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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97)화 (297/385)
  • 297화. 화풀이하다

    저녁 식사가 차려지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물러갔다.

    태후는 그녀가 울적한 표정으로 젓가락만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옥비를 생각하고 있느냐?”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신녀가 아침에 옥비마마를 보러 갔을 때는 그런 뜻이 없어 보이셨는데, 어째서…….”

    사실 옥비는 대들보에 목을 매 자결한 것이 아니었다. 왕 상궁이 일부러 와서 보고한 것은 태후가 사사(賜死)를 명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태후의 표정은 냉담했다.

    “네가 간 후에 폐하께서 옥비를 보러 가셨다.”

    지온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폐하의 여린 마음을 이용해 목숨을 건지면 앞으로 또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 차라리 자결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편이 낫다.”

    지온은 잠시 침묵하다가 동의했다.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식사하자.”

    “예.”

    * * *

    옥비가 후궁에서 일으킨 풍랑은 아주 빠르게 가라앉았다.

    석 자 흰 비단과 낡은 돗자리 하나가 바로 옥비의 귀착점이었다.

    활기찼던 영수궁은 이틀 만에 풍비박산이 났고 궁녀와 내시는 벌을 받거나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었다.

    지온은 마음이 무거웠다.

    옥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그날 밤 의안왕을 찾아갔고 아마도 거기서 강왕부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무애해각에 큰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미리 말을 했다면 적어도 몇 사람은 덜 죽지 않았을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답이 없었고, 이미 발생한 일도 바꿀 수 없었다.

    * * *

    태후는 이상하게도 며칠 더 지온을 붙잡아 두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지온에게 경을 읽으라고만 시켰다.

    연말이 가까워져 지온이 먼저 작별을 고하자 태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한참 동안 궁에 있었으니 집이 아주 그립겠지. 게다가 소년(*小年: 음력 12월 23일 또는 24일)도 가까워졌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려무나.”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간 태후의 보살핌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인사치레가 끝났는데도 태후는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지온 소저, 전에 내 병을 근본부터 고치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

    “예.”

    지온이 대답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마마께서 잠을 잘 못 주무시는 이유는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남아있는 한 화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태후가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가보아라.”

    “신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이튿날 지온은 왕 상궁의 배웅을 받으며 궁을 나섰다.

    태후는 지온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수레 한가득 선물을 하사하여 아침 정무를 보려고 기다리던 신하들의 눈에 띄게 했다.

    “이건 어느 집 아가씨 건가? 이렇게 태후께 귀염을 받다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옥비가 사라졌으니 이 궁에도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 태후께서 들어올 사람을 살펴 봐주시면 그런 일이 또 생기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몇 명의 신하가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떠들고 있는데 옆에서 듣던 사람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대인들 오해하지 마십시오. 출궁하신 분은 지 재상의 직계 손녀이자, 대장공주의 양녀이신 분으로 이미 약혼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 재상…….”

    “대장공주…….”

    “설마?”

    길게 늘어선 줄의 맨 앞에 서 있던 루안이 조용히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했다.

    “대인들께서 수고스럽게도 걱정해주신 지온 소저와 약혼한 사람이 바로 본관입니다.”

    관리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사과했다.

    * * *

    지온은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전혀 모른 채 조방궁으로 돌아갔다.

    대장공주와 대부인 정씨가 지온을 보고 한참을 다정하게 인사했다.

    “네가 가고 나니 조방궁이 텅 빈 것 같더구나. 아주 심심했어.”

    대장공주가 한탄했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뭐 얼마나 있다 왔다고 그러세요. 어머니, 너무 과장하지 마세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렇게 말하니 본궁이 좀 슬프구나! 네가 시집가면 조방궁은 재미가 하나도 없지 않겠어?”

    정씨가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이가 시집을 가면 저도 따라갈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지온에게 물었다. 

    “계모가 시가까지 따라가면 좀 그러려나?”

    지온이 손을 흔들었다.

    “저는 동생도 없고 집에는 어머니 한 분만 계시잖아요. 시집가면 당연히 같이 가야지요. 안 그런가요?”

    정씨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게 도리에 맞지!”

    대장공주는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본궁은…….”

    대장공주가 입을 열자마자 매고고가 무자비하게 말을 끊었다.

    “전하, 전하께선 어엿한 대장공주이십니다. 어찌 신하의 집에서 살겠습니까?”

    대장공주가 얼굴을 구기며 달갑지 않다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본궁은 온이와 함께 살 수 없는데 곽여단은 도리어 시어머니라고 위세를 부리겠구나. 그 비천한 여자가 너무 날로 먹는 것이 아니냐! 안 돼, 본궁이 너무 손해야. 아니면 이 혼사를 취소해버릴까? 만약 루씨 가문 넷째가 싫다 하면 그놈보고 여기로 시집오라고 해라!”

    지온이 말했다.

    “양어머니께서 신하의 집에 사실 수는 없겠지만, 양어머님 소유의 집에는 살 수 있으시잖아요! 루안의 옆집이 비어있으니 어머니께서 그 집을 사서 아예 별원으로 삼으시는 게 어떠세요? 벽을 허무는 게 그리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집 한 채에 문이 두 개가 되는 것 아니냐?”

    대장공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래, 좋구나! 당장 사람을 불러서 사라고 해야겠다!”

    지온이 빙그레 웃었다.

    그 집은 아마도 살 수 없을 터였다. 그 집문서를 루안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장공주의 요청이니 그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 잡담을 나눈 뒤 대장공주는 궁인을 물리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옥비를 무너트리다니.”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정말 저랑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사실은 태후마마께서…….”

    지온이 사건을 대강 한번 얘기했다. 대장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태후가 나섰다니…….”

    지온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마음이 흔들리긴 하셨지만, 아직 결심은 내리지 못하셨어요.”

    대장공주가 말했다.

    “성지의 내용을 들어보니 태후마마께서 폐하께 불만을 품은 것이 느껴지더구나.”

    지온은 매우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대장공주가 입가를 잡아당기며 하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옥비의 사칭 사건을 공표한 건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린 것이지.”

    이 성지가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지온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옥비의 일은 후궁의 추문이라 황제는 함부로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지가 내려지자 이러한 그의 생각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옥형 선생은 온 나라에 가득할 정도로 문하생이 많아서 적지 않은 조정의 관원들이 그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나중에 옥비의 명성에 흠이 생겨도 그들은 한 마디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성지가 내려지고 진상을 알게 된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옛 하녀가 옥씨 가문 큰아가씨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런 음흉한 짓을 하다니!’

    ‘은사께서는 반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시다가 마지막에도 학생을 보호하다 돌아가셨다. 지금 누군가 손녀의 명성을 짓밟고 있다면, 은사께서 어찌 저승에서 편안하시겠는가?’

    ‘이건 안되지, 옥씨 가문의 명성을 반드시 회복해야 해!’

    그리하여 지온이 궁에 남아있는 며칠 동안 옥비가 옥 소저를 사칭한 일이 그들의 입을 통해 곳곳으로 퍼졌다.

    황제는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문인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 황제도 어쩔 수 없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소식이 그렇게 빨리 전해진 것은 지난날 그가 사형이라고 불렀던 신하들의 항의 때문이었다.

    ‘황제께서도 무애해각에서 공부하신 적이 있으시면서 어찌 스승의 명예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이리 무정한 것은 명군의 태도가 아닙니다!’

    지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사숙들께서 정말 옥비에게 화풀이를 하셨구나!’

    * * *

    소년(*小年: 음력 12월 23일 또는 24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온에게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지온은 궁녀를 불러 낙영각(落英阁)에 가서 말을 전하라고 시켰다.

    그때, 능양진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안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옥비가 무너졌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다행스럽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했다.

    다행히 제때 발을 빼 옥비의 일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나중에 숙청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온만 생각하면 능양진인은 모골이 송연했다.

    그 못된 계집애는 화근이라, 그 계집이 있는 곳에서는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사저가 처음에 했던 판단은 정말 정확했다. 그 계집애는 여자였지만 늑대도 때려잡을 상이어서, 남겨 두면 재앙만 초래할 뿐이었다. 9년간의 유람은 안타깝게도 그 계집의 살기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그 계집에게 괴상한 재주를 배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능양진인은 마음이 답답했다. 

    ‘대체 살기를 없앤 거야 아니면 액운을 키운 거야?’ 

    이 계집애는 지금 대장공주에게 달라붙어 있고, 또 흉악한 약혼자가 그 계집을 지지해 주고 있으니, 자신은 그저 한쪽에 쪼그라져 있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사부님!”

    능양진인은 넋 놓고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불리자 깜짝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호되게 꾸짖었다. 

    “허둥지둥 뭐 하는 거야? 똑바로 말해!”

    제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사부의 성격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말했다.

    “난택산방에서 사람이 와서 한번 들르시라고 합니다.”

    능양진인이 급히 일어나 외관을 정돈하며 물었다.

    “대장공주마마께서 부르시는 건가? 경전을 강의하라고?”

    제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우물거리지 말고.”

    “예.”

    제자가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지온 사저가 막 돌아왔는데 지금 난택산방에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사저 일지도…….”

    능양진인이 놀라서 소리쳤다.

    “사질이 돌아왔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제자는 억울했다.

    “전에 사부께서 오늘은 수행해야하니 함부로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됐다, 됐어. 이러나 저러나 다 내 잘못이지.’

    능양진인은 속이 시끄러워서 제자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좀 초췌한 것을 빼면 그럭저럭 괜찮아서 먼지만 털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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