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94)화 (294/385)
  • 294화. 파멸

    금벽은 그저 고개만 젓고 있었다.

    “아니에요, 마마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라고요. 당신들이 마마님을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작정한 거죠. 다 당신들이…… 추아야! 말 좀 해봐! 마마께서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왜 아무 말이 없어?”

    얼굴에는 먼지가 잔뜩 묻은 추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네가 어떻게 몰라? 설마 너까지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은 업신여기는 거니?”

    금벽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신형사의 직무를 맡은 내시가 천천히 다가와 느긋하게 두 장의 약방문을 꺼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금벽아, 이 두 가지 향환은 네가 직접 만들었지?”

    금벽이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보았다.

    내시가 차갑게 웃었다.

    “태후마마께서 이미 태의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는 정상적인 훈향이고, 다른 하나는 몇 가지 약이 더 들어서 피임 효과가 있지. 너희 마마께서 쓰시는 게 이게 맞지? 그런데 다른 마마님들께 준 건 다른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그래도 억울하다고 할 테냐?”

    금벽은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요! 마마께서는 약방문을 시험해 본 것뿐이에요. 의도한 게 아니라…… 추아야! 말 좀 해봐! 너도 알잖아, 그렇지?”

    그녀의 강요에 마침내 추아가 입을 열었다.

    “금벽 언니, 그만 해요.”

    추아가 한 말은 금벽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벽은 눈을 크게 뜨며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까지 매수된 거야?”

    추아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에요! 매수당한 게 아니에요!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금벽은 믿을 수 없었다.

    “뭐라고?”

    추아는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마침내 한참을 숨겨왔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향환은 마마께서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마마께서 따로 표시하시는 걸 봤어요. 그리고 마마께서 능양주지가 마신 차에 독이 있다고 속이고 협박해서 약을 궁으로 가져오라고 시킨 거예요.”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추아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었다.

    금벽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추아, 마마께서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이렇게 배신을 해?”

    “아니에요! 언니는 지금 마음속에 마마 생각밖에 없어서 두 눈이 가려진 것뿐이에요. 저도 처음엔 몰랐었는데 마마께서 그날 병을 일부러 나게 한 걸 알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매사에 조심하시는 모습이 정말 이상했지요. 금벽 언니, 전에 폐하께서 마마를 홀대하실 때 언니는 왜 사정하러 가서 그렇게 얻어맞고 오랫동안 앓았나요?”

    금벽이 말했다. 

    “그건 내가 마마를 위해 자진해서 불만을 말하러 간 거야.”

    추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마마께서 언니가 가게끔 만든 거예요. 폐하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요…….”

    그녀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렸다.

    추아는 이런 사실들을 뒤늦게 깨달았다. 겉으로 보기엔 마마께서 그녀들에게 매우 잘해 주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녀는 마마가 총애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금벽이 맞아 죽을 뻔했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차게 식었다.

    금벽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마마는 마음씨가 착한 분이야. 나는 자원해서 갔어. 내가 원해서 간 거야…….”

    옆에 있는 고 미인이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

    “흥! 나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너 방금 내 말 못 들었느냐? 그 여자는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 곁에 있던 시녀일 뿐이고 이름은 금벽이었느니라! 그 여자가 네게 자기 이름을 지어준 게 무슨 속셈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자기가 진정한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되고 싶어서, 자기의 비천한 신분을 지우고 싶어서, 네가 자기 자리를 대신하게 만든 거란다! 정말 네게 잘해 주는 줄 알았느냐? 그럼 네가 반죽음이 되도록 맞았을 때 그 여자는 어디 있었지? 이번엔 태후마마께서 번개처럼 손을 쓰셔서 그 여자가 지은 죄의 증거를 단숨에 잡았지. 안 그랬으면 향환 사건을 믿든 안 믿든 결국엔 네가 다 뒤집어쓰게 됐을걸?”

    금벽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옥비마마를 3년 동안 모셨다. 시작은 힘없는 말단 궁녀였지만, 옥비가 직접 자신을 발탁해 괴롭힘을 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금벽의 마음속에서 마마는 주인일 뿐만 아니라 은인이기도 했다!

    한편 고 미인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멍청한데 충성심만 강한 이런 바보한테는 말을 해봐야 시간만 낭비였다.

    그녀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고 주 재인에게 말했다.

    “이런 멍청한 것과는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우리 그만 가세!”

    금벽과 다른 이들이 뒤이어 압송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영수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쓸쓸하고 처량해졌다.

    류명주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 소저, 소저는 진짜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아시죠?”

    지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류명주가 말했다.

    “전에 장락지에 있을 때, 소저는 어떤 것이든 폐하의 취향을 파악해서 제가 폐하의 마음을 잡는 것을 도와주셨지요. 제가 입궁하고 나서 궁 안에 소저가 말했던 모든 것이 합쳐진 하나의 표본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게 바로 옥비마마였지요. 

    처음에는 폐하의 마음이 옥비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소저가 저보고 옥비를 배우라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옥비의 정체가 드러난 지금, 폐하께서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인 분은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럼 소저가 저에게 누구를 배우라고 한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더군요.”

    지온은 그저 웃기만 했다.

    류명주가 그녀를 주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 전에 청녕궁에 인사하러 갔을 때, 옥비가 입을 열자마자 소저를 난처하게 만들었었죠. 확실히 어떤 적의를 품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한참 생각해봐도 이 적의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더군요. 

    우리 관계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소저는 이미 약혼해서 입궁하여 총애를 다툴 일도 전혀 없을 테니, 옥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니 옥비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소저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익숙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죠?”

    지온이 말했다.

    “마마, 그 말씀은 마음속에 남겨 두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류명주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포주의 손에서 자라서 이익에도 밝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잘 읽어요. 이 깊은 궁궐 안에서 가문의 힘도 없고 의지할만한 사람도 없는 저는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은 신세지요. 소저와 루 통정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고 저한테는 두 분이 거의 유일한 조력자예요. 그래서 저는 두 분과 척지고 싶지 않아요. 안 그럼 앞으로 누가 나를 도와주겠어요?”

    지온이 웃기 시작했다.

    “마마께서 우리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류명주도 웃었다.

    “옥비가 준 실패의 교훈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까 봐요? 그들이 옥비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옥비를 최대한 짓밟을 테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 누가 옥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옥비는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아니었고, 그저 선녀에서 평범한 사람이 된 것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본래부터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의견에 지온은 웃음이 터졌다.

    “옥씨 가문의 아가씨도 선녀는 아니었어요. 그저 책을 좀 읽었고 아는 것이 많았을 뿐이지요.”

    지온이 말했다.

    “폐하께서 옥 소저를 잊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두 분 사이의 좋은 나날들이 얼마 못 이어질까 봐 걱정스럽네요.”

    류명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사내, 게다가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사내가, 여자가 자기보다 강한 걸 어떻게 용납하겠어요?”

    과연 기녀 출신이어서인지, 이런 이치는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아도 바로 이해했다.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마마께선 그런 것들을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옥 소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옥비가 냉궁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과거는 그저 과거의 먼지로 돌아가겠지요. 저와 루 통정도 지난 일을 다 내려놓고 다시는 꺼내지 않을 거예요.”

    류명주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지온 소저 축하해요. 두 분이 백년해로하길 바랍니다.”

    눈발이 점점 더 심해져 지온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중간쯤 가다 지온이 뒤돌아보니 흰 눈 위에 빨간 옷을 입은 류명주의 요염한 자태가 아름답게 빛났다.

    정말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애정이 결코 유일한 것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온이 하나를 가르치면 자연스럽게 둘을 깨우쳤다. 

    류명주는 지온에게 보증을 요구하며 자신과 지온은 서로 돕는 입장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것은 옥비가 루안에게 제의했던 동맹보다 훨씬 현명한 것이었다.

    * * *

    눈이 내리면 내릴수록 날씨가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냉궁에는 낡은 솜이불 한 채만 있을 뿐 숯불조차 없었다.

    옥비는 홑겹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밖에서 삐걱,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공손하게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옥비의 눈에 반짝 희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절박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폐하! 폐하! 신첩을 보러 오셨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실망했다.

    방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지온이었다. 지온의 여우 가죽을 덧댄 비단옷은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다.

    옥비의 눈에 질투가 떠올랐다.

    지온이 쓱 한 바퀴 둘러보더니 물었다.

    “왜 이렇게 추워요? 숯불은요?”

    냉궁을 돌보는 늙은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냉궁에서는 숯불을 피운 전례가 없습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찌를 하나 벗어 건네주었다.

    “그래도 옥비께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해주세요.”

    늙은 궁녀는 매우 기뻤다. 

    ‘냉궁에서 일하면서 여태껏 국물도 한 방울 못 얻어먹었는데 이렇게 돈이 나오다니!’

    “소저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오겠습니다.”

    늙은 궁녀는 숯화로, 뜨거운 물, 심지어 간식까지 가져왔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가봐요, 난 마마와 할 말이 좀 있어요.”

    “예.”

    방문이 닫히자 옥비가 차갑게 말했다.

    “거짓으로 선의를 베풀 필요 없다. 이렇게 하면 내가 너의 은혜에 감사하기라도 할 것 같으냐?”

    지온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직도 본인이 옥비마마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봉호는 이미 없어졌어요. 당신은 이제 평민에 불과해요. 당신한테 은혜를 베풀어봤자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옥비가 얼굴색이 변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나를 잊지 않으실 거야. 폐하께서 잠시 속으신 거다. 결국 나를 데리러 오실 거야.”

    지온이 한숨을 쉬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자기가 왜 졌는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요. 황권 앞에서는 폐하도 중요치 않은데 하물며 당신 같은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이번에 금기를 어기는 짓을 했으니 폐하께 남은 애정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 냉궁에서 나올 수 없어요.”

    “너……!”

    옥비가 눈을 크게 뜨고 입 밖으로 한 글자를 뱉자마자, 그녀의 말이 잘렸다. 

    “정말 이상하네. 너도 역사서를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이잖아. 왜 이런 걸 선생님께 돌려드렸어? 진즉에 네게 책 좀 많이 보라고 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부모도 널 떠나고 애인도 널 버린다고 한들, 이 세상에 오직 네 머릿속에 든 지식만이 널 배신하지 않는 법이라고.”

    옥비는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옥비는 물끄러미 지온을 응시했다. 싸구려 찻잔을 든 지온은 그 안에 떠 있는 찻잎을 보며 눈을 찌푸린 뒤 가볍게 찻잎을 불고는 아무렇게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말, 이 자세, 이 표정은……!’

    옥비는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몸을 떨며 쉰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너, 너 대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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