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93)화 (293/385)
  • 293화. 처벌

    지온은 현실로 돌아와 루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태후마마께선 한 번에 다 쓸어버리시는군. 애석하게도 그리 원하던 황자가 또 가짜였다니 폐하께서 엄청 실망하셨을 거요.”

    “그렇겠죠…….”

    두 사람은 한참을 묵묵히 걸었다. 궁문에 도착할 때가 가까워져 오자 루안이 물었다.

    “언제 돌아오는 거요?”

    지온이 대답했다.

    “태후마마 쪽에서 뭐라고 할지 봐야죠.”

    루안의 눈이 반짝였다.

    “태후마마께서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소?”

    지온이 웃었다.

    “아니요.”

    루안이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보았다.

    지온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루안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건 당신한테는 아주 쉬운 일일 텐데.”

    그런데 그녀는 왜 일부러 태후가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었을까?

    지온이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하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어요.”

    “…….”

    루안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당부했다.

    “당신은 얼른 궁에서 나오기나 해요, 이제 곧 새해니까.”

    지온이 대답했다.

    “옥비 일이 끝났으니 태후마마께서 곧 나를 찾으실 거예요.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정도 걸리겠죠.”

    “알겠소. 별원의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돌아오면 같이 꽃구경 갑시다.”

    지온이 웃었다.

    “응.”

    루안은 그녀에게 우산을 쥐여주고 가늘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궁문을 나섰다. 

    그의 모습이 궁문 밖으로 사라지자 지온이 돌아서며 내시에게 말했다.

    “돌아갈까요?”

    * * *

    장복궁 밖에서는 고 미인이 호은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호 공공, 옥비가 신비에게 약을 먹였다고요? 오해가 아닌가요?”

    호은은 황제의 가마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빨리 벗어나려고 어쩔 수 없이 말해주었다.

    “마마님! 스스로 다 인정했는데 오해라니요? 영수궁에 가지 마십시오. 태후마마의 명이 있었으니 옥비는 곧 처벌받을 겁니다.”

    고 미인이 또 뭐라 하려는데 류명주가 막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고 동생, 그 향, 절대 다시 쓰지 말게. 장 원판이 회임에 영향을 준다고 했어.”

    류명주도 이렇게 말하는데 더 뭘 의심할 수 있겠는가? 고 미인은 한동안 넋이 나가 있다가 화를 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한동안 우리는 옥비 언니를 자매처럼 생각했어요. 언니가 장복궁으로 소환되었다기에 걱정되어 도와주러 왔는데, 어떻게 이런……!”

    고 미인은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류명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 너무 슬퍼하지 말게. 진상이 무엇인지는 내일 성지를 기다리면 알 터이니.”

    지온이 청녕궁으로 돌아왔을 때 태후는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마마.”

    태후가 거울 앞에 앉자 궁녀는 머리를 풀어 반백의 긴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루 통정은 돌아갔느냐?”

    태후가 물었다.

    “예.”

    태후가 거울을 통해 지온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소녀의 자태는 한 송이의 꽃처럼 수려했는데, 그 표정은 침착했다.

    “옥비와 네가 무슨 원한이 있느냐?”

    지온이 고개를 들고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마마께서는 어째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옥비마마께서 후궁 깊이 은거하셨는데 신녀와 원수질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태후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폐하가 널 궁으로 불러 신비를 조사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하는 행동을 보니 문제가 있는 것이 신비가 아니라 옥비라고 확신한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향환에 문제가 있다는 것까지 어찌 알았겠느냐. 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일 본궁이 능양주지를 심문하면 스스로 털어놓을 테니.”

    지온이 웃었다.

    “마마께서 신녀를 겁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녀는 옥비마마와 원수를 질 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옥비께서 저를 눈엣가시로 여기셔서 미리 방비는 했습니다.”

    “옥비가 널 왜 거슬려하느냐?”

    지온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마마께서 물으시니 신녀,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날 제가 산책하러 나갔다가 옥비마마를 뵈었는데, 마마께서 잠시 영수궁에 들렀다 가라고 제게 청하시더군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마께서는 제가 돌아가신 어떤 분을 닮았다며 루 통정께서 전에 그분을 흠모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태후가 미간을 파르르 떨더니 몸을 돌렸다.

    “뭐라고?”

    지온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깜짝 놀란 듯이 멍하게 있다가 중얼거렸다.

    “마마…….”

    태후가 손을 흔들어 궁녀를 물러가게 하고 지온을 가까이 오게 했다.

    “마마, 신녀가 뭘 잘못했습니까?”

    지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후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너랑은 상관없다. 그날 옥비가 뭐라고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보아라.”

    “예.”

    지온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옥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옥형 선생께서 손녀를 한 명 입양하셨는데 미모가 뛰어나고 재주도 많았다고 합니다. 무애해각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좋아했고 루 통정마저도 그분을 연모했었다고요. 한데 안타깝게 그분도 그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옥비마마께서는 신녀를 처음 봤을 때 신녀가 그분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대충 이런 연유로 루 통정이 이 혼사를 승낙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태후는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온이 그녀를 힐끗 훔쳐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신녀는 이제 옥비마마께서 그분을 사칭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옥비마마께서 말씀하신 그 소저가 옥형 선생의 진짜 손녀,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아닐까요?”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투는 딱딱했다.

    “옥비가 일부러 널 충동질했구나. 그래서 너도 의심이 생겼느냐?”

    지온이 겸연쩍게 웃었다.

    “사람들은 연적에 항상 예민하지요. 옥비마마께서 잘 감추긴 하셨지만 신녀는 마마가 마음속에 질투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녀가 그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태후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너는 눈치가 빠르지만, 총명하다고 자만하지 않는구나.”

    약혼자가 마음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저 나이대의 소녀들 사이에서는 드물었다.

    지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 일은 루 통정이 일전에 신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루 통정의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저도 당연히 그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옥비마마께서는 이런 속사정은 모르시지요. 루 통정이 어릴 적에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연모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오히려 루 통정을 볼 면목이 없게 할 따름이지요.”

    태후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그 아이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은총이거늘,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다니!”

    지온은 웃음을 머금은 채 듣기만 하고 말하지 않았다.

    태후가 그녀를 몇 번 훑어보더니 물었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다 처리했으니 내일 출궁하는 게냐?”

    지온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신녀에게 명하신 일은 마마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는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마마께서 신녀가 출궁해도 된다고 허락하시면 가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태후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마침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 피곤하구나, 너는 이만 가보거라.”

    “예.”

    지온은 인사를 하고 침전에서 물러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 왕 상궁이 들어와 빗을 들고 태후의 머리카락을 계속 빗었다.

    “마마, 내일 지온 소저를 내보낼까요?”

    태후는 한참을 침묵하고 나서 말했다.

    “며칠 더 머물게 하거라, 그 아이의 설서(*说书: 노래(唱)와 대사를 사용하여 삼국지연의·수호전 따위의 시대물·역사물을 이야기함)가 아주 재밌더구나.”

    왕 상궁이 거울을 통해 태후를 보았다.

    “마마, 지온 소저가 한 그 말을 믿으십니까?”

    태후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으니 가서 향이나 피우거라, 이제 자야겠어.”

    “예.”

    향이 안개처럼 피어오르자 태후는 왕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머릿속에 많은 장면이 번쩍이며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황제가 방금 장복궁에서 보인 어리석은 태도였고, 다른 하나는 선대 태자의 관이 경성으로 올라오는 장면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 근이가 황제가 되었다면 이런 꼴이 되었겠는가.’

    * * *

    이튿날 궁에 명령이 내려졌다.

    옥비는 남의 이름을 제 것으로 사칭하여 황제를 속였으니 이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봉호를 박탈하고 냉궁에 가둔다.

    영수궁은 큰 난리가 났다.

    지온은 우산을 쓰고 밖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온 소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지온이 고개를 돌렸더니 류명주가 있었다.

    “첩여 마마.”

    류명주가 손사래를 쳤다.

    “예의 차리지 마세요.”

    그러고는 또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지온이 반문했다.

    “마마는요?”

    류명주가 말했다.

    “나와서 좀 걷다가 이 근처에 오니 어제 일이 생각나서 와봤어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영수궁의 궁녀와 내시들이 하나하나 끌려 나오는 것을 보았다. 중요하지 않은 이들은 다른 곳으로 근무지가 옮겨졌고, 주인의 곁에서 시중들던 이들은 묶여서 신형사로 끌려갔다.

    옥비의 곁에 있던 궁녀 금벽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체포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인정하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요! 마마께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누명을 쓴 거예요!”

    그녀를 끌고 가던 내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건 폐하의 명령이다. 폐하가 옥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거냐?”

    금벽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제가 말한 것은 폐하가 아니라 신비와 태후예요! 당신들 하나하나 다 우리 마마가 거슬렸던 것 아닌가요, 마마께서는 절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착하신 분인데 그분을 모함하고 또 신분까지 박탈하려고 하다니!”

    그녀가 말하는 도중 궁녀 한 명이 끌려 나오며 그녀 쪽으로 넘어졌다.

    금벽이 그녀를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추아야, 말 좀 해봐! 마마는 그럴 분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그분에게 누명을 씌워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잖아!”

    추아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이때 비빈 몇 명이 우산을 쓰고 다가왔다. 금벽의 말을 들은 고 미인의 얼굴색이 제일 먼저 어두워졌는데, 그녀는 금벽을 꾸짖었다.

    “이 멍청한 것, 속아놓고 아직도 모르다니! 조사해보았더니 그 여자는 가짜였어! 옥씨 가문의 규수는 무슨, 흥! 그 여자는 시녀야. 너랑 같은 시녀라고! 아, 맞다. 그때 이름도 금벽이었지. 그 여자가 왜 너한테 이 이름을 지어줬는지 이제 알겠지?”

    금벽은 멍하니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예요! 다 헛소리!”

    고 미인은 냉소를 그치지 않았다.

    “내가 어제 눈을 맞으며 장복궁에 간 건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서였단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한테 어떻게 보답한 줄 아느냐? 피임향을 줘서 평생 황손을 품지 못하게 하려고 했단다. 이렇게 마음이 악독한 인간한테 네가 이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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