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1)화 (301/385)
  • 301화. 남자를 좋아하는 거라고?

    루안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대장공주마마께서는 돈이 많으시잖소! 공주부는 없어졌지만, 경성 안에 산업도 적지 않게 벌이고 계시고 공주마마의 사택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 근 몇 년 동안 조방궁에 틀어박혀 계시니 돈 쓸데도 없으실 거요. 내가 다 신경 써서 일부는 좀 쓰게끔 도와드리는 거 아니오?”

    “아이고, 그게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는 거란 말인가요!”

    지온이 비웃었다.

    루안은 얼굴도 두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당신 형님은요?”

    “우리 형님은 왕부에 기거하면서 아주 잘 있소.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심심하면 우리 관아에 와서 욕이나 몇 마디하고 아주 즐겁게 살고 있소.”

    루안은 지온의 귓가에 있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며 약간의 질투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우리 형님한테도 이렇게 관심이 있으면서 왜 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는 거요?”

    “당신은 잘 지내고 있잖아요!”

    지온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난 당신 형님이 여기 남아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 거 같았어요.”

    루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소. 한겨울이라 돌아가는 길이 막혔는데 지금 급히 가면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소.”

    “그건 그래요.”

    루안이 또 그녀에게 물었다.

    “수놓는 사람은 마음에 드오? 혼례복은 제때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아주 좋은데 좀 손해이긴 해요.”

    “뭐가 손해란 거요?”

    “이렇게 공들여 수놓은 혼례복을 딱 하루밖에 못 입잖아요.”

    루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매일 입어도 되오. 밤에 입고 나한테 보여 주면 되지.”

    분명 노골적인 말은 한마디도 없었는데도 말이 뭔가 묘하게 간질거렸다. 지온은 귀가 뜨거워져 그를 꼬집었다.

    루안이 가볍게 웃으며 지온을 다시 꼭 껴안았다.

    * * *

    지온이 깨어났을 때, 곁은 이미 비어있었다.

    루안이 도대체 언제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쨌든 루안은 오랫동안 느끼하게 굴다가 이내 함께 곯아떨어졌다.

    지온은 일어나서 씻고 머리를 정돈했다. 서아가 또 침대보가 너무 헝클어져 있다며 투덜댔지만, 지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침을 먹으러 지온이 중당에 가니 대부인 정씨가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태도였지만 지온은 그녀의 눈빛에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오늘따라 밥을 유난히 얌전하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셋째 부인이 사람을 보내오라고 청했다.

    정씨가 말했다.

    “가자, 먼저 가서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자꾸나.”

    * * *

    지온이 공당에 도착하자 차남가와 삼남가의 식구들도 곧 도착했다.

    지장이 향시에 급제하면서부터 삼남가에 연이어 좋은 일들이 생겼다. 지씨 가문의 셋째 대감인 지익마저 여러 해 동안 변화가 없던 관직이 한 등급 승진해,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과 비교해보면 차남가의 분위기는 다소 침울했다.

    지염은 시험에 낙방한 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늘 얼굴을 찡그리고 소란을 피워댔고 동생들도 그와 말을 섞지 않았다. 둘째 대감인 지형과 위씨는 간통 사건 이후 겉으론 화목해 보이나 속은 편치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지서는 그나마 정상이었다. 그녀는 지온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혼삿날은 언제인지를 물었다.

    “아직 한 달 정도 남았는데, 금방이지. 둘째 너는?”

    지서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언니보다 한 달 늦어.”

    지서는 속이 좀 뒤틀렸다. 지온의 예비 남편은 4품 고관이고 결혼하면 그녀는 부인(夫人)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설령 부군이 다음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루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년 동안 푸대접을 받으며 지서는 서서히 현실을 깨달았다. 현재로서는 이 혼처가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달갑지 않다고 해서 또 뭘 어쩌겠는가?

    * * *

    오후가 되어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온 가족이 함께 앉아 음식을 먹었다. 소년(小年)은 이렇게 지나갔다.

    지온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두건을 쓰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심 씨네 양고기탕 가게에 도착하자 누군가 손짓을 했다.

    “여기예요, 여기!”

    유씨 가문 삼 남매였다.

    지온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두건을 벗었다. 서아는 맞은편 찻집에서 기다리라고 보내 버렸다. 지온은 유민의 옆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

    “둘째 공자님은 콧바람 쐬러 나왔나요?”

    유모지는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지온의 말을 듣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콧바람은 무슨 콧바람이오? 지 소저,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소?”

    유신지는 갓 썬 양고기말이를 집어 끓는 국에 넣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지 소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네가 매일 집에만 갇혀 있다가 콧바람 쐬러 나온 건 맞지 않느냐?”

    유민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지가 화를 냈다.

    “다들 대체 누구 편이야? 왜 맨날 지온 소저 편만 들고 나한테 뭐라 그래!”

    유신지가 그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우린 유씨 가문 사람들이고,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단다.”

    유모지는 화가 나서 젓가락을 던지고 싶었다.

    ‘형은 무슨, 맨날 저렇게 욕만 해대는데!’

    얇게 썬 양고기말이는 국에 넣자마자 익었다. 유신지가 말했다.

    “빨리 먹거라, 오래 끓이면 맛없다.”

    유모지는 금세 젓가락을 집어 들며 방금 화가 났었다는 것조차 잊었다.

    “내 것이야! 이거 내 거라고!”

    지온은 고기를 몇 조각 먹고 천천히 탕을 반 그릇 마셨다.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녀가 물었다.

    “왜 오늘은 방을 안 빌렸어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유신지가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밖에서 먹고 싶으면 밖에 앉아도 됩니다.”

    이 나라는 개방적인 편이어서 비록 여자 손님이 좀 희귀하긴 했지만, 그렇게 남녀유별이 엄하지는 않았다.

    유민이 배부르게 먹고 지온에게 물었다.

    “언니, 왜 안 먹어요?”

    “나는 나오기 전에 명절 음식을 먹었어. 너희 집은 안 먹었어?”

    유신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집은 명절 음식을 안 하고 만두를 해서 먹소. 별로 재미가 없어서 몰래 빠져나왔지.”

    각 지방은 각자의 풍습이 있었다. 지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본적이 다르므로 소년을 지내는 방법도 크게 달랐다. 

    지온이 먹지 않으니 유민은 지온을 끌고 가 자신의 새 화본(*话本: 송대(宋代)에 생긴 백화 소설(白話小說)로 통속적인 글로 쓰여 주로 역사 고사와 당시의 사회생활을 제재로 하였음)에 대해 토론했다.

    그녀들이 신나게 떠드는 것을 듣고 유모지도 끼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큰형에게 등짝을 맞고서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 차리거라! 시험이 한 달밖에 안 남았다. 시험에 합격만 하면 쓰고 싶은 건 뭐든 다 써도 된다.”

    유모지는 괴로운 표정으로 슬픔과 분노를 먹는 것으로 푸는 수밖에 없었다.

    유민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언니 혼례 날짜도 그때쯤이죠?”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루 더 빨라.”

    유민이 자신의 둘째 오빠를 동정하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누군 참 불쌍하네! 어떤 사람은 신방에 촛불을 밝히는데 누구는 수험방에서 고생하며 자야 하고.”

    유모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비꼬지 마. 난 시험을 보러 가는 거야. 좋은 일이라고!”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어?”

    유신지가 가볍게 유모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매일 공부하라고 재촉하게 만들더니.”

    유모지는 이내 목을 움츠리고 순순히 먹는 데만 몰두했다.

    유신지는 유민이 지온을 쫓아다니며 궁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묻자 책상을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밖에서는 말 좀 조심하거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도 있어.”

    유민이 말했다.

    “언니, 그럼 어디 다른 데 가서 얘기할까요?”

    지온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그리하여 아직 배를 다 채우지 못한 유모지까지 함께 끌려 나왔다. 네 사람은 가까운 광명사(光明寺)로 갔다.

    유민의 질문에 지온은 대답해줄 수 있는 것들은 다 대답해주었다.

    “……대충 이랬어.”

    “와! 그런 수법을 왜 생각을 못 했지? 다음번에 써먹어야겠어요!”

    지온이 유민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름 바꾸는 거 잊어버리지 마, 이건 황실의 일이야, 사람들이 눈치채면 골치 아파.”

    유민은 두말없이 수긍했다.

    “언니, 안심해요. 수법만 좀 베낄 거예요. 다른 것은 절대 연상되지 않게 할게요. 저도 알아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민은 명문가 출신이라 이런 일들에 있어서는 한결 안심이 되었다.

    잠시 후 절이 떠들썩해지며 스님들이 불당에 모여들었다.

    유민과 유모지가 서로 밀쳐대며 구경하러 가자 유신지와 지온은 뒤처졌다.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유신지가 물었다.

    “옥비의 일은 정말 소저와 상관없는 겁니까?”

    지온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나같이 왜들 이래요? 내가 아무리 간이 커도 궁에서까지 말썽을 부릴 수 있겠어요? 정말 내가 한 거 아니에요.”

    유신지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럼 루안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딱 제때 온 겁니까?”

    “나와 계획한 것이 있긴 했지만, 이건 별개의 일이었어요.”

    유신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에 기름을 부은 게로군.”

    지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어찌 귀인들을 괴롭히는 데까지 손을 쓰겠어요? 하지만 내가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는 해야지요.”

    “소저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유신지가 변명했다.

    잠시 후, 그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옥비랑 무슨 껄끄러운 일이 있었습니까?”

    ‘됐다, 이런 인상은 정말 바뀌지 않네. 입으로는 나를 믿는다고 하더니, 속으로는 옥비가 무너진 게 아직도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지온은 아예 해명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옥비와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아무 상관 없어요.”

    유신지가 지온을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그거 압니까? 지 소저는 거짓말할 때 더 자신만만하오.”

    “…….”

    ‘자신만만한 것도 잘못된 거였어?’

    유신지의 마음속에서 이미 대마왕으로 낙인찍힌 지온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지온은 그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 통정에 대한 옥비의 감정이 좀 미심쩍었어요.”

    유신지가 깜짝 놀랐다.

    “그 말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 통정도 무애해각에서 공부를 했었잖아요.”

    유신지는 단번에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폐하가 예전에 의안왕이었을 때에는 작위가 좀 높은 걸 빼면 어느 방면이든 루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지온이 두 손을 활짝 펴 보였다.

    “옥비가 매번 나를 괴롭혀서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데요!”

    유신지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외쳤다.

    “그런 거였군!”

    지온은 속으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하다 보니 일을 왜곡하기도 쉬웠다. 

    유신지는 아직도 그 대목에서 감탄했다.

    “옥비가 가짜일 줄은 몰랐소. 어쩐지 전에 옥비를 몇 번 봤는데 너무 평범해서 소문이 자자한 옥씨 가문의 규수와는 거리가 멀더군요. 미인박명이라더니, 안타깝게도 그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겠군.”

    지온이 말했다.

    “보는 건 어렵지 않아요. 거울을 보면 돼요.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만 빼면 공자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유신지가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진짜예요! 옥 소저가 여자들 사이에서 특별해 보이는 건 당신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예의를 차리기 때문 아니에요? 용모와 품성에 대해 말하는 건 전부 허구일 뿐이에요. 칭찬하려면 얼마든지 장점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유신지는 뜻밖에도 이 말에 설득되었다.

    “소저가 그렇게 말하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옥 소저와 가장 닮은 건 바로 지온 소저인 것 같구려!”

    이게 또 이렇게 엮인다고? 지온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디가 닮았는데요?”

    “용모와 품성이 모두 허구라고 말한 거 말이오. 잘 생각해 보면 소저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일하는 방식이 꽤 사내 같은 느낌이랄까요?”

    ‘공부하고 예절을 알고, 마장마술을 수련하고 육예(*六艺: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뽐내고, 기분 나쁘게 하면 사람을 죽여버리고…….’

    유신지는 몸서리를 쳤다. 갑자기 자신이 지 소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사내 같은 느낌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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