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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85)화 (285/385)
  • 285화. 상전의 명을 구실로 삼아

    장복궁을 나온 류명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다.

    ‘신비가 임신한 아이가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어. 지금 또 이런 일이 생겨서 지온 소저가 남게 됐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마마?”

    향설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불렀다.

    류명주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마에 올랐다.

    ‘장복궁을 잘 주시해야겠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소식을 전해야지.’

    * * *

    뒤이어 황후도 나와 아무 말 없이 화춘궁으로 돌아갔다.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손을 휘저어 대문을 닫으라고 하고는 심복 궁녀만 남기고 다 내보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네 생각에 신비와 태후가 좀 이상하지 않으냐?”

    대씨 성을 지닌 심복 궁녀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다니요?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서 말씀해주십시오.”

    황후가 말했다.

    “태후께서 신비의 복중 용종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으신 듯하구나. 설령 지난번에 현비 때문에 놀라셨다고 하더라도, 오늘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맞아도 너무 잘 맞아.”

    “그, 그렇습니까?”

    “그 둘이 대화할 때를 생각해보아라.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있었느냐?”

    심복 궁녀가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말을 너무 빨리 주고받는 통에 황후조차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후께서 본궁도 못 믿으시면서 그 지온 소저를 믿었단 말이야.”

    심복 궁녀가 황급히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라 현비의 일 때문에 많이 놀라신 것 아니겠습니까.”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본궁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 지난번 현비에게 일이 생겼을 때 태후께서 중간에서 이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심씨 가문과 폐하와의 관계가 이렇게 친밀해지지는 못했을 거야. 이 점은 본궁이 태후께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지. 그래서 본궁이 더 이상하다는 거야. 지난번에는 호의를 베푸시더니 이번에는 왜 비빈들 앞에서 본궁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으셨을까?”

    “그건…….”

    “그리고 그 지온 소저 말이다, 신비가 이번에 놀란 것이 바로 그 소저 때문이지. 태후께서 복중의 아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그녀를 좀 더 멀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신선의 기운이 있다는 둥 붙이는 이유도 너무 억지스럽고 말이야. 본궁도 못 믿으시면서 태후께서는 왜 심복도 하나 보내지 않으시는 걸까? 청녕궁에 궁녀가 왕 상궁만 있는 것도 아닌데.”

    궁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태후마마와 신비가 지온 소저를 일부러 장복궁에 남겼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래서 뭘 하려는 걸까요? 지온 소저는 약혼했고 상대는 폐하께서 아끼는 신하라 절대로 황제의 총애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황후는 그쪽 방면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본궁이 이상하다는 거지. 총애를 받으려 했으면 신비가 벌써 800년 전에 하고도 남았지 지금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겠느냐.”

    심복 궁녀가 말했다.

    “그럼 지온 소저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아가씨 말고 다른 사람이 하긴 껄끄러운 일 말입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은 장복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사람을 보내 잘 보내서 지켜보거라. 며칠 부지런히 문안을 드리러 다니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든 우리 쪽에서 먼저 참견하지 말고, 수동적으로 말려들어서도 안 된다.”

    궁녀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느릿하게 자리에 앉는 황후의 마음이 무거웠다.

    ‘태후와 신비가 무슨 공통된 목표가 있는 걸까? 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 아니야, 만약 그게 나였으면, 오히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의심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야. 그럼 도대체 누구지?’

    * * *

    지온은 기왕 속죄하기로 했으니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날이 밝자 지온은 장복궁으로 가서 신비의 침전 밖에서 기다렸다. 오가는 궁녀와 내시들은 그녀를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전혀 어색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사시(*巳時: 아홉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마침내 신비가 일어났다.

    궁녀들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 신비는 몸치장을 다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자 밖으로 나오다가 지온을 발견했다.

    “지온 소저?”

    신비의 얼굴에 나타난 놀라움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찌 이렇게 일찍 왔는가?”

    지온이 인사를 하고 대답했다.

    “신녀가 이 임무에 응하였으니 감히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바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진도 넘게 기다린 것 아닌가? 이렇게 서서?”

    지온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대답했다.

    신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궁녀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은 대체 뭐 하는 게야? 지온 소저가 태후마마를 대신해서 본궁을 돌보러 왔는데, 손님 대접은 고사하고 의자도 하나 갖다 줄 줄 모르느냐?”

    궁녀들이 황급히 사죄했다.

    지온은 웃음을 머금고 보고 있을 뿐 그녀들을 위해 변명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신비는 이미 위세를 부려 놓았는데 지온이 전혀 말릴 생각을 안 하니 도로 물릴 수도 없고 난감했다. 결국 눈 딱 감고 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장복궁에 손님을 이리 푸대접하라는 규칙은 없다. 스스로 뺨을…….”

    그녀는 머리꼭지가 흔들릴 정도로 웃고 있는 지온을 흘겨보았다. 신비는 두어 번 말을 삼키며 수량을 바꿨다.

    “열 대.”

    “마, 마마?”

    궁녀들이 말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원래 이러기로 얘기되었던 것 아니었어? 왜 벌을 받아야 하지? 열 대는 너무 많잖아!’

    신비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들었느냐?”

    ‘좀 냉담하게 굴라고 했지, 언제 사람을 한 시진 넘게 세워두라고 했느냐, 이 융통성 없는 것들!’

    궁녀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뺨을 연거푸 내리치기 시작했다.

    살살 때리려고 했지만, 지온이 저렇게 웃으며 보고 있으니 이를 악물고 힘껏 때릴 수밖에 없었다.

    짝! 짝! 짝!

    방안에서 일정하게 손바닥으로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소리가 난 후 궁녀들이 아직 손도 다 내려놓지 않았는데 지온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마마, 화내지 마십시오. 신녀가 조금 서 있었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궁녀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좀 더 일찍 부탁해 줄 수 있었잖아?’ 

    궁녀들은 맞은 얼굴이 아프고 마음이 분해서 눈물이 나왔다.

    신비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이 지온 소저가 겉으로는 유순하고 겸손해 보이지만 속은 아주 야무져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보아하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마마, 식사하십시오.”

    지온이 말했다.

    “날씨가 추워서 음식이 빨리 식을지도 모릅니다.”

    신비가 허망하게 웃으며 지온을 초대했다.

    “지온 소저도 같이 들겠나?”

    “감사합니다, 마마. 신녀는 이미 먹었습니다.”

    “그럼…….”

    신비가 젓가락을 들고 궁녀들에게 호통쳤다.

    “너희는 아직도 우두커니 서서 뭘 하고 있느냐? 자리를 만들어 주고 차를 올려라!”

    “예.”

    방금 뺨을 맞은 궁녀들은 더는 태만하게 굴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의자를 갖다 주고, 어떤 이는 차를 올리고 또 다른 이는 손난로까지 지온에게 갖다 주었다. 

    지온은 마침내 손님처럼 손난로를 들고 차를 마시며 그곳에 앉아서 신비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비는 지온이 계속 쳐다보는 통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져 급히 밥을 먹고는 바로 들어가 쉬겠다고 말했다.

    지온이 그녀를 불렀다.

    “마마,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신비가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온이 말했다.

    “신녀, 명을 받들어 마마를 보살피러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마침 제가 의술을 조금 알고 있으니 제가 약을 달여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비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가식적으로 웃었다.

    “그런 일로 지온 소저를 귀찮게 할 수 있나? 본궁에게도 일 시킬 사람이 많이 있네.”

    지온이 바로 덧붙였다.

    “그럼 마침 잘됐습니다. 신녀는 힘든 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약 달이는 건 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신비는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신비는 지온이 탕약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계집애가 상전의 명을 구실 삼아 탕약에 손을 뻗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하지 못했다. 

    ‘이건 승낙 안 할 수가 없겠는데, 이 계집애가 이것저것 묻고 다니면 어쩌지? 그래도 거절할 수는 없잖아, 어쨌든 태후가 보낸 사람인데.’

    붙잡힌 신비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두어 번 웃기만 했다.

    지온은 이 웃음을 그녀가 동의했다 여기고 궁인에게 물었다.

    “고고, 궁 안에 마마의 약방문 사본이 있죠? 좀 갖다 줄래요?”

    “아이고…….”

    신비는 조급해졌다. 

    ‘왜 약방문을 보려고 하는 거지?’

    신비가 앓는 소리를 내자 지온이 신비를 돌아보며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분부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신비는 할 말이 없었다. 

    ‘못 보게 해야 하나? 그러면 아마 또 태후마마를 들먹이겠지. 됐다…….’

    “보려면 보게, 본궁은 그만 쉬러 가야겠네.”

    * * *

    지온은 약방문을 뒤져보고 또 신비가 먹는 음식과 평소 생활들을 물으며 정말 태후의 지시에 따라 정성껏 신비를 보살폈다. 

    사무를 맡아보는 고고는 별로 이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뭔가 핑계를 대서 거절하려고만 하면 지온이 태후를 들먹였다.

    장복궁은 주인의 마음이 모질지 않아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권력 다툼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온이 그들에게 몇 번 주먹을 휘두르고 나니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침전에서는 신비가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시큼한 매실을 버리고 대추 한 봉지를 뜯어 먹으면서 궁녀의 불평을 들었다.

    “지금 차 방에서 지온 소저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물이 너무 오래 끓고 약의 분량이 안 맞고 아주 엉망입니다. 마마, 그 소저는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정말 태후마마의 환심을 사려는 겁니까?”

    “본궁도 답답하다!”

    신비가 대추를 한 입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아이를 데려와서 처음부터 호된 맛을 보여줬는데, 어째서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지? 태후를 위해 정말 이렇게까지 충성스럽게 일을 한다고?”

    심복 궁녀가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 쪽에 협조하겠지요?”

    신비가 바로 잘라 말했다.

    “아니, 이 일은 행적이 드러나선 안 돼. 만일 그 구미호에게 들키면, 어쩌면 우리가 역적이 될지도 몰라.”

    대씨 성의 심복 궁녀가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너무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문이 무슨 근본 없는 집안도 아닌데요.”

    하지만 신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완(阮)씨 가문이 짓밟히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가문의 흥망성쇠가 한순간에 달려있는데, 완벽한 계책이란 것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저희는 계획했던 대로 하는 겁니까? 지온 소저가 다치면 어떡합니까?”

    심복 궁녀가 물었다.

    신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소달기(*苏妲己: 은나라 주왕의 귀비)의 교훈을 믿어봐야지.”

    말이 끝나자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배를 문질렀다.

    “차를 많이 마셨어, 관청에 전해라.”

    “예.”

    신비는 손으로 허리에 붙은 살을 주무르면서 물었다.

    “본궁이 요즘 많이 먹었는데, 살이 좀 찐 것 같니?”

    신비는 이 연기를 잘 해내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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