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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96)화 (296/385)
  • 296화. 미쳤다

    황제는 벌써 한참을 복도 저편에서 서 있었다. 

    호은이 이미 여러 번 재촉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나중에는 감히 더 이상 재촉할 수 없었다.

    그는 이 길을 지나가면 냉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발을 뗄 수 없었다.

    한참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저쪽에서 우산을 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호은은 황제가 느닷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폐하?”

    황제가 그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저건 누구냐?”

    호은이 목을 길게 빼고 보았다.

    그 사람은 여우 가죽을 덧댄 비단옷을 입고 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눈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궁의 마마님이시지? 좀 낯이 익은데…….’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호은이 소리쳤다.

    “지, 지온 소저?”

    그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온 소저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가 머릿속으로 추측해 본 사람은 전혀 지온 소저가 아니었다!

    황제의 표정은 풀렸지만, 지온을 바라보는 눈빛은 씁쓸했다.

    “폐하?”

    지온이 놀라서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폐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녀가 실례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냉궁에 갔다 왔느냐?”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날씨가 너무 추워서 태후마마께서 신녀에게 냉궁에 가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참 인자한 분이시지.”

    지온은 웃어 보이고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는데 그가 갑자기 물었다.

    “너 조금 전에 왜 옥비의 걸음걸이를 따라 했느냐?”

    황제의 질문이 꽤 날카로웠다. 호은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급히 지온을 살펴보았다. 

    ‘폐하, 옥비마마를 잃으신 지 얼마 안 되셨더라도 순간에 잘못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분은 이미 약혼했고, 신하의 아내를 강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지온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폐하, 송구하오나, 신녀가 고의로 그리했습니다.”

    호은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런 거야? 폐하께서 마음이 허한 틈을 타서 이렇게 유혹한다고? 이걸 막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내가 막아야 하나? 폐하의 명성을 위해서는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내시일 뿐이잖아. 간언은 내가 할 일도 아닌데…….’

    그가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지온이 말을 덧붙였다.

    “……옥비마마께서 태후께 불경을 저질러 신녀가 일부러 좀 놀라게 했습니다.”

    호은이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이 아가씨야, 좀 빨리 말해주면 안 돼? 폐하를 유혹하는 줄 알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잖아.’

    황제는 어리둥절했다.

    “왜 옥비를 놀라게 하는가?”

    지온이 말했다.

    “신녀, 루 통정으로부터 무애해각의 일을 들었습니다. 옥비마마께서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사칭했다는 것을 알고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전에 마마 몇 분을 모시고 조방궁에 가서 복을 빌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옥비마마께서 신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녀가 어떤 분을 닮았다고요.”

    황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그는 지온의 두 눈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안 닮았는데!”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루 통정께서도 안 닮았다고 하셨는데 어째서인지 옥비마마께서는 닮았다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아마도 신녀가 옥 소저께 다도를 배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녀를 본 적이 있느냐?”

    지온이 겸연쩍게 웃었다.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일찍이 신녀를 데리고 상해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녀는 그때 그 분이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실제로는 인사 한 번 나눈 정도의 인연이었습니다.” 

    황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정말 인연이긴 하구나.”

    “그렇지요! 사실 신녀는 그 일이 기억도 잘 안 날 지경이라 옥비마마께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번 저와 마주칠 때마다 옥비마마께서는 정말 이상하게 구셨습니다. 지난번에는 갑자기 신녀에게 루 통정이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좋아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황제의 마음은 더욱 미묘해졌다.

    “그래? 그럼 너는…….”

    “신녀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어제 비로소 옥비마마께서 저를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황제는 눈빛이 흔들렸지만 말은 없었다.

    “신녀가 옥씨 가문의 아가씨를 닮아서 옥비마마께서 저를 싫어하신 것 같습니다.”

    지온이 진지한 말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황제가 말했다.

    “알았다. 눈이 많이 내렸으니 지온 소저는 얼른 돌아가거라.”

    지온이 몸을 낮추고 예를 표했다.

    “예.”

    황제는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이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더 이상 옥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폐하?”

    호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았다.

    “돌아가자.”

    호은은 안도했다.

    “예.”

    두 사람이 채 두 발자국도 떼기 전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호은이 뒤를 돌아보자 늙은 궁녀가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들을 보고 놀라 잠시 당황하다가 전전긍긍하며 인사를 올렸다.

    “소인, 폐하를 뵙고, 호 총관을 뵙습니다.”

    호은이 냉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급하게 어딜 가는가?”

    늙은 궁녀가 대답했다.

    “총관님, 옥 서인이 폐하를 만나게 해달라며 소인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소인이 해주지 않자 그릇을 깨서 손목을 그으려 했습니다. 소인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어서 내감을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냉궁에서 일하는 늙은 궁녀는 직급이 높은 내감을 절대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밖에서 황제와 부딪히다니 옥 서인은 참으로 운도 좋았다.

    황제는 잠시 멍하게 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이 늙은 궁녀의 입에서 나온 옥 서인은 바로 옥비였다.

    “폐하, 소인이 한번 가볼까요?”

    호은이 지시를 청했다.

    황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한가하니 짐이 가서 또 뭐라 하는지 들어 봐야겠다.”

    호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는 역시 마음이 약하시군. 옥비는 왜 감사할 줄을 모르는 걸까? 조금만 조심했으면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 * *

    옥비는 원망 어린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바깥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눈에 반짝하고 희망이 스쳤다.

    “폐하!”

    방문이 열리고 정말로 황제가 들어왔다.

    옥비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앞으로 달려갔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린 듯 도중에 멈추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폐하…….”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황제의 분노가 서서히 식어갔다.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 전에는 어째서 옥비가 종화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하나도 안 닮았는데. 종화라면 이렇게 추태를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녀였다면 죽을 때도 전처럼 침착했겠지.’

    옥비가 오열하며 애원했다.

    “폐하, 신첩은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신첩이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신첩이 폐하를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폐하!”

    황제는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알겠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옥비는 당황했다. 황제의 반응이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녀가 황급히 맹세했다.

    “폐하, 아가씨가 바다에 빠진 것은 신첩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가씨가 아마 화살을 피하려고 떨어졌을 겁니다. 신첩이 바로 구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신첩이 거짓말을 한다면 비명횡사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황제가 하는 말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이거라면, 짐은 그만 돌아가야겠다.”

    “폐하!”

    황제가 돌아서 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옥비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닙니다! 신첩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씨의 행방과 관련된 일입니다!”

    황제가 드디어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가씨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갑자기 황제의 안색이 변하더니, 동공이 움츠러들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라고?”

    마침내 황제의 감정이 동요하자 옥비가 웃음 지었다.

    그녀는 그가 이 일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덥석 잡았다.

    “죽지 않았다니, 그럼 어디에 있단 말이냐?”

    옥비는 그에게 잡혀서 너무 아팠지만,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말했다.

    “지온 소저, 그 지온 소저가 바로 아가씨입니다!”

    황제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마치 찬물을 머리 위로 쏟아부은 것처럼 마음속에 치솟았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그는 손을 놓고 차가운 눈빛으로 옥비를 바라보았다.

    ‘지온 소저의 말이 맞았어. 이 여자는 정말 미쳤구나.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어찌 같은 사람이라고 한단 말인가? 대체 마음속으로 얼마나 옥종화를 미워했길래, 겨우 그 정도 닮은 것을 다 기억해두었단 말인가.’

    “폐하?”

    옥비는 황제의 감정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신첩을 믿지 못하십니까? 정말입니다! 아까 지온 소저가 직접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우리를 미워해서 고의로 신첩을 해치고 또 폐하를 해치려는 것입니다, 폐하!”

    황제가 그녀의 손을 비틀어 뿌리쳤다.

    “직접 그렇게 말했는가?”

    “예! 신첩을 의심하고 멸문당한 피맺힌 원수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폐하, 가만두시면 안 됩니다.”

    황제가 담담하게 물었다.

    “짐에게 그 아이를 죽이라는 말이냐?”

    옥비는 연거푸 정신적인 자극을 받아 점점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강왕부에서 한 짓인 것을 알고 복수하려 합니다. 폐하께서 지금 죽이지 않으시면 나중에는 폐하가 죽을 겁니다!”

    황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넌 역시 종화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어쩐지 지온 소저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더라니. 참으로 짐의 안목이 그릇된 것이었구나. 네가 종화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줄 알고 더 어여삐 여기고 사랑했는데, 이것이 백안랑(*白眼狼: 배은망덕한 사람을 비유)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었다니.”

    표정이 굳어진 옥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황제가 뒤돌아 나가려 했다.

    옥비가 황제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폐하! 신첩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 아이가 그날 밤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호은이 그녀를 막으며 분부했다.

    “우두커니 뭐하고 서 있느냐? 옥 서인이 미쳤다. 빨리 사람을 불러와!”

    늙은 궁녀가 황급히 대답한 뒤, 궁녀 몇 명을 불러와 옥비를 묶었다.

    옥비는 황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절망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완전히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지온은 청녕궁으로 돌아와 냉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 태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어 지온이 태후를 모시고 식사를 하려는데 왕 상궁이 와서 보고했다. 

    “마마, 옥 서인이 목을 매고 자결했습니다.”

    지온은 충격에 휩싸여 과거를 떠올렸다.

    옥비가 실성한 꼴이 조만간 일을 저지를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랐다.

    반면 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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