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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98)화 (298/385)
  • 298화. 협박

    능양진인이 난택산방에 도착하자 지온은 대장공주를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매고고가 능양진인을 공당(供堂)으로 안내해주었고 거기서 능양진인은 지온을 기다렸다.

    처음 도착한 뒤 얼마간 능양진인은 침착했다. 속으로 자신은 하나하나 다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그 계집애가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자 그녀는 점점 초조해져서 토사구팽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조방궁의 주지를 바꾸는 일은 대장공주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 전혀 마음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청옥은 올해 일을 아주 잘했다. 사방전을 생동감 있게 꾸미고 다른 서무도 모두 능숙하게 처리하여 주지의 자리를 충분히 이어받을 만했다.

    하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그 계집애와 대립해서 몇 번이나 그 계집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했었다. 이제 옥비가 죽었으니 자신도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나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능양진인은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그래서 지온이 잡무를 마치고 들어오자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쿵, 꿇으며 지온을 붙잡고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질, 예전 일들은 내가 잘못했네.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 사질이 선심을 베풀어서 날 좀 살려주면 안 되나?”

    지온은 그녀가 잡고 늘어진 치맛자락을 보았다. 

    “이거 놓으십시오.”

    ‘새 치마인데, 찢어지면 자기가 물어준 건가?’

    그녀의 잔잔한 말투를 들은 능양진인은 혼비백산했다.

    ‘이 계집애는 남을 해칠 때 항상 이렇게 음침하게 굴었었지. 설마 정말 내 목숨으로 배상해야 끝나는 건가?’

    “지온 사질, 내가 이렇게 잘못한 걸 깨달았으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앞으로 내가 자네의 손과 발이 되어 이 큰 은혜에 보답하겠네!”

    지온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제 손과 발, 말입니까?”

    “그래, 그래!”

    희망이 보이자 능양진인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질이 분부만 하면 내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뭐든 하겠네.”

    지온이 코웃음을 쳤다.

    “능양사숙, 죽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시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시겠다고요? 독차 한 잔에 혼이 나가셨군요.”

    능양진인이 울먹이며 우겨댔다.

    “그건 음흉하고 교활한 옥비한테 속은 거야!”

    지온이 웃었다.

    “옥비가 확실히 음흉하긴 했지요. 하지만 사질에게는 그 방법도 아주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지온이 쓱 눈짓하니, 서아가 바로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아가씨, 가져왔습니다.”

    지온은 느릿느릿 품에서 도자기병 하나를 꺼내 검은 알약을 쏟아 찻물에 던져 넣었다.

    알약이 뜨거운 물에 천천히 녹아 혼탁한 액체가 되었다.

    지온이 턱짓을 했다.

    “이걸 마시면 사숙을 믿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능양진인은 믿기 힘들었다.

    “너……!”

    “못 드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온이 경쾌하게 말했다.

    “서아야, 갖다버려라.”

    “예.”

    서아가 대답하며 약차(藥茶)를 가져가려 했다.

    능양진인이 다급한 손길로 그녀를 덥석 잡았다.

    “서아 낭자, 잠깐만.”

    지온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드실 수 있겠습니까?”

    능양진인은 망설이는 눈빛이었지만 약간의 희망도 품고 있었다.

    “루 통정이 그 약은 비싸서 나 같은 사람한테는 절대 쓸 수가 없다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말했던 게 월월홍이지요? 그 약은 진짜로 비쌉니다. 궁정의 비약이지 않습니까! 제가 만든 이건 훨씬 싸게 만들어서 약효가 많이 떨어진 겁니다. 그러니 사숙께서 겁낼 필요 없습니다. 언젠가 사숙께서 말을 안 들으면 고생을 좀 할 뿐이지 꼭 죽는 건 아니니까요.”

    “꼬, 꼭 죽는 건 아니라고?”

    능양진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지온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능양진인은 눈을 꼭 감고 결심을 한 뒤 서아의 손에 있는 찻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약탕이 입에 들어가자 너무 써서 그녀는 눈물이 다 찔끔 나왔다.

    ‘어우우, 독약인데 좀 달콤한 맛으로 만들면 안 되나?’

    능양진인은 애써 약을 삼키고 기세등등하게 찻잔을 내던지며 말했다.

    “사질, 이제 믿어주는 거지?”

    지온이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살펴보며 물었다.

    “옥비가 사숙을 속이고 약을 먹여서 사숙께서 그녀를 배신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제가 준 약은 자진해서 드셨습니까?”

    능양진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옥비가 진짜 약을 먹이지는 않았지만, 일이 끝나면 내 입을 다물게 만들거라는 건 알고 있었네. 마치…….”

    “화옥처럼 말이죠?”

    능양진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지온이 웃음을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렸다. 입구 쪽에서 대장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네가 화옥을 독살한 것은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란 말이냐?”

    안으로 들어오는 대장공주를 보며 능양진인이 벌벌 떨었다.

    “마마, 빈도, 빈도…….”

    대장공주는 여유롭게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대장공주는 매고고가 건넨 차를 받아 마시지는 않고 그저 높은 곳에 앉아 능양진인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아직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게야? 네가 이 조방궁의 주지로 있으면서 화옥을 독살하고 본궁에게 독이 든 약을 준 것 외에 또 무슨 짓을 했느냐?”

    능양진인이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마마…….”

    지온이 연민의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사숙,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잡지 않으시면 내년 오늘쯤엔 제가 사숙의 영전에 술을 올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말 한 마디가 능양진인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대장공주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마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 * *

    태후는 지온이 출궁하자마자 대장공주가 입궁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봉접? 무슨 일 있는가?”

    예전과 달리 대장공주는 요즘 쉽게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장공주가 놀랄 정도라면 이건 분명히 뭔가 큰일이었다.

    대장공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올케, 조방궁에 한 번 오셔서 선황제와 근이의 명복을 빌었으면 해요.”

    태후는 어리둥절했다. 곧 소년(*小年: 음력 12월 23일 또는 24일)이라 궁에서는 조왕신의 제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봉접이 어째서 지금 내게 출궁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대장공주는 이유를 설명해 줄 마음이 없는지 잠시 앉아 있다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황제는 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대장공주를 만나 잠시 멈췄다.

    “고모님! 오셨으면서 어찌 조카도 안 보고 가십니까?”

    대장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몹시 화가 나셨다고 하기에 잠깐 보러 왔습니다. 폐하께서 근래에 바쁘신 것 같으니 이 고모가 방해할 수는 없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고모님께 한 번 오셔서 어머니를 좀 위로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볼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르신을 화나게 한 건 다 짐의 잘못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그걸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 그 옥비가 못된 짓을 한 거지요. 됐습니다.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고모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모님 안녕히 가십시오.”

    대장공주가 멀어지자 호은이 물었다.

    “폐하, 승원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화춘궁으로 가시겠습니까?”

    황제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청녕궁으로 가자. 어머니께서 기분이 안 좋으시다니 짐도 한번 가봐야겠다.”

    “예.”

    * * *

    황제가 청녕궁에 도착하니 태후는 불당에 정좌하고 있었다.

    황제가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정무는 다 처리했나요? 날씨가 추우니 자주 올 필요 없습니다. 괜히 길에서 추위에 떨지 말고요.”

    “어머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짐은 괜찮습니다. 그저 자주 와서 어머니를 뵙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황제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요 며칠 한층 야위신 것이, 짐이 불효한 탓인 것 같습니다. 짐이 소란을 피워 어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화낼 것이 뭐가 있겠어요.”

    황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머니께서 화가 난 것이 아니시라면 왜 이리 울적해하십니까? 혹시 짐이 뭘 잘못해서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태후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선황제를 꿈에서 뵈어 마음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황제가 잠시 멍해졌다.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4년이 다 되었다니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네요. 우리는 이리 활기차게 설을 보내는데 그분은 차디찬 저승에 계시겠지요. 그리고 근이 그 아이는 아직 장가도 못 들었는데…….”

    “어머니…….”

    태후가 눈을 들어 황제를 보았다.

    “순, 내 조방궁에 가서 두 사람의 명복을 빌고 싶어요. 가족과 함께 소년(*小年: 음력 12월 23일 또는 24일)을 보내고 싶습니다.”

    황제가 태후를 보니 태후의 머리카락이 반쯤 하얗게 세었고 눈가에 주름도 많아져 눈 주변이 온통 거무스름했다.

    황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 황후가 단정하고 온화한 부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이 약해져 말했다.

    “짐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태후가 자애롭게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폐하의 마음은 내가 잘 알아요. 하지만 궁에서 하늘에 제사도 지내야 하고, 또 연말에 정무가 그리 많은데 낼 시간이 있겠습니까? 내가 폐하를 방해하면 안 되지요. 내가 다른 데 가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폐하의 고모가 있지 않습니까.”

    황제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 * *

    이튿날, 태후의 가마가 조용히 궁문을 나섰다.

    조방궁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여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태후는 가마에서 내려 청옥의 접대를 받으며 각 전(殿)마다 한 칸씩 다 절을 한 뒤 마지막에 사방전에 도착했다.

    지온이 사방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직접 태후를 안내했다.

    “태후마마.”

    태후는 그녀의 손에 있는 향을 받아 화신마마를 향해 삼배를 드렸다.

    궁녀가 향로에 선향을 꽂은 뒤에 태후가 떠나려는데 지온이 말했다.

    “마마, 저희 사방전의 화신첨이 아주 영험합니다. 이번 달에 아직 당첨된 사람이 없으니 한번 해보십시오.”

    태후는 첨 같은 것을 뽑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온은 다짜고짜 첨통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

    첨통을 손에 쥐었으니 흔들어서 아무거나 뽑으면 되었다. 태후는 첨통을 잡고 아무렇게나 흔들었다.

    빽빽한 첨통에서 찰찰 소리가 나더니 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첨을 주운 청옥의 얼굴에 놀랍고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태후마마, 화신첨에 당첨되셨습니다!”

    태후가 어리둥절해하며 청옥이 건네준 첨을 보았다. 위에는 텅 비었고 끝부분에만 꽃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화신첨이냐?”

    그녀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예.”

    지온이 웃음을 머금고 첨통에서 다른 첨을 꺼냈다.

    “보십시오, 이것들은 모두 꽝입니다. 위에 꽃이 없습니다.”

    태후는 첨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정말 다른 첨들에는 어떤 표시도 없었고 그제야 그녀는 믿는 눈치였다.

    “태후마마 축하드립니다. 화신첨에 당첨되신 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소원을 이루셨습니다.”

    지온이 말했다.

    태후가 고개를 돌려 왕 상궁을 쳐다보았다.

    왕 상궁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 지온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이 화신첨이 생긴 후로 당첨된 사람은 전부 소원성취를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당첨된 사람은 원 재상댁의 며느리입니다. 얼마 전에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

    태후의 얼굴에 드디어 약간의 웃음기가 돌았다.

    “내게 기쁜 일만 있기를 기원하지.”

    태후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궁녀들이 그녀를 부축해 사방전에서 나갔다. 지온은 그 화신첨을 청옥에게 건네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꿔와요.”

    “예.”

    청옥은 잽싸게 제사상 밑에서 똑같은 꽃무늬 첨을 꺼내 첨통에 넣고 태후가 뽑았던 것은 소매에 쑤셔 넣었다.

    당첨될 확률을 낮출 수 있으니 당연히 높일 수도 있었다. 그저 가벼운 손장난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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