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84)화 (284/385)
  • 284화. 남겨둘 사람

    지온이 장복궁에 도착하자 궁녀가 앞으로 나가 통보했다.

    내시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지만, 하는 말은 오히려 상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말투였다.

    “마마께서 쉬고 계셔서 소인이 방해하기 곤란합니다. 지온 소저께서는 우선 돌아가시지요.”

    지온이 직접 앞으로 나섰다.

    “그럼 태후마마께서는요?”

    내시가 또 거절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제가 감히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녀를 데리고 온 궁녀는 주위의 비호의적인 눈빛에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온 소저, 아니면 우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온 소저?”

    지온이 뒤를 돌아보자 류명주가 가마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류 첩여.”

    내시가 예를 갖추고 인사했다.

    류명주가 말했다.

    “본궁이 특별히 신비마마를 문병하러 왔으니 아뢰어 주시게.”

    내시는 지온의 손을 잡은 그녀를 곁눈질로 보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예.”

    내시가 보고하는 틈을 타 류명주가 지온을 끌고 뒤로 물러나 가마 뒤에 숨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신비가 놀라서 병이 났다면서요?”

    지온이 대답했다.

    “그렇다더군요.”

    류명주가 그녀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 조급해하며 말했다.

    “어째서 전혀 걱정을 안 하시는 건가요? 만일 신비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태후와 폐하께서 반드시 죄를 물을 거예요.”

    지온은 그저 웃기만 했다.

    “신비마마께선 별일 없을 거예요.”

    “소저…….”

    류명주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저, 이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무슨 내막이 있는 거 아니에요?”

    지온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빛을 보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류명주가 아직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내시가 밖으로 나왔다.

    “류 첩여, 들어오십시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의혹을 잠시 내려놓고 지온을 데리고 장복궁으로 들어갔다.

    내시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못 들어가게 막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궁전에 들어서자 태후와 황제가 모두 있었다.

    그녀들이 인사를 하자 태후가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이쪽은 별일 없으니 돌아가세요.”

    “어머니…….”

    황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태후가 말했다.

    “장 원판도 있고 본궁도 지키고 있는데 폐하는 무슨 걱정인가요?”

    황제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어머니께서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소자는 먼저 정무를 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지온과 류명주가 공손히 배웅했다.

    황제는 그녀들의 곁을 지나치며 지온과 눈을 한 번 맞추고는 안심하고 떠났다.

    황제가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황제는 우연히 황후와 만났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사죄했다.

    “폐하, 송구합니다. 신첩이 한발 늦어 신비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그녀를 부축하며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황후와 무슨 상관이 있겠소? 황후도 궁무를 처리하려면 책상에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하지 않소. 게다가 신비는 아무렇지도 않소.”

    황후가 막 자세히 물어보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마마님들이 오셨다고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옥비가 한 무리의 미인들을 이끌고 왔다.

    “신첩, 폐하와 마마를 뵙습니다.”

    “예를 거두시오.”

    옥비가 일어나며 친절한 말투로 물었다.

    “신첩,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는데, 갑자기 신비 언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왔습니다. 폐하, 신비 언니는 괜찮으시지요?”

    황제가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

    “별일 없소, 비빈들이 아주 세심하구려.”

    “그렇군요…….”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황후, 이쪽은 당신에게 맡기겠소.”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를 배웅합니다.”

    황제가 떠나자 황후는 비빈을 이끌고 전전(*前殿: 정전 앞의 공간)에 들어가 태후에게 문안을 드렸다.

    다들 한바탕 인사를 하는 통에 지온은 말을 할 겨를이 없어, 한쪽으로 비켜서서 태후와 비빈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태후가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신비는 지금 쉬고 있으니 너희들은 들어가지 말아라. 별일 없으니 이리 부산 떨 필요 없다.”

    비빈들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녀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태후께서 이러시는 것을 보니 정말 아무 일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한테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니 비빈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침전 쪽으로 돌아갔다.

    ‘신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냥 깜짝 놀란 거 아닌가? 그거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심각할 수가 있지? 신비는 계속 건강했는데, 이런 일로 태아가 불안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황후가 온유한 목소리로 권했다.

    “신비가 무사하다니 신첩, 정말 안심이 됩니다. 어머니께서는 몸도 안 좋으신데 어서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신첩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태후는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쁘지. 이렇게 큰 후궁의 그 많은 사무를 다 자네가 처리하고 있지 않나. 나처럼 한가한 사람이 힘을 보태야지.”

    “하지만 마마가 염려되어 신첩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태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앞에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을 때 옥비는 뒤에 있는 두 미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태후마마께서 신비 언니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봐요.”

    “당연하죠, 후궁에서 정말 목 빠지게 기다렸던 황자잖아요.”

    두 미인은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옥비는 남몰래 고개를 숙이고 비웃었다.

    ‘황후마저 막으시는 걸 보니 태후께서 신비의 아이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계시는가 보군!’

    이런 말들을 하고 있을 때 신비의 수행 궁녀가 나와서 보고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 신비마마께서 깨어나셨습니다.”

    태후가 기뻐하며 일어났다.

    “장 원판은? 얼른 와서 신비를 진맥하라고 하거라.”

    “예.”

    편전에서 기다리던 장 원판이 급히 약상자를 들고 왔다.

    태후와 황후가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비빈들은 눈치를 보며 머뭇대다가 옥비가 먼저 발을 들여놓자 그제 서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지온도 류명주를 따라 그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침전은 드리워진 주렴으로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주렴 너머로 희미하게 신비가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장 원판이 그녀의 맥을 짚고 있었고 태후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황후는 태후의 옆에 서 있고 궁녀들은 한쪽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마침내 장 원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후마마, 안심하십시오. 신비마마께서는 괜찮으십니다.”

    태후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그 말은, 태아가 무사하다는 건가?”

    장 원판이 대답했다.

    “예. 하지만 신비마마께서는 좀 더 쉬셔야 합니다. 태아가 들어앉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이번 달과 다음 달은 태아가 너무 작아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궁녀에게 당부했다.

    “너희들도 들었지? 조심해서 모시거라.”

    “예.”

    황후가 말했다.

    “어머니, 이제 안심이 되시지요? 신비는 신첩이 여기 남아서 돌볼 테니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서 쉬십시오!”

    태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네 할 일도 많지 않으냐, 되었다.”

    “그래도 어머님의 건강이…….”

    “나처럼 나이가 들면 조그만 병 하나둘쯤은 생기게 마련이야. 별 것 아니다.”

    황후가 더 권할 수 없어 그만두려는데, 뜻밖에 신비가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장 원판이 괜찮다고 하니 안심하십시오.”

    “내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태후가 근심과 원망이 뒤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 점심때 네가 펄쩍펄쩍 뛰는 것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 결국엔 이리 황당하게 놀라서 몸져누웠지 않느냐.”

    신비가 무안한 표정으로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돌아갈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아니면 다른 사람을 남겨두시겠습니까? 저 때문에 마마께서 피곤해지실까 봐 신첩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두 사람이 계속 권유하자 태후도 태도가 조금 누그러져 주저하며 말했다.

    “그럼 왕 상궁을 남겨둘까?”

    황후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비가 거절했다.

    “왕 상궁을 어떻게 남겨두겠습니까? 태후마마께서 가장 편하게 여기는 사람인데요. 여기 남으면 태후마마께서 다른 궁녀의 시중을 받으셔야 하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남는 건 내가 마음이 놓이질 않아!”

    신비가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더니 갑작스레 말했다.

    “지온 소저, 여기 있나?”

    비빈들이 그 말을 듣고 멍한 표정으로 일제히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도 어리둥절했다.

    지온은 이 임무를 어떻게 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도중에 신비의 부름을 받았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앞으로 나와 드리워진 주렴에 대고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비마마, 신녀 여기 있습니다.”

    신비가 말했다.

    “어머님, 지온 소저를 남겨두면 어떻겠습니까? 소저가 화신의 제자라 몸에 신선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태후가 즉시 거절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저 아이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출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회임에 대해 알겠느냐? 하물며 겁도 많아서 밧줄을 보고도 뱀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네가 버텨내지 못할 게다.”

    그러자 신비가 태후의 손을 잡고 애교 반 부탁 반으로 말했다.

    “태후마마! 지온 소저가 일부러 놀라게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잘못 본 것 아닙니까? 한 번 호되게 경험했으니 또 경솔하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태후가 주저했다.

    “하지만…….”

    신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게다가 지온 소저가 의술을 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회임했을 때, 금하는 것들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태후는 그녀의 말에 설득당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지온 소저, 너는 어떠냐?”

    지온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비가 지금 나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지온 역시 원하는 바였으므로 당연히 응해야 했다. 

    “신녀는 신비마마께 사죄하러 왔습니다. 제가 놀란 것 때문에 마마께서 몹시 놀라셨기 때문입니다. 마마께서 신녀에게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주신다면 신녀, 당연히 엎드려 감사를 드려야지요.”

    신비가 웃으며 말했다.

    “마마, 보십시오. 신첩도 좋고, 지온 소저도 좋아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태후가 결국 허락하고는 신비의 손을 두드렸다.

    “그래! 네가 이리하겠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태후마마, 감사드립니다.”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지온 소저, 네가 남아서 신비를 보살피거라. 신비가 좀 좋아지면 너는 다시 청녕궁으로 돌아오고.”

    “예. 신녀, 명을 받들겠습니다.”

    태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됐다, 신비도 괜찮고, 너희들도 성의를 보였으니 모두 돌아가자. 사람이 너무 많으니 신비가 쉴 수 있게 떠들지 말아라.”

    비빈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신첩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비빈들이 나가자 태후가 말했다.

    “황후, 우리도 가자꾸나.”

    황후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침전에서 물러나기 전에 황후는 뒤돌아 신비를 쳐다보고 또 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잠자코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