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가면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데 모여들었다.
황제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황후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마침내 신비가 회임했을 때부터 마음속에 묻혀 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태후가 전심전력으로 신비를 돕더라니, 신비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였어.’
류명주도 깜짝 놀라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을 대변하듯 외쳤다.
“시, 신비? 아직 안 죽었어요?”
신비의 옷차림은 단정했고 안색은 붉었다. 그녀는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침전 밖으로 나왔다.
신비는 황제에게 절을 한 뒤 돌아서서 불신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옥비를 바라보았다.
“옥비 동생, 본궁이 여기 있으니 한번 말해보게.”
옥비는 표정이 일그러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그랬어요? 일부러 죽은 척 한 겁니까?”
“그래!”
신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옥비 동생은 기쁘지 않은가? 본궁이 죽지 않았으니 자네도 살인범이 아니게 되는 것인데.”
‘기쁘긴 개뿔!’
옥비가 아무리 멍청해도 자신이 지금 함정에 빠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절박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폐하! 신비가 아무 일도 없는데 유산했다고 속였으니, 이는 황제를 기만한 것입니다!”
신비의 미소가 한층 더 화사해졌다.
“유산한 척만 하면 죄가 모자라지 않겠는가? 옥비 동생, 내가 더 도와줌세. 본궁은 유산뿐만 아니라 회임도 하지 않았네.”
‘뭐, 뭐라고?’
옥비는 너무 당황해서 얼어버렸다.
“다, 당신……!”
정신을 차린 황제가 큰 소리로 물었다.
“신비, 그게 무슨 말이오? 임신이 가짜라니?”
신비가 돌아서며 대답했다.
“폐하, 예, 신첩은 회임하지 않았습니다.”
“비……!”
황제는 안심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몰랐다. 신비가 유산하지 않았으니 그도 지난번의 참극을 다시 겪지는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아이, 그가 바라던 아이 역시 그저 사기극일 뿐이었다.
‘그럼 그동안 내가 느꼈던 두근거림과 기쁨은 모두 헛짓거리였단 말인가?’
“네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황제는 화가 나서 숨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황사대사(*皇嗣大事: 황실의 자손을 잇는 대업)를 감히 거짓으로 꾸미다니? 비는 짐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거요? 황실의 혈통을 뭐라고 생각하느냔 말이오?!”
신비가 즉시 무릎을 꿇고 정색하며 말했다.
“폐하, 신첩은 황사대사(*皇嗣大事: 황실의 자손을 잇는 대업) 때문에 이런 서투른 책략을 쓴 것입니다.”
“아직도 둘러댈 말이 있소?”
황제는 극도로 화가 나자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알고는 있는 게요? 이건 황제를 기만하는 짓이오!”
‘그래, 아무리 이유가 정당해도 임신을 가장하는 건 황제를 기만하는 일이야. 일개 비 따위가 이런 일로 승부를 걸 자격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건 월권이지!’
그런데 이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상, 신비는 황제를 속이지 않았어요.”
황제는 태후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태후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비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이 일을 시킨 것은 납니다.”
황제는 멍해졌다.
“어머니, 당신께서…….”
태후가 무심한 눈길로 옥비를 쳐다보았다.
“나는 3년 동안 황제가 아무리 옥비를 총애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황제가 어떤 비빈을 총애하든 그건 황제의 권리이니까요. 하지만 황제, 황제의 총애로 인해 황실의 핏줄이 위태로워진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임신을 가장하고 죽음을 가장하다니요, 그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태후가 차갑게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황제가 기억이나 하겠어요? 나는 이 여자가 계속 궁에 남아 있으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황상이 직접 두 눈으로 보게끔 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 이 일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오늘 일은 연극이 아니라 피가 낭자한 현실이 되었을 겁니다!”
“어머니…….”
황제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태후가 숨을 돌리고 옥비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옥비는 너무나 놀랐다. 이것이 태후가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무대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기만을 기다리며 뒤에서 은밀히 웃고 있었단 말인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아닙니다……!”
신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옥비, 자네가 이렇게 잔인할 줄은 정말 몰랐네. 자네가 넣은 낙태약을 본궁이 진짜로 마셨으면 지금쯤 혈붕으로 이미 죽었을 거야. 알고 보니 현비보다 훨씬 더 독한 사람이었어!”
“중상모략하지 마세요!”
옥비가 소리쳤다.
“폐하, 믿지 마십시오. 신첩은 정말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폐하께서 신첩을 총애하시는 것에 화가 나서 신첩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비가 비웃으며 말했다.
“본궁은 거짓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태후께서도 같은 거짓말을 하겠는가? 자네가 차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 약 항아리가 태후마마 앞으로 보내졌네. 아직도 감히 자네가 안 했다고 변명하는가?”
황제는 그녀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안색이 밝아졌다 흐려졌다 했다.
“옥비마마, 마마께서 모르시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지온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신녀는 폐하의 명을 받고 궁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어찌 되었든 신비마마를 해칠 수가 없지요. 마마께선 처음부터 뒤집어씌울 사람을 잘못 찾으신 겁니다.”
옥비는 넋이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바보처럼 그들의 장난질에 놀아난 셈이었다. 신비는 임신한 척하여 그녀를 낚았고 황제는 사람을 궁으로 보내 신비의 곁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루안은 일찌감치 그녀가 능양진인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그녀가 일을 벌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 명이 한꺼번에 나서서 그녀를 이 무대 위에 세우고 그녀의 추태를 완전히 드러나게끔 했다.
‘그래도, 그래도……!’
신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자네를 믿고 싶으셨던 것 같네. 옥비, 폐하 앞에서 어디 얼굴이나 들 수 있겠나?”
신비는 생각만 해도 우스웠다. 지온 소저는 황제가 궁에 파견한 것이니 황제는 무조건 지온 소저를 믿어야 했다. 그런데 좀 전에 옥비가 교활한 말로 모함을 하자 황제는 뜻밖에도 망설였었다.
신비는 자신이 어떤 주군을 모셔왔던 것인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파견한 사람도 믿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옳고 그름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다행히도 그녀는 미리 태후를 설득해두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증거를 황제의 눈앞에서 흔들어대도 황제는 옥비의 일방적인 말을 믿었을 것이다.
“폐하……!”
변명이 통하지 않자 옥비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신첩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도 신첩이 망신을 당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예, 신첩이 투기하였습니다. 신첩은 다른 여자가 폐하의 아이를 낳는 것이 싫었습니다. 폐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전에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비록 후궁에 삼천 명이 있을지라도 신첩과 함께할 때는 그저 폐하와 저 두 사람뿐이라 하셨지요…….”
“그 입 다물라!”
태후가 소리쳤다.
“가짜인 주제에 무슨 영원을 논하느냐?”
옥비가 놀라서 울음을 뚝 그치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황후, 신비, 류명주 등등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 둘을 보았다.
태후가 차갑게 말했다.
“네가 궁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아직 슬픔에 잠겨 있어서 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중에는 황제가 너를 총애하는 것을 보고 굳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지. 그런데 네가 이렇게 지독한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러니 네 가면을 벗겼다고 탓하지 말아라!”
“어머니!”
황제가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태후는 더욱 화를 냈다.
“황제는 아직도 옥비를 감싸고 싶은 겁니까? 이것이 어떤 인간인지 아직도 몰라요? 흉악한 마음을 품고 주인을 배반하여 영예나 구하는 소인배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 아이를 어디서 찾았는지? 무애해각이 멸문했던 그날 밤, 그 난리통에 주인조차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상처 하나 없었을까요? 그리고 처음 그 자리에서 황제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눈이 커졌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태후는 그를 보며 비통함과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께선 옥씨 가문의 소저를 깊이 사랑했었던 것 아니었어요? 그 소저를 해치고 신분을 빼앗고 명성을 훼손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 영예를 누리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신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궁녀에게 물었다.
“태후마마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이게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해서.”
춘효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은 그, 그녀가……?”
태후는 이 의붓아들을 보면서 동정을 해야 할지 실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확인해 보았어요. 무애해각이 멸문한 후 관병들이 그 자리에서 한참을 수색했어요. 저 아이가 살아남았다면 진작에 찾았을 텐데, 어찌 황제가 찾으러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겠어요? 나약한 여자가 그런 혼란 속에서 이유 없이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황제는 그래도 의심스럽지 않다는 겁니까?”
황제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저 여인이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누가 압니까? 기밀을 누설했을 수도 아니면 주인을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옥비가 이 말에 대답하듯 황급히 소리쳤다.
“아닙니다! 폐하, 신첩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첩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래, 너는 참 운도 좋구나. 너희 집 아가씨가 바다에 빠졌는데도 너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태후가 조롱했다.
“너도 현장에 있었지? 그럼 말해보아라. 너희 아가씨가 바다에 빠졌을 때 너는 뭘 하고 있었느냐?”
“저…… 저는 다른 쪽으로 내던져져서 아가씨를 미처 잡지 못했습니다!”
옥비가 애원하는 눈길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저는 정말 아가씨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하지만 황제는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 황제는 옥비를 편애하고 있었다. 항상 옥비를 신임하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옥종화라면 그 편애의 대상이 바뀌어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
황제가 옥비를 보며 말했다.
“일부러 아가씨가 바다에 빠진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 아니냐? 네가 그녀의 신분을 대신하려고? 이 모든 것이 네가 계획한 것이로구나!”
“아닙니다!”
옥비가 부인했다.
“저는 아가씨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자매처럼 친한 사이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살인도 하지 않았느냐?”
황제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신비에게 약을 먹이고 두 생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렇게 독한 짓도 하는 네가 그 참에 바다로 밀어버리는 게 그리 대수였겠느냐?”
옥비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3년 동안 그녀는 옥종화에 대한 황제의 감정을 이용하여 황제를 제 마음대로 주물러왔었다. 그래서 그 감정이 자신을 배반하고 곤경에 빠트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