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95)화 (295/385)
  • 295화. 감을 잡다

    지온이 찻잔을 내려놓고 웃기 시작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지금 지온의 표정과 말투는 그날 영수궁에서 차를 마실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날의 지온은 옥비의 몇 마디 말에 주눅이 드는 것이 아주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아무렇게나 차를 마시고 있는 지금의 지온은 옥비에게 황제보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한 그 말이었다. 그 말은 옥비가 서원을 그만뒀을 때, 아가씨가 했던 말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아가씨는 죽었어, 이미 죽었다고!”

    뒤로 갈수록 옥비는 고함을 지르며 저 자신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마치 악귀라도 본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온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놀란 표정을 감상했다.

    “아직 나를 잊지 않았구나, 금벽아.”

    이 한마디가 마치 주문처럼 기억의 문을 열었다.

    옥비는 등이 벽에 닿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말도 안 돼! 아가씨는 죽었어! 네가 아가씨일 리가 없어! 루안이 말한 거 아니야? 일부러 나를 놀라게 하려고!”

    지온이 차가운 눈길로 옥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어떻게 감히 날 사칭했어? 이거 봐, 넌 일을 할 때 항상 계획이 없어. 내가 너라면 궁에 들어가도 옥종화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는 않았을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옥비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며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십여 년이나 아가씨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아가씨의 표정과 말투는 죽을 때까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아가씨는 분명히 죽었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다녔는데도 못 찾았잖아. 하물며 생김새와 나이도 다 다른데!’

    지온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목표가 너무 크기 때문이야. 옥종화는 옥형 선생의 손녀딸이자 태자비가 될 뻔했던 사람이야. 만약 황위의 계승자가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마 황후 자리에 앉아 있었겠지. 이런 사람이 궁에 들어오면 황후가 경계하지 않겠어? 후궁들은 두렵지 않겠어?”

    “너, 너……!”

    옥비가 지온을 가리키며 벌벌 떨었다.

    “네가 막 입궁했을 때 왜 황후와 현비, 신비가 왜 모두 너를 상대해주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지? 폐하께서 너를 총애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더 큰 이유는 옥씨 가문의 명성 때문이었지. 나무가 크면 바람도 많이 맞게 마련이거든.”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름이야 쓰려면 쓸 수도 있지,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니까. 그 세 사람도 나중에는 너하고 별로 다툴만한 것도 없다는 걸 알아서 그만둔 거지. 그럼 너는 아마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을 거야. 

    얼마 안 있어 황자를 낳으면 여생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겠지. 못 낳는다고 해도 뭐가 문제였겠어, 폐하가 하루라도 더 살아 계시면 너도 하루 더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인데. 황제가 돌아가시고 나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고 해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해도 될 만한 삶이지. 그런데 넌 만족할 줄 모르고 황제의 유일한 여인이 되려고 했어.”

    지온이 어둡고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금벽아,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 네가 잘하지 못하는 일은 나서서 하지 말라고. 되도록 적게 하고 적게 실수하고, 아예 하지 않는 것도 괜찮다고 했었지.”

    옥비, 아니 금벽은 분명 머리가 좋지 않음에도 기어코 계략을 쓰려고 했다. 그러니 어찌 신비와 태후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옥비가 입술을 떨며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정말 아가씨가 맞군요. 정말 아가씨야!”

    지온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구나! 삼 년 동안 잘 지냈지?”

    옥비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전 그저 아가씨의 신분을 빌린 것뿐이에요. 아가씨에게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어요. 왜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일부러 그러는 거 맞죠? 능양주지가 아가씨에게 매수당한 거 맞죠?”

    “맞아.”

    지온이 평온하게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무슨 양기를 축적하는 약방문도 내가 사숙을 시켜서 보낸 거야.”

    옥비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

    그녀는 그 약방문 때문에 황자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후궁의 비빈에게 약을 쓰고 그 뒤의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저 내가 운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처음부터 계략에 넘어간 것이었단 말인가?’

    “왜? 저한테 왜 그래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우애 깊은 자매였잖아요?”

    지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네가 나를 자매로 생각했니? 그날 조방궁에서 내가 너한테 차를 대접했을 때 넌 어땠지? 내가 옥종화와 닮았다는 걸 알고 날 죽이려고 했지? 그 뒤에도 계속 이간질하면서 내가 괴로워하길 바랐고…….”

    “그건 제가 그게 아가씨인 줄 몰랐기 때문이에요!”

    옥비가 소리쳤다.

    지온은 비웃었다.

    “핑계 대지 마. 넌 옥종화라는 이름을 원하면서도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사라지길 원했어. 네가 감히 자매의 정을 언급할 자격이 있어?”

    옥비는 입을 쩍 벌리고 눈만 껌뻑거렸다.

    지온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담담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런 하찮은 일들은 지나가면 그만이야. 그보다 지금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날 밤 해적들의 습격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옥비는 눈을 크게 뜨고 죽일 듯이 지온을 노려보았다.

    지온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몰랐다고 하려고? 내가 기억하기론 너는 그날 밤 계속 어딜 갔는지 안 보이다가 난투가 벌어질 때쯤에야 내 옆에 나타났어. 그동안 어디 갔었어?”

    옥비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저, 저는 그냥 잠을 깊이 잤을 뿐이에요…….”

    지온이 차갑게 웃었다. 

    “얼버무리려거든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지. 그날 밤 사고가 났을 때, 루안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렀어.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넌 계속 자고 있었다고?”

    웅크리며 침대 위로 무너져내리는 옥비의 모습은 아주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전 그냥 무서워서 숨었을 뿐이에요.”

    지온이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때 너는 방안에 없었어. 맞지?”

    옥비가 얼굴 근육을 움찔하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방에 있었어요!”

    “그럼 왜 반박을 안 해? 그날 루안은 사람들을 부르러 간 적이 없어. 제일 먼저 태자를 보호하러 갔거든. 사람들을 부른 건 하 사숙이야.”

    옥비는 그랬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지금 나를 떠본 거예요?”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인정하는 거야? 너 혹시 기밀을 누설했어?”

    “아니에요!”

    옥비가 소리쳤다.

    “저는 단지 의안왕을 찾아갔을 뿐이에요! 그날 밤 일어난 일은 나랑은 상관없어요!”

    이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지온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밤중에 의안왕을 찾아가서 뭘 했는데?”

    옥비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더니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지온은 갑자기 의안왕이 서각에서 자신의 앞을 막았던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

    “의안왕이 나한테 고백하려 했던 거구나! 넌 미리 알고 있었지?”

    옥비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지온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네가 의안왕의 곁에서 기웃거렸구나. 확실히 그때 나는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 때가 되면 네가 빈틈을 노릴 수 있었겠지. 정비까지는 못 되더라도 우리 할아버지 신분을 고려하면 측비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거야. 생각은 제대로 했네, 근데 평소에 공부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귀에 거슬려 옥비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가씨는 제가 아니잖아요. 제 어려움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가씨는 명문가 출신이고 미모와 재능을 다 갖춰서 황실에서까지 혼담을 넣었어요. 그런데 저는요? 오래된 시종의 딸에 불과한 저는 집안 형편도 좋지 않고 아가씨보다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못했어요. 스스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좋은 혼처가 있을 수 있었겠어요?”

    지온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혼사가 뭔데? 태자비? 왕비? 그래야 좋은 혼사인 거야? 무애해각에 있을 때 너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몇 있어서 할아버지께 혼담이 들어온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들이 모두 젊고 재능도 뛰어난 청년들이라고 하셨어. 인품과 재능 어떤 면에서 봐도 모두 최상이었는데 네가 한 마디로 거절했잖아.”

    옥비가 변명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가문이 미천했잖아요…….”

    지온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중에 지주(*知州: 주(州)의 장관)댁의 공자도 있었는데, 가문이 보잘것없다고?”

    옥비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미천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나 같은 시종의 딸한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가씨라면 시집갈 수 있겠어요? 지금과 같이 만약 선대 태자께서 살아계시고, 폐하께 또 황후가 생겼다면 아가씨는 루 통정한테 시집갈 수 있어요?”

    지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 황후가 되려 한다면 중궁전에 주인이 있는 게 뭐가 대수야? 됐다. 너한테 이런 말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지. 생각을 좀 해보자, 의안왕이 그날 밤 일찍 피했고 만약에 네가 그 전에 미리 그를 찾아갔으면…….”

    그녀가 힐끗 보았다.

    “너 그날 밤에 바로 안 돌아왔는데, 뭘 본 거 아니야?”

    옥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를 덜덜 떨었다.

    “말 안 할 거야?”

    옥비가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제가 왜 말해야 하는데요? 설마 아가씨가 저를 냉궁에서 내보내 주기라도 할 건가요? 아무 이익도 없는데 제가 뭣 하러 아가씨를 돕나요!”

    “그건 그렇네.”

    지온이 잠시 생각해 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럼 말하지 마.”

    그녀가 망토를 묶으며 진짜로 가려 하자 옥비는 깜짝 놀랐다.

    “정말 안 물어볼 거예요?”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네가 무슨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난 벌써 누가 배후에 있는지 감을 잡았어. 너한테 물어보러 온건 그저 한번 검증해보고 싶어서였을 뿐이야. 네가 말을 안 한다고 내가 설마 복수를 하지 않을까?”

    옥비의 얼굴색이 변했다.

    “복수할 거예요?”

    “뭘 그렇게 놀라? 복수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지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아버지의 목숨, 스승님들의 목숨, 사숙들의 목숨을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않겠어? 살인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지!”

    옥비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가씨는 복수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아가씨가 당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지온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그저 피식 웃고는 나가버렸다.

    “거기 서요! 거기 서!”

    옥비는 마음이 급해 맨발로 뛰어나왔다. 찬 바람이 불어 그녀는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넌 지금 득세하고 곧 좋은 남편에게 시집도 가는데 왜 나한테 맞서려고 하는 거야? 질투하는 거지? 시종의 딸을 질투하는 거야. 너보다 더 높게 올라가서, 네가 나한테 무릎 꿇고 절을 하게 해서, 그렇지?

    지온이 뒤를 돌아 옥비를 쳐다보았는데 내리는 눈발만큼이나 눈빛이 차가웠다.

    한참 있다가 지온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마마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신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옥비는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이고 깍듯이 예를 올린 후 뒤돌아 떠나는 지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 서! 거기 서라고! 거기 서라니까……!”

    옥비가 문틀에 기대어 미끄러지며 땅으로 주저앉았다. 어느새 얼굴에 온통 눈물이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