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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99)화 (299/385)
  • 299화. 밝혀지다

    지온이 난택산방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태후는 대장공주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대장공주가 눈짓하자 매고고가 즉시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뭔가 구실을 붙여 왕 상궁을 불러들였다.

    태후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왕 상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물러나길 기다렸다 공당의 문을 닫자 지온이 입을 열었다.

    “나오십시오!”

    말이 떨어지자 노군상(*老君像: 노자(老子)의 신상) 뒤에서 슬금슬금 사람이 나왔다.

    태후가 자세히 보니 머리에 연화관을 쓰고 고공법복을 입고 손에 총채를 든 것이, 분명히 조방궁의 주지인 능양진인이었다.

    “능양주지?”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네가 어떻게…….”

    태후는 방금까지도 능양진인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능양진인이 수양을 하는 줄 알았지, 대장공주의 공당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평소에는 속세를 초월한 고인처럼 품위가 넘치더니, 어찌 오늘은 이리 위축되어 꼭 도둑놈 같은 모양새인 게야?’

    능양진인은 태후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빈도,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태후는 더욱 궁금해졌다. 

    ‘줄곧 고인을 자처하며 속세의 예의를 차리지 않더니, 왜 오자마자 큰절부터 하는 거지?’

    그녀가 대장공주를 쳐다보았다.

    “봉접, 자네 이게 무슨 꿍꿍이인가?”

    대장공주가 한숨을 쉬며 슬프고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올케, 이따가 저희가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셔야 해요.”

    태후는 어리둥절했지만, 마음속에 은근히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대장공주는 말을 마치고 능양진인을 향해 턱을 치켜올렸다.

    “말해라!”

    “예.”

    능양진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태후마마, 3년 전, 선황제께서 병으로 쓰러지시기 전에 강왕비가 빈도에게 어떤 향환을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깊게 잠들게 만들어 깨지 못하게 하는 향환을 말입니다…….”

    * * *

    태후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땅에 떨어져 옷자락을 적셨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능양진인을 바라보며 성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능양진인은 벌벌 떨면서 지온의 눈을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고 선황제께서는…….”

    태후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손가락으로 능양진인을 가리킨 채 입술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장공주가 이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온아!”

    지온이 한걸음에 달려가 태후를 부축하며 그녀의 손아귀를 힘껏 꼬집었다.

    태후는 통증 때문에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았으나 호흡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괜찮다.”

    지온이 손수건을 꺼내 태후의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닦고 다시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라 건네주었다.

    태후는 차를 두어 모금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능양진인을 바라보았다.

    “그 향환이 선제께 쓰인 게 확실한가?”

    능양진인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마, 선황제께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빈도가 가서 경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태후도 생각이 났다.

    “빈도가 그때의 향냄새를 기억하는데 선황제께서 병으로 쓰러지신 두 달 동안 그 향환을 계속 피웠습니다.”

    예전에 대장공주의 향환에 독을 넣은 것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이 비밀은 능양진인이 3년이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것이었다. 향환은 화옥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 둘 다 이 일을 알고 있었다.

    후에 화옥이 지온을 모함하여 죽음을 자초하자 능양진인은 그녀를 사문에서 쫓아내라는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능양진인이 어찌 화옥을 내보낼 수 있겠는가? 화옥의 성질머리로 미루어볼 때, 화옥이 조방궁 밖을 나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능양진인은 화옥에게 재빨리 독을 먹여 조방궁에서 죽게 했던 것이다.

    태후는 눈을 감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과 아들이 죽은 것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해왔지만,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마침내 그것이 사실임이 명확히 밝혀진 것이다. 

    선황제는 너무 애통하여 병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럼 태자, 태자도……!’

    “마마, 빈도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왕비가 요구하는 걸 빈도가 거절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빈도는 그 약이 선황께 쓰인 줄도 몰랐습니다…….”

    능양진인이 황급히 해명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숙, 일단 돌아가십시오.”

    능양진인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태후와 대장공주에게 질문하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대장공주가 짜증을 내며 꾸짖었다.

    “뭐 하는 게야? 썩 꺼지지 못할까?”

    능양진인은 마치 대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연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다.

    “마마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물러갔다.

    지온이 막 말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태후마마, 정씨 부인이 뵙기를 청합니다.”

    태후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매고고가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20대의 귀엽고 자그마한 부인이 손에 물건을 하나 들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지온이 놀라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이게……?”

    정씨가 무릎을 꿇고 신중하게 큰절을 하고 말했다.

    “신은 정씨 부인입니다. 남편은 지원(池元)으로 3년 전 어사대에서 근무하다 급사하였지요…….”

    태후가 지온을 바라보았다.

    “네 계모인 게냐?”

    지온이 대답했다.

    “예, 마마.”

    “자네들 도대체 뭐 하는 건가?”

    태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너의 부친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정씨가 전혀 이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 지온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태후마마, 저는 이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정씨가 비단 보자기에 싼 물건을 들어 올렸다. 

    “이것은 저의 남편이 3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남긴 물건입니다. 제가 3년 동안 조심히 보관했는데, 마침내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렇게 올립니다.” 

    “어머니?”

    지온이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저한테는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

    대부인 정씨가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너무 중요해서 그러네. 자네 부친께서 가장 중요한 때에 꺼내라고 말씀하셨거든.”

    지온은 고개를 돌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방안에 시중드는 궁녀가 없어 지온이 그 물건을 받아 태후 앞에 올렸다. 

    지온이 비단 보자기를 푸니 안에 단향목 상자가 있었다.

    지온이 그 상자를 열자 안에 피가 묻은 관인(官印)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상자 위에 쓰여 있는 글자를 자세히 비교해본 태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태후는 정씨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이 물건은 어디서 난 건가?”

    “무애해각에서 사고가 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제 부군이 가지고 있던 것을 찾아 보내주었습니다. 듣기론 해적이 갖고 있던 것이라 합니다. 애석하게도 부군이 돌아가시어 아직 쓰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태후는 눈을 감고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랬구나.”

    대장공주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올케, 이게 도대체……!”

    태후가 관인을 넘겨주었다.

    “자네가 직접 보게.”

    대장공주의 시댁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대장공주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색이 변했다.

    “정해군 지휘사의 관인이야!”

    정해군은 연해에 주둔한 군대로 정해왕이 이끌던 부대에서 바뀐 부대였다. 해적을 토벌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무애해각을 기습한 해적의 몸에서 정해군 해군 지휘사의 관인이 발견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관병들이 해적으로 위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태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편은 독살당했고, 아들은 살해당했다.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해친 원수는 그들이 남긴 황위에 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며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올케!”

    대장공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 일의 진상은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예요. 근이는 억울하게 죽었어요. 나는 일찌감치 그 해적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미쳐 날뛰며 오라버니마저 겨우 몇 달 만에 죽일 줄은 몰랐습니다…….”

    태후가 갑자기 관인을 움켜쥐고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올케!”

    대장공주가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지온이 앞으로 나가 태후를 반쯤은 부축하고 반쯤은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권했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대장공주가 물었다.

    “올케, 가서 뭐 하시려고요?”

    태후가 비분강개하며 말했다.

    “내 그들이 한 짓을 다 폭로할 것이야! 황제를 시해한 자는 황위에 앉을 자격이 없어!”

    “소용없어요!”

    대장공주는 냉정하게 말하며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았다.

    “근이는 이미 죽었고, 선황제도 땅에 묻혔으니, 우리 가문은 대가 끊겼어요! 설사 대신들이 진실을 안다 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태후가 멈칫하더니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렇구나, 그들이 두 과부를 도와 뭘 한단 말이냐? 어찌 되었든 황위에 누군가는 앉아야 한다.’

    지금의 종실은 강왕부이고, 강왕부 일가는 독립적이고 커서 저항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태후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정말 이렇게 그것들이 희희낙락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단 말이냐?”

    “물론 아니지요!”

    대장공주의 얼굴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냉정했다.

    “황제께서 남긴 황위는 누구라도 앉을 수 있지만, 우리 원수를 앉힐 수는 없습니다.”

    태후가 눈물을 거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장공주는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눈빛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요, 우리끼리 하면 돼요. 드러내놓고 할 수 없다면 은밀히 하면 됩니다.”

    “강왕부의 늑대 새끼들, 한 마리도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 * *

    저녁이 되자 태후는 울어서 빨개진 눈의 붓기를 가라앉히고 조방궁을 떠났다.

    대장공주는 궁관의 문앞에 서서 가마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지온이 조용히 권했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차니 얼른 들어가세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본궁은 찬 바람을 쐬며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안 그러면 마음속에 치솟는 불길이 너무 뜨거워 당장 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칼로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와 함께 서 있었다.

    대장공주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 있었다.

    지온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내일 제 새어머니와 함께 저희 집으로 돌아갈게요. 어머니, 여긴 괜찮겠지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너는 돌아가서 설을 보내거라. 혼인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난장판에 너를 끼어들게 할 수는 없지.”

    지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머니께서 복수하신다면 저도 같이 복수해야지요. 이건 다 저 자신을 위한 일이에요.”

    대장공주가 그녀를 쓱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 3년 동안 본궁한테 가장 기뻤던 일은 너를 만난 것이란다.”

    지온이 가볍게 웃었다.

    “저도 어머니를 만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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