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87)화 (287/385)
  • 287화. 눈 오는 밤 난롯가에 둘러앉아

    오후 무렵의 장복궁은 아주 고요했다.

    옥비는 궁녀의 배웅을 받으며 침전을 나왔다.

    그녀는 눈으로 정전을 훑어보면서 신비가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전 문밖에는 궁녀 두 명만이 지키고 서 있었고 안에는 아예 사람이 없었다.

    ‘이거 참 편리하군…….’

    옥비가 문 앞에 도착하자 정전 밖에서 궁녀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왔다. 옥비와 궁녀를 본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춘효(春晓) 언니! 왕 상궁께서 오셨어요.”

    신비의 심복 궁녀는 그 말을 듣고 황급히 옥비에게 사과했다.

    “옥비마마, 태후께서 상황을 확인하려 사람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쇤네가…….”

    “가보거라.”

    옥비가 웃음을 머금고 그녀의 말을 끊었다.

    “태후마마께서 신비마마를 걱정하고 계시니 왕 상궁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라.”

    대춘효는 다른 사람을 불러다 옥비를 전송하려던 차에 옥비의 말을 듣고 안도했다.

    “금벽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몇 발자국 정도는 본궁 혼자 가도 된다.”

    궁을 나가는 것이 정말로 몇 발자국밖에 남지 않아 춘효도 옥비의 말을 따랐다.

    “예, 쇤네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춘효가 떠나자마자 옆에 있는 차 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왕 상궁께서 오셨어요?”

    이건 지온의 목소리였다.

    “예.”

    옥비는 궁녀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밖에 계십니다.”

    “그럼 나는 만나러 가봐야겠네요. 잘 보고 있어요. 마마께서 이따가 드실 약이니까 대충 하면 안 돼요.”

    “예.”

    차 방에서 나온 지온은 옥비에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고는 황급히 가버렸다.

    옥비는 잠시 서 있다가 살금살금 차 방 입구로 가보았다. 안에는 방금 지온에게 대답한 궁녀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였다.

    옥비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는 손목에 있는 진주 팔찌를 잡고 실을 힘껏 잡아당겨 끊었다.

    진주가 푸른 벽돌 위에 떨어지는 낭랑한 소리가 대번에 궁녀의 주의를 끌었다.

    “어머나!”

    옥비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진주를 고민스럽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밀며 나오는 궁녀를 보고 그녀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본궁의 팔찌가 끊어졌으니 빨리 와서 주워라.”

    궁녀는 망설였다.

    “옥비마마, 그런데 소인은 이걸 달이고…….” 

    “어서.”

    옥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 진주 팔찌는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인 데다가 남해에서 바친 진상품이라 잃어버리면 안 된다.”

    궁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와서 옥비를 도와주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옥비가 하나씩 가리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주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모두 스물일곱 개인데 아직 두 개가 모자라.”

    궁녀는 돌아가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옥비마마, 소인은……”

    “아, 저기 있구나. 굴러갔잖아!”

    옥비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밖을 가리켰다.

    “빨리, 계단 밑에 가서 찾아보아라.”

    궁녀는 하는 수 없이 궁문 밖으로 나가 계단 밑으로 가서 진주를 찾기 시작했다.

    옥비는 이 틈을 타 차 방으로 들어갔다. 옥비는 한눈에 바로 난로 위에 끓고 있는 약탕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품속에서 도자기병을 꺼내 재빨리 병마개를 뽑고 알약 두 알을 던져 넣었다.

    그녀는 신비가 두 모금 마시고 토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병 안에 있는 알약을 아예 다 털어 넣고는 옆에 있는 오수통에 도자기병을 던졌다.

    그녀는 차 방에서 나와 큰 소리로 물었다.

    “찾았느냐?”

    “찾았습니다.”

    궁녀가 일어나자 마침 옥비가 문에 기대어 이쪽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옥비마마, 여기 있습니다.”

    * * *

    지온이 돌아왔을 때 옥비는 한참 남은 진주를 줍고 있었다.

    “마마.”

    옥비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없는가?”

    “예, 왕 상궁이 신비마마의 상황을 물으러 왔습니다.”

    지온은 대답하고 난 뒤 먼저 실례한다고 인사하고 차 방에 들어가 약을 확인했다.

    옥비는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었다.

    “계속 지키고 있었지?”

    “지온 소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소인이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물은 넣었어?”

    “방금 넣었습니다.”

    “잘했어, 계속 지켜봐.”

    옥비는 천천히 궁을 나서며 금벽이 맞이하러 오는 것을 보았다.

    “마마.”

    그녀는 미소 지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게 말했다.

    “돌아가자.”

    “예.”

    * * *

    영수궁으로 돌아와 옥비는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해는 이미 저물고 밖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 오는구나, 춥다!”

    옥비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금벽이 다가가서 그녀에게 모피를 걸쳐주었다.

    “마마, 또 아프시지 않게 옷을 잘 챙겨 입으십시오.”

    옥비가 웃으며 옷을 여미고 말했다.

    “저녁 무렵에 하늘에선 눈이 내리니 한 잔을 안 할 수 없지. 이럴 때는 훠궈(锅子)에다가 소주(*小酒: 따뜻한 계절에 빨리 빚은 약한 술)를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금벽아, 어선방에다 훠궈를 만들어 오라고 하고 고 미인(美人)하고 계 재인(才人)하고 비빈 몇 명한테 한잔하자고 초대를 넣어라.”

    금벽이 망설였다.

    “마마, 그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곧 밤인데 폐하께서 오시기라도 하면…….”

    옥비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마 신비 쪽으로 가실 게다. 만약에 오시면 같이 한잔하면 되지!”

    그러면 다른 비빈들만 덕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벽은 속으로 마마께서는 너무 호의적이라고 투덜댔다.

    하지만 주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시녀인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러 갔다. 

    얼마 후, 비빈 몇 명이 초대에 응해 왔다.

    밖에는 가는 눈이 오고, 난각(暖阁)에는 저녁밥이 차려져 있고, 방안에는 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옥비가 창문을 열라고 명령하자 등불의 불빛이 밖을 비췄다. 그 불빛에 눈송이의 은은한 은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모습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비빈 몇 명이 들어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난롯가에 앉아 눈을 구경하다니, 정말 우아한 멋이 있네요!”

    “옥비 언니가 똑똑하신 거지요. 이 대나무 발을 보세요. 이런 등불을 다른 사람이 생각해 낼 수나 있겠어요?”

    “그러게요. 우리였으면, 그냥 문을 닫아걸고 훠궈나 먹었겠죠.”

    “식탐이 많아서 그런 것 아니고요? 그럼 우린 부르지 말고 혼자 먹어요.”

    비빈들이 서로 농담하며 장난쳤다.

    옥비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됐어, 자네들 말만 하지 말고 어서 앉아서 드시게. 내가 아직 저녁도 안 먹어서 배가 고파!”

    “호호호, 알고 보니 제일 식탐이 많은 게 바로 옥비 언니였군요!”

    비빈이 순서대로 자리에 앉아 솥을 둘러싸고 담소를 나누며 서로 술을 권했다.

    음식을 먹다가 고 미인이 갑자기 감동한 듯 말했다.

    “예전에는 옥비 언니가 성격이 도도해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었어요. 지금 와서 보니 옥비 언니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처음에 잘 모르고 몇 년이나 허송세월 한 것이 참 안타깝네요.”

    옆에 있던 계 재인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누가 아니래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시커먼 사람들이 많은데, 옥비 언니는 하필이면 딱 그 반대라 겉으로는 사귀기 어려워 보이지만, 마음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에요.”

    옥비가 빙그레 웃었다.

    “아부 그만들 하시게, 조금만 더 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먹겠어.”

    두 사람이 냄비를 보니, 정말 그랬다. 그녀들이 말하는 사이에 냄비 안의 맛있는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집어가고 없었다.

    고 미인이 소리쳤다.

    “아이고! 내 새우! 너희들 너무한 거 아니니? 하나도 안 남기고, 지금 싱싱한 새우가 얼마나 귀한데!”

    “그러니까요, 이런 추운 날씨에 생선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옥비 언니한테 와야만 맛볼 수 있는 거라고요.”

    “내 거 좀 남겨줘, 좀 남겨 달라고!”

    난각 안은 시끌벅적했다. 옥비는 웃음을 머금고 잠시 그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들어 눈 내리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 띤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제 시간이 거의 되지 않았나? 장복궁에서 소식이 있을 때가 되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정말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내시가 눈보라를 뚫고 와 영수궁 문을 두드렸다.

    “폐하의 명입니다. 옥비마마께서는 장복궁으로 들라십니다!”

    난각 안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고 미인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벌써 밤이 다 됐는데 왜 옥비 언니를 장복궁으로 부르시는 거죠?”

    비빈 몇 명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폐하께서 밤에 신비에게 가셨는데 어찌 다른 비빈을 부르신단 말인가?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신비의 상황이 특별한지라 황제가 한밤중에 옥비를 불러 신비를 거슬리게 할 이유가 없었다.

    명령을 전하러 온 태감이 기다리다가 짜증이 났는지 재촉하기 시작했다.

    “옥비마마, 폐하와 태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빨리 오십시오.”

    비빈들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태후도 계시다고? 그러면 더 이상한데.’

    금벽이 나서서 태감에게 작은 돈주머니를 찔러주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도 공공(公公),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왜 갑자기 우리 마마를 장복궁으로 부르시는 거예요?”

    태감이 주머니를 되돌려주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소인도 그저 명령을 받드는 것뿐이니 옥비마마께서 가시면 자연히 알게 될 거요.”

    “도 공공…….”

    “금벽아!”

    옥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괜히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라. 폐하의 명이니 본궁이 가면 될 일이야.”

    옥비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 공공, 잠깐만 기다리게. 본궁은 가서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도 공공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폐하와 태후께서 따로 격식을 따지지 않으실 겁니다. 어서 가시지요.”

    옥비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가세.”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사과했다.

    “동생들은 먼저 돌아들 가시게. 나는 일이 있어서 자네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겠어.”

    비빈 몇 명이 연이어 말했다.

    “옥비 언니 어서 가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옥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벽이 걸쳐주는 모피를 입었다. 그녀는 눈보라를 헤치며 장복궁으로 갔다.

    궁의 주인이 떠나버리자 비빈들은 더는 술자리를 즐기기도 어색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신비가 유산했대요!”

    비빈들은 오싹 소름이 끼쳐 얼굴색이 변했다.

    ‘두 번째야, 벌써 두 번째라고.’

    지난번에는 현비였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취미궁은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지? 옥비?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워져서 비빈 몇몇은 쭈뼛쭈뼛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니들, 저, 저 먼저 갈게요.”

    “계 동생!”

    고 미인이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옥비 언니가 지금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네는 소식도 안 기다리겠다는 거야?”

    계 재인은 손수건을 움켜쥔 채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가문도 평범하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닌데요.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어머니는 쓰러지실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언니들은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

    그녀가 가버리는 것을 보고 고 미인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자네들 쟤 좀 보게. 아직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바로 안면몰수하다니. 처소에 숯이 모자란다고 옥비 언니가 자기 것도 계 미인의 처소에 갖다 주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아이고! 곽(郭) 동생?”

    또 다른 미인도 일어나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저, 저도 돌아 가볼게요. 고 언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건 너무 큰일이라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자네……!”

    곽 미인도 돌아서서 황급히 가버렸다.

    고 미인은 화가 나서 마지막 남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자네도 가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고 언니랑 여기서 기다릴게요.”

    고 미인은 그 말에 안심한 듯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그래도 자네는 양심이 있어 다행이야.”

    고 미인이 무언가 생각하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도 아까 장복궁에 갔었고 옥비 언니는 방금까지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잖아. 정말로 의심을 받는다면 우리가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을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