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죽어도 인정할 수 없어
황제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옥비를 바라보았다.
“말해보시오, 비가 한 짓이오?”
옥비가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폐하, 신첩이 아닙니다! 폐하 루 통정의 말을 믿으시면 안됩니다! 지온 소저와 약혼한 사이인데 당연히 그녀를 돕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뭔가 손을 써서 능양주지를 협박하고 신첩에게 누명을 씌웠을 것입니다! 폐하, 아시다시피 루 통정이 오랫동안 형옥을 다스렸으니 그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루안은 그녀의 이런 변명을 듣고 단지 허, 하고 헛웃음만 쳤을 뿐 따지고 들지 않았다.
황제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그녀와 루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안은 황제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그는 황제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옥비마마, 제가 그리 오랫동안 형옥을 다스린 것을 알면서도 감히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십니까? 능양주지가 가져온 약도 다른 곳에서 사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걸 판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약방 점원도 데려와 볼까요?”
옥비는 겁에 질려 전에 없이 민첩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 자네가 능양주지를 매수하고 또 약방 점원도 매수했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 않나?”
“이러시는 걸 보니,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옥비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닌데, 본궁이 왜 인정해야 하는가?”
루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신은 그래도 마마의 체면을 세워드리려 노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마마께서는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이렇게 된 이상 신이 마마의 흠을 들추어냈다고 탓하지는 마십시오.”
옥비는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버리면 이 궁 안에 더는 자신이 몸을 누일 만한 곳이 없어져 버릴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말을 마치고 루안이 소매에서 약방문을 한 장 꺼냈다.
“폐하, 보십시오. 이것은 폐하께서 최근에 복용하신 약탕 약방문입니다. 맞습니까?”
호은이 받아 꼼꼼히 대조해본 후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 약방문은 옥비마마께서 올린 것이지요? 이 약방문이 양기를 보존하여 자식을 보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아들을 원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을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자 황제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약방문을 어디서 구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능양주지가 바친 것입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옥비가 끼어들며 말했다.
“본궁은 폐하의 양기가 왕성해지길 진심으로 바란 것뿐이다.”
“예.”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정말로 폐하께서 자식을 낳으시기를 바라셨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기회를 가로채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궁 전체의 비빈에게 피임향을 보내셨지요!”
‘피임……향?’
황제가 잠시 이해하지 못해 막연해하는 동안, 황후의 얼굴색은 즉각 변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 전에 옥비가 여기저기 선물한 그 향환 말인가?”
루안이 몸을 굽히고 말했다.
“예.”
“옥비 본인도 쓰지 않았나?”
루안이 대답했다.
“마마, 잠시 기다리시면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눈짓을 했다.
지온이 알겠다는 듯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향환과 약방문을 꺼내 호은에게 건네주었다.
“폐하, 이것은 신녀가 류 첩여에게서 받아온 향환입니다.”
황제가 향환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과연 그가 최근에 자주 맡았던 향이었다.
“장 원판.”
황제가 턱짓했다.
호은이 즉시 향환을 장 원판 앞에 가져다주었고, 장 원판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냄새를 맡아보고 약방문을 비교해본 뒤 말했다.
“폐하, 이 약방문에는 몇 가지 약재가 들어있어서 부인병을 관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임신 확률도 낮아집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옥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옥비가 소리쳤다.
“폐하! 신첩은 몰랐습니다! 이 약방문이 기록되어 있던 책은 무애해각에서 찾아 가져온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잠시 멍해졌지만 그래도 의심을 반쯤은 풀었다.
무애해각에서 찾아온 책이라면, 그건 바로 옥종화의 유물이었다. 이미 죽은 지 3년이나 된 옥종화가 어떻게 약방문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우연의 일치였을 뿐, 옥비는 약방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이때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옥비마마,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말을 너무 빨리해버리시면 체면이 상하실 수가 있습니다.”
말을 끝내고 그녀는 또 다른 주머니를 하나 꺼내 거기서 똑같이 생긴 향환과 또 한 장의 삭제된 약방문도 꺼냈다.
“폐하, 옥비마마께서 몰라서 처음의 약방문을 쓰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공교롭게도 신녀가 몇 가지 성분을 빼고 비슷한 향환을 만들어 보았더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폐하, 영수궁에 사람을 보내 옥비마마께서 직접 사용하신 향환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수색해보십시오.”
두 개의 향환은 향의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약방문은 미묘하게 달랐다.
장 원판의 확인을 받은 뒤, 황제는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쳤다.
“호은!”
“예, 여기 있습니다.”
“사람을 데리고 가서 영수궁을 수색해라!”
“예.”
옥비의 안색이 변했다.
“폐하!”
그러나 이번에 황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 *
고 미인은 이미 장복궁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도 낮은 데다가, 안에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는 눈이 흩날리고 있어 그녀와 주(周) 재인은 추위에 덜덜 떨었다.
호은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들이 호은을 급히 맞이했다.
“호 공공!”
호은이 동정하듯이 그녀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마마께서는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 밤에 시간이 없으시고, 소인은 영수궁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 더는 그녀들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눈을 해치며 가버렸다.
“호 공공! 호 공공!”
고 미인은 초조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녀와 함께 온 주 재인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겁에 질려 말했다.
“고 언니, 우리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보아하니 일이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고 미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내시가 추위에 떠는 그녀들을 보고 다가와 말했다.
“두 분 마마, 지금 폐하를 뵙기를 청하시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신비마마께서 낙태약을 드셨는데 증거가 옥비마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심문 중이십니다!”
“뭐라고?”
고 미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가?”
내시가 동정하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마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옥비마마께서 보낸 향에 문제가 있습니다. 호 공공께서 지금 영수궁에 가신 건 바로 이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향?”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도 받으셨지요? 옥비마마께서 꽤 많은 비빈께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듣자니 그 향이 피임 효과가 있다고…….”
고 미인은 몸이 부들부들 떨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주 재인을 보자, 주 재인도 역시 매우 놀란 듯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향, 고 미인과 주 재인은 모두 그 향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옥비가 그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설마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잠시 후 호은이 돌아와서 말했다.
“폐하, 향환을 찾지 못했습니다. 영수궁 사람들 말로는 이미 다 썼다고 합니다.”
증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옥비가 말을 꺼냈다.
“폐하! 신첩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이 약방문을 얻었을 때 몸조리에 효과가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임신에 지장이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신첩이 의원도 아닌데 어찌 그리 잘 알겠습니까?”
향환도 못 찾았고 옥비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없으니 이제는 당연히 그녀가 무슨 말이든 지어내면 끝이었다.
루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예상외로 미리 준비를 해두셨군요.”
옥비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루 통정, 본궁은 대인이 지온 소저를 감싸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본궁을 중상모략하면 안 되지! 처음에는 능양주지를 매수하여 본궁이 신비에게 약을 처방했다고 지목하더니 그것만으로 신임을 얻기 부족한 것 같으니 또 본궁이 무슨 피임향을 보냈다고 모함하는군.
대인은 본궁이 바보라고 생각하나? 후궁의 비빈 전체에게 약을 쓰다니. 게다가 향을 보낸다 해도 반드시 쓰리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황후마마와 신비께서는 안 쓰시지 않았나? 폐하, 부디 그를 믿지 마십시오. 신첩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의 변명을 들은 루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신이 옥비마마를 정말 과소평가했습니다.”
옥비가 벌인 일들은 정말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설픔이 오히려 그녀에게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에게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궁 안의 물건들은 모두 출납 기록이 있으니 옥비가 만든 향의 원료를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옥비는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 통정, 더는 악의적으로 중상모략하지 말게! 폐하께서 이렇게 대인을 믿고 계시는데 어찌 권력을 이용해서 사실을 왜곡하려 하는가?”
루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이러시는 건, 옥비마마께서는 정말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시지요?”
“본궁이 하지 않은 일을 왜 인정하나?”
옥비는 위엄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지온 소저는 루 통정의 약혼녀입니다. 아마 장복궁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해 살심을 품었을 겁니다. 약으로 음해하여 한 번에 두 사람을 죽이는 수법이라니 정말 끔찍하여 치가 떨립니다. 폐하! 엄하게 벌해주십시오!”
이때 황제는 정말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안 쪽에는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어서 이론적으로 더 믿을 만했다. 하지만 옥비의 말도 맞았다. 루안이 정말 그녀를 모함하려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황제의 이런 모습을 보고 루안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옥비가 늘어놓은 것은 분명한 궤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옥비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감정이 그녀에게 기울어져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지온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옥비를 보고 있었다.
“옥비마마, 지금 하신 말들을 신비마마 앞에서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마께 절대 신비마마를 해칠 마음이 없었고, 유산과 혈붕도 마마와는 무관하다고 말입니다. 마마께서는 아무 죄가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해보시지요.
제가 멍청한 인간이라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하필이면 신비마마를 모시고 있을 때 마마를 죽이고 스스로 단두대에 목을 올리는 짓을 했다고 말입니다. 옥비마마께서 어부지리로 황후마마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될 수 있게 제가 우연히 만들어 드린 거라고 말씀해보십시오. 어디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명백히 비꼬는 것이었고, 옥비도 이를 눈치챘다. 하지만 황제의 태도가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옥비가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펴며 말했다.
“본궁이 왜 못하겠나?”
이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그럼 한번 말해보게.”
익숙한 목소리에 옥비는 아연실색했다.
‘이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에 기대있는 사람의 형상을 보았을 때 귓가에 궁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귀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