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88)화 (288/385)

288화. 용의자

옥비는 장복궁으로 들어섰다.

궁 안에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침전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궁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후, 황제, 황후가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옥비를 보자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옥비가 몸을 숙여 인사했다.

“신첩, 폐하를 뵈옵고, 태후를 뵈옵고, 황후를 뵙습니다.”

세 쌍의 눈이 그녀를 응시했지만, 그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옥비는 가슴이 두근거려 몹시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신첩, 잘 몰라서 감히 여쭤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직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밖에서 다시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류 첩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옥비가 뒤를 돌아보자 류명주가 불안한 얼굴로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 모두가 왔군.”

황제가 한숨을 내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후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눈으로 한 바퀴 훑고는 말했다.

“너희가 오늘 신비를 문안하러 왔었다지?”

옥비와 류명주가 함께 대답했다.

태후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너희들,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느냐?”

류명주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려 침전을 보았다.

갑자기 침전 안의 울음소리가 커지며 신비가 소리를 질렀다.

“장 원판, 장 원판 다시 한번 보게, 내 아이를 살려줘!”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곧 장 원판이 침전 밖으로 나왔는데 그의 관복 밑단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장 원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 무능하여…….”

황제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벌써 두 번째로구나.’ 

그는 또 이런 말을 듣고 또다시 이런 상황을 겪게 되었다.

류명주가 그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설, 설마 신비 언니가…… 유산한 건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 궁 안은 침묵이 흘렀다.

그저 신비의 울음소리만이 끊길 듯 말듯 들려왔다.

이 물음의 답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옥비의 입가에 미소가 반짝하고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은 원래 그녀가 임시방편으로 생각해낸 계책이었는데 뜻밖에 성공했으니,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류명주는 태후가 방금 한 물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얼른 무릎을 꿇고 해명했다.

“폐하, 신첩은 맹세코 오늘 장복궁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첩이 떠날 때도 신비 언니는 괜찮았습니다.”

옥비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첩도 마찬가지입니다. 류 동생이 가고 나서 신비 언니가 졸리다고 하시기에 신첩도 바로 돌아갔습니다.”

황제가 장복궁의 궁녀에게 눈으로 확인을 받은 후, 태후에게 지시를 청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나하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보거라. 장 원판, 네가 먼저 해라.”

“예.”

장 원판은 고개를 돌리고 의생(醫生)의 손에 있던 약사발을 건네받았다.

“태후마마, 신이 검사해 보았는데 신비마마께서 사고를 당하신 이유는 보태약에 누군가 낙태약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기 모인 사람들의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 류명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황후마저 당황한 기색이었다.

‘현비의 일이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거늘!’

‘황손을 해치는 일이 또 벌어졌단 말인가?’

‘지난번에 그리 많은 사람이 죽어서 궁이 한 번 싹 정리가 되었었지. 그럼 이번에는?’

태후가 나지막이 물었다.

“확실한가?”

장 원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신이 감히 보증컨대 태후마마께서 다른 태의를 불러서 검사해 보셔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그릇에 약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으니 검사하기는 아주 쉬웠다.

태후가 물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황제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변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악문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조사해라! 누가 그랬는지 철저히 조사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벌할 것이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흘끗 보았다.

“들었느냐? 호은, 아직도 안 가고 뭐하느냐?”

“예.”

호은이 급히 대열에서 빠져나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그들 앞에 세워졌다.

신비의 곁에서 시중드는 궁인, 차 방에서 당직을 맡았던 궁녀……. 궁전에 들어간 모든 사람이 압송되어 왔다.

“약은 누가 지었느냐?”

태후가 물었다.

신비의 심복 궁녀 춘효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약은 소인이 직접 지으러 갔고 다른 사람의 손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증인이 있느냐?”

춘효가 즉시 말했다.

“태후께서 궁으로 돌아가시고 소인이 매번 약을 받으러 갈 때마다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뒤이어 그녀가 몇 명의 이름을 부르자, 그 궁녀들이 잇달아 증언하러 나왔다. 

춘효의 혐의는 잠시 지워졌고 태후는 계속 다른 사람들을 확인했다.

“약을 달인 사람은? 나오너라.”

궁녀 두 명이 머뭇거리며 앞에 나와 섰다.

태후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지키고 있었던 것이 맞느냐?”

두 궁녀가 서로 눈을 마주쳤고,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소인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본인이 자리에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이 접근했는지 안 했는지 확신할 수 없겠구나?”

두 궁녀는 손수건을 비틀고 입술을 깨물기만 할 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태후는 화가 극에 달해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그때 궁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혐의가 있다는 게로군.”

춘효가 재빨리 억울함을 호소했다.

“태후마마, 저희 마마를 모시는 심복은 여기 있는 몇 명이 다입니다. 더구나 주인의 목숨은 바로 저희의 목숨입니다. 저희가 마마를 해친다고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건 틀림없이 외부인이 한 짓입니다.”

“외부인? 그럼 그 말은…….”

류명주가 즉각 해명했다.

“태후마마, 신첩은 차 방에 들어간 적도 없고, 약사발은 더더욱 건드린 적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첩 곁에는 장복궁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고, 궁문을 나설 때까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

옥비도 따라서 말했다.

“신첩도 그렇습니다!”

태후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분노한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좋다. 너희 모두 혐의가 없다면, 이 약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게냐?!”

류명주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말문이 막혔다.

옥비가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는데, 여기 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걸 보니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는 오수통에 버린 도자기 병이 생각났다. 밤에 일각(*一刻: 15분) 정도만 시간을 내면 치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자신의 혐의를 벗지 못할 수도 있었다.

옥비가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태후마마, 혐의가 있는 사람은 저희뿐만 아닙니다.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태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비가 말했다.

“지온 소저 말입니다! 신비 언니의 약은 그 소저가 달인 것이지 않습니까?”

류명주가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황급히 해명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온 소저는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비 언니가 유산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문제만 만들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말을 한 김에 옥비는 아예 숨김없이 다 말해 버렸다.

“신첩이 왔을 때 지온 소저가 궁녀들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장복궁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낙태약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지만 지온 소저는 향을 만든다는 이유로 재료를 많이 들고 오지 않았습니까? 많은 향료가 원래 약재로도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황제도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지. 어약방의 약은 모두 출납을 기록하는데, 이 낙태약은 대체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생각해보니 정말 그녀가 가장 의심이 갔다.

이때 호은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폐하! 폐하! 소인이 차 방의 오수통에서 이걸 찾았습니다!”

그는 작은 도자기병 하나를 가져왔는데, 평소에 알약을 넣고 다니는 데 쓰는 종류였다.

황제가 병을 뚫어지게 보며 중얼거렸다.

“모양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호은이 도자기병을 뒤집자, 밑바닥에 새겨진 꽃 한 송이가 보였다.

황제가 기억을 떠올렸다.

“이건 조방궁의 것이다!”

옥비는 이 말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마침내 지온에게 혐의를 덮어씌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건은 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옥비녀를 잃어버리고, 꽃병을 깨트리고 등등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범인은 찾을 수 없고, 마지막에는 얼버무리듯 대충 마무리되었다. 가장 혐의가 있는 사람을 찾아 한참 때리면 자백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약을 넣는 것을 보지 못했고 물증이 지온을 가리켰기 때문에 지온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옥비는 고개를 숙여 계산적인 눈빛을 감췄다.

“아……!”

침전 안에서 갑자기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황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 원판, 신비가 왜 저러나?”

장 원판이 예를 올리며 급히 말했다.

“신이 가보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급히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비명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며 끊임없이 들려와 모두의 마음이 불안했다.

류명주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침전을 바라보며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신비마마 절대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합니다. 만약 이로 인해 목숨이라도 잃으신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테니까요.’

옥비도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그녀는 신비의 아이를 낙태시키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약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신비가 목숨을 잃으면 더 잘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황후를 제외하면 내가 바로…….’

옥비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손수건을 꽈배기처럼 비틀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이 일이 성공했사오니, 이번에는 신비가 혈붕(*血崩: 대량의 자궁 출혈)으로 죽게 해주시옵소서!’

침전 안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장 원판이 비틀거리며 뛰어나왔다. 그의 겉옷에 아까보다 피가 더 많이 묻어 있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신비마마께서 피가 멈추지 않으십니다. 신은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사오니 다른 태의를 불러보십시오!”

“뭬야?”

황제가 진노했다.

“네가 부인과에서 최고이지 않으냐? 그저 유산일 뿐인데 왜 이러느냐?”

“약을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장 원판이 말했다.

“신이 침을 놓아 보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은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에요! 신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어요!”

태후가 제때 말을 꺼냈다.

황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즉시 지시했다.

“빨리 태의원에 가서 당직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그리고 원사(*院使: 태의원에 배치된 관리, 정5품)와 원판(*院判: 태의원에 배치된 관리, 정6품)도 모두 궁으로 들어오라고 해라!”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전 안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리고 사람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

황제가 몹시 놀라 연거푸 물었다.

“신비는 어떻게 됐느냐? 신비가 어떻게 됐어?”

춘효가 울면서 뛰쳐나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폐하, 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죽었다고? 이렇게 죽었다고?”

황제는 넋이 나가버렸다.

그의 후궁전은 비록 총애를 다투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체로 평안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후궁전에서 뜻밖에 사람이 죽은 것도 모자라 시신 하나에 죽은 사람은 둘이었다!

황제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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