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0)화 (300/385)
  • 300화. 처분

    난택산방으로 돌아오자 대장공주는 능양진인을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능양진인은 오들오들 떨며 다시 그들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예전에 능양진인은 고인을 자처하며 황제를 대할 때도 무릎을 꿇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은 계속 무릎을 꿇고 거의 일어나질 못했다.

    능양진인은 정말 너무 무서웠다.

    자신이 화옥을 깔끔하게 독살한 것은 이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자신이 선황제를 해친 것은 아니지만, 선황제를 죽인 약은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후에 또 강왕부의 일을 도와주었고, 심지어 대장공주에게도 독을 먹였다. 자신에게 빚을 청산하라며 아무거나 한 가지 혐의만 들이대도 얼마든지 상대는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답답하구나, 원래 아주 잘 살고 있던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어버렸을까?’

    이 모든 것은 그 못된 계집애에게 미움을 샀을 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매일 목숨을 이어나갈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옥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맞아, 모두 옥비 그 못된 여자 때문이야. 내 목숨을 해치려 하고, 날 협박해서 나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놓게 했어. 진실을 알게 된 대장공주가 날 어떻게 할까? 날 직접 죽인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대장공주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몸의 온기를 되찾은 뒤, 능양진인에게 물었다.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능양진인이 깜짝 놀라 황급히 말했다.

    “마마,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빈도를 살려주십시오!”

    대장공주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를 살려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궁이 너를 믿을 수가 없다.”

    능양진인이 조급하게 말했다. 

    “빈도가 맹세하건대 무엇이든 두말없이 따르겠습니다. 게다가 빈도는 지온 사질의 약을 먹었기 때문에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습니다…….”

    지온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사숙, 옥비에게 한 번 속으시고도 또 그런 헛소리에 넘어가신 겁니까?”

    능양진인은 놀라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즉시 약의 맛을 떠올려보고는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사질, 그럼 아까 그 독이 가짜라는 말이야?”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혈열증(*血热之症: 혈액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치료하는 약인데 사숙께 이로울 겁니다.”

    능양진인은 기대치 않았던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아이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사질은 역시 마음씨가 착해. 사숙이 옳고 그름을 구별을 못 해서 전에 사질을 적대했었어…….”

    지온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숙, 감사 인사는 아직 이릅니다. 제 말은 아무 소용 없고 최종 결정은 어머니께서 하실 겁니다.”

    능양진인이 다시 대장공주를 향해 돌아서더니 빌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대장공주는 마음속에 혐오감이 일었다.

    “본궁이 너를 가만둔다 해도 언젠가 강왕부에서 네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을지도 모르지.”

    능양진인이 생각해도 그랬기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전하, 빈도는 곧바로 수행하러 떠나겠습니다. 앞으로 경성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대장공주가 냉소했다.

    “널 보내달라고? 본궁을 바보로 아는 게냐? 네가 그때 가서 뭘 할지 누가 안다고.”

    능양진인이 매우 다급하게 손을 들며 맹세했다.

    “빈도는 절대로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맹세를 어기면 날벼락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

    “부마(*驸马: 황제나 왕의 사위)께서 본적지(祖籍)에 안장되어 계시고 그 무덤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 본궁이 작은 도관을 하나 지을 테니 거기 가서 부마의 명복을 빌어라.”

    ‘살아남았어!’

    능양진인이 매우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기뻐하며 물러가자 지온이 물었다.

    “어머니, 정말 살려주시는 건가요? 사숙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라 살려두면 변수가 될까 걱정되는데요.”

    대장공주가 피곤해하며 말했다.

    “능양진인은 선제의 사인을 알고 있는 증인이야. 훗날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한 수 정도 남겨놓는 게다. 본궁이 능양진인의 곁에 몇 명의 무사를 같이 파견할 것이니, 문제가 있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아.”

    대장공주가 이미 방비를 다 해두어 지온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 * *

    다음날, 그녀는 정씨와 짐 정리를 한 뒤 서아를 비롯한 몇 명을 데리고 지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씨가 탄식했다.

    “너희 아버지가 임종을 맞아 나한테 당부하실 때, 나는 이걸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지.”

    지온이 바로 되물었다.

    “어머니, 전에 다치셨던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강왕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혹시 어머니께서 증거를 찾아서 그들한테 공격당하신 건가요?”

    인제 와서 숨길 필요도 없어 정씨는 지온에게 사실을 말했다.

    “아니, 그때 내가 따라간 사람은 소달이네.”

    지온은 어리둥절했다.

    “소달이요?”

    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달은 3년 전에 정해군에 있었네. 우리가 강왕부까지는 손을 뻗기가 어려워서 이 3년 동안 경성 안에서 소달의 내막을 알아낼 방법을 궁리했지.”

    지온은 바로 이해했다.

    무애해각을 습격한 해적은 정해군이 가장한 것이었고 소달은 그것을 집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큰 공을 세워 금군의 통솔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복수의 첫 단계는 소달을 죽이는 걸까?’

    지온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느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갑자기 창문 쪽에서 약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온은 잠시 멍해졌다.

    ‘조방궁에 살 때 가끔 루안이 이렇게 나타나긴 했지만, 그이는 오늘 집에 갔는데…….’

    망설이는 사이 창문에서 또 두어 번 소리가 났다.

    그녀가 일어나 창문을 열자 누군가 눈보라를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그였구나!’

    지온이 밖을 한번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쳤어요? 여긴 우리 가문의 저택이에요. 어머니께서 본채에 계신다고요!”

    루안이 눈웃음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꼭 조방궁에는 어머니가 안 계신 것처럼 말하시오.”

    지온은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조방궁에서 그녀가 묵는 곳은 희화원보다 작았다.

    밖에서 갑자기 문을 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일부러 내는 듯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창문 앞을 한 바퀴 돌더니 기침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구나! 괜히 걱정했나 보네!”

    이건 정씨의 목소리였다.

    지온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용기를 내 한밤중에 몰래 그를 만나는 것은 별일 아니었지만 그걸 들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씨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다시 닫히자 루안이 작게 웃으며 그녀를 껴안고 침대로 걸어갔다.

    “이것 봐, 옷을 너무 얇게 입었잖소. 빨리 이불로 들어가서 누웁시다.”

    지온이 그에게 안겨 걸어가며 큰 난로를 하나 챙겼다.

    지온은 좀 어색해하며 그를 쿡쿡 찔렀다.

    “뭐 하러 왔어요?”

    루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설마 내가 안 보고 싶었단 거요?”

    지온이 말꼬리를 잡았다.

    “보고 싶어도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설 명절 휴가 아니에요? 이번 제사를 다 지내고 별일 없으면 밖에서 약속하고 만나도 되잖아요.”

    “하룻밤도 더 기다릴 수 없었소.”

    옷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나자 그는 겉옷을 벗고 다시 껴안았다.

    “당신이 궁에 있었을 때, 모함당하면 어쩌나 내가 매일매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고나 있소? 만약 폐하께서 당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면 어쩔 거요? 옥비도 책봉했으니 비를 하나 더 책봉하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나는 절대로 당신을 그 사람한테 뺏길 수 없소.”

    지온이 이 말을 듣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왜 들켜요?”

    “말로는 설명이 안 되오. 어쨌든 황제가 당신을 너무 좋아하니까…….”

    “황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벌써 귀신이 됐어요!”

    지온이 가차 없이 말했다.

    “그분은 사실 나를 잘 몰라요. 황제가 좋아하는 건 그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뿐이에요. 그분은 내가 신랄하고 냉혹한 줄도 모르고, 내 마음이 독하고 악랄한 줄도 몰라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벌써 놀라서 도망갔을걸요.”

    황제의 성격을 떠올리자 루안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나는 신랄하고 냉혹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당신을 좋아하오.”

    지온의 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해요?”

    루씨 가문 넷째 공자는 고백을 항상 함축적으로 해서, 이렇게 열렬하고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루안이 그녀의 작은 귀를 만지며 말했다.

    “안 그럼, 당신을 누가 채가면 어떡하오?”

    지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던 관원들을 생각하면 그는 마음이 답답했다.

    ‘다들 눈치도 없나? 지온 소저는 내 약혼녀인데, 아직도 입궁시킬 생각을 하다니.’

    루안은 그 관원들을 잠시 미워하다가 마침내 지온에게 요 며칠의 일들을 물어보았다.

    지온이 궁 안에서 있었던 일을 한 번 이야기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옥비가 이렇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또 하나 사라졌네요.”

    루안이 지온을 껴안고 낮게 속삭였다.

    “다 자업자득이지. 어쩌면 그녀가 이 일을 이용하고 당신 신분을 도용한 것은 큰 죄가 아닐지도 모르오. 만약 조용히 은거하며 옥비마마로 살았다면, 우리도 그녀와 사이가 나빠지지는 않았겠지.”

    지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은 옥비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인지 그래도 아직 정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이윽고 지온은 심란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다시 조방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안은 이야기를 다 듣고도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이 일들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고 관련 단서도 있었다. 단지 이렇게 명확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태후마마께서 우리와 같은 배를 탄 셈이군?”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과 남편이 모두 그들에게 당했으니 당연히 복수를 원하시겠지요.”

    “좋소.”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궁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군.”

    때마침 지온이 소달의 일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의견을 구했다. 

    “소달을 먼저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는 강왕부의 앞잡이예요. 그가 사라지면 강왕부는 한쪽 팔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하지만 루안은 고개를 저었다.

    “소달을 제거하면 금군을 관리하는 사람을 바꿔야 하오. 만약 상부에 강왕부의 사람이 앉는다면, 지금보다 나을 것도 없소.”

    “그럼 어떻게 할까요?”

    “내가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요.”

    그가 이렇게 말한 이상 지온이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온이 모처럼 혼자 있는 기회가 생기면 늘 이런 일이 생겨 흥이 깨진다며 불평하자 루안이 혼례 준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저택에는 하인 몇 명만 있고 안마당과 바깥뜰의 구분이 없었소. 그런데 지금 어머니께서 사람을 시켜 구조를 바꾸셨지. 원래의 집은 시위와 참모들에게 주고 옆집을 뚫어 안마당을 만들고 거기에 우리 신방을 만들었소.”

    지온이 웃으며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양어머니께서 우리 집 옆집을 사고 싶어 하시는데 그 집들 사실 다 당신 집인 거 알아요. 어머니께 하나 드릴 수 있어요?”

    루안이 대답했다.

    “때가 되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적당한 가격을 제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온이 그를 때렸다.

    “적당한 가격이라니, 솔직히 말해봐요, 지금 우리 어머니를 벗겨 먹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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