가 그랬을까? 루씨 가문 형제가 서로 반목하면 누구에게 가장 이득일까?’

    일제히 몸서리를 친 그들은 차마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 * *

    루혁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주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북양태비가 울음을 그치고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우느라 입이 다 말랐네. 고홍아, 차 한 잔 따라오너라.”

    “예.”

    루혁이 탄식하며 말했다.

    “정말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나, 겨우 술 한 잔이었는데? 그걸로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아야, 살살하거라!”

    그의 상처를 봐주고 있는 의원은 눈을 슬쩍 들어 올렸지만, 그렇다고 살살해주지도 않았다.

    “전하, 참으십시오. 저희가 살살하려고 해도, 살살할 수가 없습니다. 피가 얼어서 바지를 벗기지 않으면 약을 바르지 못하니까요.”

    북양태비가 그를 비웃었다.

    “상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응석받이가 되었느냐? 겨울철에 야영 가서 한 번도 다쳐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구나.”

    루혁이 당당하게 말했다.

    “다쳤는데 안 아프겠습니까? 어머니의 아들은 철인이 아니라니까요? 아오!”

    의원이 상처를 씻고 독한 술을 부었다.

    루혁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외쳤다.

    “어머니! 누가 본왕을 함정에 빠뜨렸는지 알아내서 그 집안의 18대조 조상까지 다 부수고야 말 겁니다!”

    북양태비가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그리고 네가 남의 조상 18대까지 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루혁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날 해친 사람이 요(姚) 씨라면…… 못 건드리겠군.’

    북양태비가 차를 한 잔 마시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게야? 서영왕세자가 덫에 걸려든 건 경험이 없어서라고 치자. 근데 너까지 걸려들다니 너무 멍청한 것 아니냐?”

    루혁은 친어머니에게 호된 공격을 받는 것에 이미 익숙해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뭘 안다고 그러세요? 제가 기민하게 굴지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몇 대 맞는 걸로 안 끝났을 겁니다.”

    북양태비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냐?”

    루혁이 말했다.

    “제 술에 약을 탄 것이 아니라 정방(净房)의 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에 뭔가 안 좋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지요. 그때, 누군가가 저를 승원궁으로 안내하더군요. 다행히 제가 정신을 가다듬는 물건을 지니고 있었던 덕분에 겨우 이성을 유지하고 가까이에 있는 태원전으로 뛰어 들어간 겁니다.”

    북양태비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승원궁으로? 무엇 때문에?”

    루혁이 말했다.

    “승원궁에 들어가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설령 제가 술에 취해 있었고, 또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저를 안 믿으셨을 거라고요.”

    승원궁의 서재에 있는 문서는 모두 기밀이었다. 루혁이 정말 들어갔으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그가 술을 핑계 삼아 연기하는 것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태원전에는 선대 황제의 위패만 있었다. 불경죄는 기밀을 엿보는 것보다는 그 죄가 훨씬 가벼웠다.

    북양태비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것이야?”

    루혁이 말했다.

    “약효가 얼마나 갈지 모르는데 혹시라도 정신을 잃으면 곤란하잖습니까. 그래서 얼른 제사상을 넘어뜨려 다른 사람을 불러들였지요.”

    북양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께서 체면을 생각해 널 몇 대 때리고 궁에서 내보내 주신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루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것이 최선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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