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2)화 (302/385)
  • 302화. 그녀가 한 짓이 아니야!

    지온은 올 한해를 아주 느슨하게 보냈다.

    눈이 자주 와서 밖에서 화살 쏘는 연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온은 아침에는 늦게까지 잠을 잤다.

    오후에는 밖에 나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유씨 가문 남매와 경소소 등을 만났다.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당연히 루안이었다.

    지온이 생각해보니 지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온 이 일주일 남짓의 시간 동안 조방궁에 있을 때보다 훨씬 흐트러진 생활을 한 것 같았다. 

    설이 될 때까지 지온은 그렇게 지냈다.

    신정(元旦) 당일, 대조회(*大朝会: 정월 초하루에 대신들이 조정에 올라가 새해를 축하하는 활동)와 궁에서 베푸는 하사연이 열렸다.

    대장공주가 사람을 보내어 지온을 데리러 왔다.

    가마에 올라탄 대장공주가 한참 지온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 얼굴이 다 환해졌구나. 집에 한번 갔다 왔다고 이리 살이 찌다니 혹시 조방궁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게야?”

    지온이 그 말을 듣고 얼른 자기 허리를 만졌다.

    “정말요? 진짜 살쪘어요?”

    대장공주는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살짝 삐딱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다, 볼만 조금 통통해졌고 몸은 안 쪘어.”

    지온이 한숨 돌리고 말했다.

    “요즘 계속 나가서 먹고 마시고 운동도 별로 안 했어요. 살을 좀 빼야 할 것 같아요. 시집갈 때 혼례복도 못 입으면 망신이잖아요.”

    대장공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이고 이 아가씨야. 살이 쪄봤자 얼마나 쪘겠느냐? 살은 조금 찌는 게 좋아. 그래야 튼튼해서 아이를 낳을 때 고생을 덜 하지.”

    ‘어쩌다가 얘기가 아이를 낳는 데까지 간 거지? 잠깐, 결혼하면 곧 아이를 낳는 문제에 맞닥뜨려야 하는 거잖아…….’

    대장공주는 지온의 멍해진 모습을 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아직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냐?”

    지온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상상이 안 돼서요.”

    다시 살아나 루안을 만났을 때, 지온은 그저 이번에는 그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장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어서, 너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구나.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순리에 맡기면 될 것이야.“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생각만 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 원 재상댁 며느리가 임신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배가 정말 컸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을 때 그녀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지? 생각해보자, 무애해각의 스승님들께서 어떻게 아이를 키웠더라?’

    대장공주는 지온이 이렇게 한참이나 멍하게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아주 웃겼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느니라. 네가 아이를 가지면 천천히 익숙해질 거다.”

    이렇게 말하며 대장공주는 지온의 가녀린 몸매를 보고 말했다.

    “그때 가서 매를 시켜서 몸보신을 좀 하든지, 아니면 살을 좀 더 찌우든지.”

    지온의 머릿속은 온통 아이라는 글자로 가득 찼다. 가마에서 내려 찬바람을 맞고 나서야 지온은 그런 두려운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정 대연회에는 제후와 대신들, 내외명부까지 모두 참석했다.

    지온은 대장공주를 따라 낯익은 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예전처럼 경소소와 함께 어울렸다.

    몇 번의 싸움을 통해 그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고위층 여인들은 더 이상 지온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지온은 경소소와 구석에 앉아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술 좀 작작 마셔, 지난번 서영왕세자 사건도 다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지온이 경소소에게 주의를 주었다.

    경소소는 입으로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경소소는 술을 두 잔 마시고 술기운을 빌려 말했다.

    “지온 언니, 언니는 참 좋겠어. 혼사도 이미 정해졌고 별로 걱정할 일도 없고 말이야.”

    지온이 말뜻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집에서 네 혼사 얘기를 꺼냈어?”

    경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매일 초상화를 보라고 하니 짜증이 나 죽겠어.”

    지온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주는 건 그나마 나은 거야, 정말 무서운 건 너한테 보라고도 안 하고 혼사가 이미 정해졌다고 말하는 거지.”

    경소소가 잠시 멍해졌다.

    “언니 말도 맞네.”

    술을 한 잔 들이켜고 경소소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진짜 짜증 나! 시집을 왜 가야 해? 시집 안 가면 안 돼?”

    “아마 안 될걸.”

    지온이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체면이라는 건 말이야, 너무 신경 쓰면 안 되지만 신경을 너무 안 써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너, 이 바닥을 스스로 빠져나갈 능력도 없잖아. 안 그래?”

    경소소가 투덜댔다.

    “지온 언니, 너무 냉정하잖아.”

    “다 널 현실에 직면하게 하려는 거지, 목적 없는 발악은 그냥 힘만 낭비하는 거니까.”

    지온이 또 그녀에게 물었다.

    “집안에서는 누굴 마음에 들어 하셔?”

    경소소가 몇 명의 이름을 말했다. 궁중 연회 중이라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벌써 바닥에 누워 버렸을 것이다.

    “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골라! 게다가 어머니는 내가 너무 까불어서 칼이나 창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대. 골라온 사람은 모두 문약한 문인들뿐이야. 진짜 재미없어!”

    지온이 말했다.

    “문인들이 꼭 재미없는 건 아니야. 재미가 있든 없든 성격을 봐야 해. 네가 고르고 나서 선을 보면 되지, 뭐가 그리 급해?”

    경소소의 입가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렇게 선을 본들 상대에 대해 뭘 알아볼 수나 있어? 누군들 선자리에서 연기하지 않겠어? 나더러 누가 가서 선을 보라고 하면 분명히 나도 선자리에서는 얌전하고 똑똑한 척할 거라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생각하던 지온이 넌지시 조언했다. 

    “그럼 네가 가서 상대를 알아볼 다른 기회를 만들면 되지! 그럼 그 사람의 밑바닥을 짐작해볼 수 있지 않겠어?”

    경소소가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방법 같았다. 갑자기 경소소의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영감이 떠올랐다.

    “참, 그러고 보니 따로 시간을 낼 필요도 없겠다. 그 사람들 오늘 분명히 궁정 연회에 참석할 거야. 한꺼번에 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온은 동의하지 않았다.

    “오늘은 평상시가 아니잖아! 게다가 우리 같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사고를 치기 쉬워.”

    경소소는 지온으로부터 계속 부정적인 말을 듣자 볼멘소리로 말했다.

    “지온 언니, 변했어.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어쩜 우리 어머니처럼 변한 거야? 이러면 안 좋고, 저러면 안 된다느니…….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던 예전의 언니가 정말 그립다.”

    지온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너 이 계집애, 정말 사리 분별을 못 하는구나! 내가 너한테 소염의 머리를 때리라고 했던 거 기억해? 소란을 피울 수 있는 거면 당연히 하겠지! 하지만 소란을 피울 수 없을 때는 착한 척하고 있어야 한다고.”

    ‘얼마 전에 큰일을 저질렀으니, 우선 상황이 잠잠해진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자…….’

    마음을 정한 지온은 그간 편안하게 빈둥거리며 지냈었다. 

    연회 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밖에서 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지온은 얼떨결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또 사고가 난 거야? 설마 사고라는 것이 내가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게 아니라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저절로 발생하는 거란 말이야?’

    “밖이 왜 그리 소란스러우냐? 무슨 일인 게야?”

    태후도 소란스러움에 놀랐다.

    왕 상궁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 했고 그가 곧 돌아와 보고했다.

    “북양왕이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운 후에 태원전(太元殿)에 쳐들어가서 제사상을 뒤집어엎고 선황의 영전에 누워 쿨쿨 자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태후가 진노하여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정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가자!”

    ‘역시나 사고가 났군.’

    지온의 마음속에 이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 * *

    루안은 급한 걸음으로 황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폐하!”

    그를 본 황제가 안색을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루 통정, 자네는 가지 말게, 괜히 트집잡힐 수도 있어.”

    루씨 가문 형제들은 사이가 나빠 북양왕이 그에게 뭔가 누명을 씌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안은 말했다.

    “폐하, 일이 뭔가 좀 이상합니다. 신도 가게 해 주십시오. 신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을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터무니없이 꾸며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루안이 없었다면 자신은 정말 허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알겠네.”

    황급히 루안이 황제를 따라 태원전에 도착하니 시위가 여전히 입구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내부는 혼란스러웠고 코 고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황제가 내부 상황을 확인하고는 분노했다.

    “북양왕!”

    정전 안에 놓인 제사상은 뒤집혀 있었는데, 제물이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그리고 북양왕 루혁은 땅바닥에 누워 아주 깊이 쿨쿨 자고 있었다.

    황제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며 큰 소리로 일갈했다.

    “여봐라! 북양왕을 잡아라!”

    “예!”

    곤드레만드레 취한 그의 모습을 보니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가 다시 말했다.

    “얼른 깨워!”

    시위가 즉시 찬물을 가져와 그에게 인정사정없이 끼얹었다.

    밖은 얼음이 두껍게 얼 정도의 날씨인지라, 밖에서 퍼온 냉수 한 대야가 얼굴로 쏟아지자 루혁은 깜짝 놀라 껑충 뛰어올랐다.

    “누구야? 누가 감히 본왕을 놀려? 이리 나오거라!”

    그가 소리를 지르자 이에 대답하는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짐이 물을 뿌리라고 했는데, 어쩔 텐가?”

    루혁이 그제야 눈을 제대로 떠서 상대방을 보고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폐, 폐하?”

    황제가 차갑게 웃었다.

    “아직 사람을 알아볼 수는 있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군!”

    루혁은 그의 비웃음을 듣고 입을 쩍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왜 여기 있지?”

    “그거라면 짐도 참으로 알고 싶네만.”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짐이 자네에게 마실 것을 안 주었는가? 아니면 먹을 것을 안 주었는가? 어찌 선황제의 영전에 올려진 제물에까지 손을 댄단 말인가?”

    바닥에 한가득 떨어진 제물을 보니, 어떤 것은 루혁이 반쯤 깨물어 먹어 마치 쥐가 파먹은 것 같았다.

    황제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것들은 어째서 늘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게야? 아주 일 년 내내 못살게 구는구나.’

    이 상황을 본 루혁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신은 몰랐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제가 어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황제가 막 입을 떼려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황제가 뒤를 돌아보니 태후였다.

    “어머니!”

    황제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태후를 맞이했다.

    “이런 일로 어마마마께서 놀라셔야 하겠습니까? 사소한 일인지라…….”

    태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엉망진창인 정전을 가리키며 다그쳤다.

    “이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선황제의 위패가 부서지기라도 해야 큰일이라고 할 건가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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