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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86)화 (286/385)
  • 286화. 마음의 변화

    옥비는 정실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도자기병을 쥐고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내리깔았다. 

    “마마.”

    금벽이 들어왔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옥비는 고개를 저었다.

    “본궁이 입맛이 없구나.”

    금벽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안 드십니까? 요즘 입맛이 너무 떨어지셨는데 태의를 불러볼까요?”

    “됐다.”

    옥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위로하는 모습이었다.

    “본궁은 괜찮다. 겨울이 되어 좀 나른할 뿐이야.”

    금벽은 그 말을 듣고 별다른 의심 없이 투덜댔다.

    “마마께서는 계속 못 드시는데 신비께서는 오히려 입맛이 너무 좋으시네요. 하필이면 모두가 그쪽으로 관심이 쏠려서 마마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똑같겠느냐? 신비가 황손을 품고 있으니 당연히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게지.”

    그런 사정이야 금벽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양쪽이 너무 심하게 비교되니 마음속으로 격차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비가 임신한 후부터 폐하는 영수궁에 오지 않았다.

    “마마…….”

    애석하게도 옥비는 이번에는 금벽과는 거리를 두고 현실을 똑똑히 인식했다. 옥비는 이런 일로 이제는 상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금벽아, 신비가 그 아이를 잘 품고 있다고?”

    그녀의 질문에 금벽은 어리둥절했다.

    옥비는 그녀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혼잣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지. 밧줄 때문에 놀랐기로서니 장 원판에게 진료를 받고서야 태아를 지킬 수 있었다니, 그다지 안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구나.”

    금벽이 대답했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장 원판이 아이가 배 속에 들어앉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금벽은 마음속으로 신비가 아이를 지키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모시는 마마께서 황제의 장자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옥비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기침만 해도 유산이 된다던데, 설마 신비가 그런 체질인가? 평소에 봤을 때는 잘 모르겠던데.”

    금벽이 말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현비마마께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마마께서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다른 말도 할 수도 있었다.

    옥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신비가 진짜로 유산하더라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금벽아!”

    옥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정리하고 장복궁으로 가자.”

    “마마?”

    옥비는 그 도자기병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입꼬리를 올렸다.

    “신비가 지금 태아 때문에 침대에 누워만 있으니 틀림없이 심심할 게야. 본궁이 자주 문안을 가면 그래도 좀 도움이 되지 않겠니.”

    금벽은 이 말에 잠시 얼이 빠졌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마께서는 정말 마음이 선량하신 분이시구나. 이런 때에도 여전히 신비를 염려하고 계시다니. 그런데 나는 신비가 유산하기나 바라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어.’

    두 사람이 정실을 나가자 때마침 추아가 급하게 지나갔다.

    “추아!”

    금벽이 소리쳤다.

    추아는 비틀거리다 걸음을 멈추었는데 아주 급한 모양이었다.

    “너 요즘 왜 그래?”

    금벽이 의심하며 말했다.

    “마마도 제대로 안 모시고 농땡이 치는 거야?”

    추아가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손수건을 배배 꼬았다.

    “아니에요, 금벽 언니…….”

    “그럼 왜 그래?”

    금벽이 추궁했다.

    추아가 쭈뼛거리며 옥비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을 더듬었다.

    “소인, 소인이 지난번에 마마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 마마께서 열이 나신 것이 너무 죄송하여…….”

    금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마마께서 그런 사소한 일을 문제 삼으실 거 같니? 됐어, 빨리 정리하고 마마를 모시고 장복궁으로 가자.”

    “예…….”

    추아가 옥비의 곁을 지나갈 때 옥비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그만 것이 생각은 많구나. 본궁은 너를 탓하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만약 예전이었다면 추아는 틀림없이 마마의 너그러움에 감동하여 마마 대신 죽어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아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멍하니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마마를 잘 모시겠습니다.”

    옥비는 웃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돌아갔다.

    추아는 그녀들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능양진인이 왔던 그날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 약은 얼마나 먹어야 하느냐?”

    “최소한 한 알, 두 알이 제일 좋습니다.”

    “얼마 지나야 발작하는가?”

    “빠르면 한 시간 정도인데,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알겠다. 주지가 수고가 많았네…….”

    하지만 그 이후 추아는 어떤 약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 속으로 추측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대체 무슨 약이었을까?’

    * * *

    장복궁에 도착한 옥비는 류명주도 거기 있는 것을 발견했다.

    “류 동생, 자네도 왔나?”

    그녀가 웃음을 머금고 인사했다.

    류명주가 일어나서 예를 표했다.

    “옥비 언니.”

    그녀를 안내한 궁녀가 말했다.

    “두 마마께서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희 마마께서 방금 일어나셔서 지금 소세를 하고 계십니다.”

    옥비가 웃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지, 우리끼리 잠깐 얘기나 하세.”

    궁녀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두 사람이 몇 마디 잡담을 나누는데 밖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어떤 사람이 뭐라고 몇 마디 했는데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곧이어 궁녀 두 명이 차 방에서 돌아왔다. 하나는 눈물을 훔치고 다른 하나는 위로하고 있었다.

    “울지 마, 그 소저는 우리 궁 사람도 아니니 며칠 있으면 돌아갈 거야.”

    눈물을 흘리는 궁녀가 말했다.

    “그냥 화가 나서 그래! 저 소저는 자기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태후마마의 말 한마디를 등에 업고 사사건건 우리 궁의 일에 끼어들잖아. 방금도 분명히 단아가 나한테 부딪쳤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하잖아.”

    “누군 그 소저더러 명을 받고 오라고 했겠어? 그래도 우리가 손님과 다투면 안 되잖아? 네가 참아…….”

    그녀들은 이쪽에 손님이 있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몇 마디 하더니 가버렸다.

    옥비가 눈을 찌푸리며 어떻게 에둘러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류명주를 시중드는 궁녀에게 그냥 대놓고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게야?”

    궁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난처한 듯 말했다.

    “아마도 지온 소저 같습니다…….”

    류명주가 황급히 물었다.

    “지온 소저? 이게 무슨 소리야? 태후마마께서 신비 언니를 돌보라고 보내신 것 아닌가? 왜 싸웠는가?”

    “싸웠다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궁녀가 완곡하게 말했다.

    “그저 지온 소저는 요구가 너무 엄격하고 우리 궁은 여태껏 좀 느슨했던 지라 소저의 요구에 못 미치는 때가 있어서…….”

    ‘아, 그녀가 태후의 힘을 등에 업고 간섭하는 것이 싫다는 게로군?’

    류명주가 지온을 대신해서 해명했다.

    “지온 소저도 명을 받들어 오게 된 것이니 아마 유달리 긴장했을 거야. 그것 또한 신비 언니에게 잘하기 위함이니 너희들이 많이 이해해 주도록 해라.”

    궁녀는 그녀가 신비 앞에 가서 고자질할까 봐 연거푸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수를 마친 신비가 사람을 보내 그녀들을 안으로 청했다.

    류명주와 옥비가 앞뒤로 침전에 들어섰다.

    신비는 침대에 기대어 약간 창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두 동생이 좀 양해해주게. 장 원판이 며칠 더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고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예의를 차리지 못하네.”

    옥비가 대답했다.

    “신비 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언니 상황을 모르겠어요? 언니는 그냥 누워 계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옥비는 신비의 이불 귀퉁이를 잘 다독여 덮어주었다.

    신비가 힘없는 말투로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옥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언니는 평소에 건강하셨잖아요,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안 좋은 거예요?”

    신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게 이상하네. 아무래도 배 속에 태아가 들어앉은 모양새가 안 좋은 것 같아. 이 보태약(*保胎药: 태아를 보호하는 약)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어서 입에서 쓴맛이 다 난다네.”

    이런 대화를 하는 도중 지온이 들어왔다.

    “신비마마, 약 드십시오.”

    신비가 그녀를 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점심에 먹었잖느냐? 뭘 또 먹으라고?”

    지온은 웃고 있었지만 고집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마마께서 점심에 두 모금 마시고 토하셨으니, 꼭 이 약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말을 마친 지온이 뒤를 힐끗 보자 궁녀가 약사발을 올렸다.

    신비는 이 냄새만 맡으면 토하고 싶어졌다.

    점심에는 입덧을 핑계로 입에만 살짝 묻혔다가 토해버렸다. 그걸로 얼렁뚱땅 넘어갈 줄 알았는데 지온이 이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며 약을 먹일 줄은 몰랐다.

    “지온 소저…….”

    그녀는 여전히 약을 먹지 않으려고 버텼다.

    지온은 약사발을 건네받아 온도를 확인해 보고 직접 그녀에게 먹였다.

    “이것은 보태약이니 마마께서 안 내키신다고 드시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류명주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언니. 용종이 중요하니 맛이 없어도 좀 참아보세요.”

    옥비도 동조했다.

    신비는 눈물이 다 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그녀가 주는 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 너무 쓰다! 이렇게 쓴 약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런 잔꾀를 부리지는 않았을 텐데.’

    두 모금을 마시자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괜찮으시지요?”

    “안 괜찮네.”

    지온이 말했다.

    “신녀가 잠시도 떠나지 않고 두 시진 동안 지키며 만든 약이옵니다. 마마, 어서 드십시오.”

    신비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두 모금을 더 마시고는 토기가 올라오는 척하며 약사발을 밀어냈다.

    어떤 궁녀는 가래통을 들고 어떤 궁녀는 차를 든 채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궁녀들의 일이 끝나자 지온이 또 나섰다.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마마, 조금만 더 드세요.”

    신비는 울 것 같았다. 

    ‘아직도 안 끝난 거야? 이걸 먹어도 문제가 없을까? 나중에 장 원판한테 좀 물어봐야겠어.’

    지온은 이미 그러기로 결심한 듯 기어코 약을 그녀에게 전부 먹였다. 신비가 토하려고 하자 토하게 한 뒤 다시 먹였다. 한 사발이 모두 바닥이 난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일어나 인사를 하고 천천히 나갔다.

    신비는 곧 탈진할 것 같았다.

    가짜 병이 진짜 병보다 더 힘들었다.

    류명주가 그녀의 지친 모습을 보고 얼른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류명주가 눈을 돌려 옥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치 산처럼 우뚝 지키고 앉아 있는 옥비는 전혀 갈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류명주는 혼자서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신비는 피곤한 척을 하며 류명주가 가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옥비 동생도 여기서 지키고 있을 필요 없네, 자네도 놀러 가시게.”

    옥비가 빙그레 웃었다.

    “뭐 놀 만한 것이 있긴 한가요? 종일 마작만 할 수도 없잖아요? 차라리 여기 앉아서 언니랑 얘기나 좀 하겠습니다.”

    신비는 그녀를 응대하는 것이 귀찮아 아예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내가 좀 졸려서 그러네. 요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핏하면 졸려.”

    “그럼 언니 주무세요.”

    옥비가 마침내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신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으며 말했다.

    “와줘서 고맙네, 본궁이 몸이 불편해 배웅하지는 못하겠어.”

    옥비가 몸을 낮추며 인사했다.

    “언니는 편안히 몸조리하세요. 동생은 이만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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