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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83)화 (283/385)
  • 283화. 역시 문제가 있었어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정리하면서, 왕 상궁의 눈에 웃음이 가득 담겼다.

    ‘역시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니 좋구나, 마마께서도 전보다 많이 드셨어.’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한가로이 앉아 차를 마셨다.

    태후가 말했다.

    “네가 준 그 수면향이 좋더구나, 전에 처소에서 썼던 것보다 더 좋아.”

    지온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마마께서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태후는 그녀의 덤덤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답답했다.

    이 아가씨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며칠 전에 지온이 했던 말 때문에 그녀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큰 억울함 있다는 둥 대장공주의 명을 받고 왔다는 둥 하기에 태후는 혹시 아봉이 그녀를 보내 그 일을 말하려고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계속 지온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경전을 강의할 때 빼고는 시답잖은 잡담만 해서 태후를 아주 조급하게 만들었다.

    ‘말을 반만 하는 게 어디 있어? 도대체 말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태후는 고구마를 삼킨 듯이 답답한 마음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껏 속내를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 수면향은 현상만 치료하고 근본을 치료하지 못하니, 내가 아직 편안하게 잠을 못 자고 있다.”

    지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 서두르지 마십시오. 마음의 안정을 찾는 일을 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정신도 안정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음을 키우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네가 지난번에…….”

    태후가 말하는 도중, 밖에 궁녀가 와서 보고했다.

    “마마, 신비마마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태후가 정신을 차리고 지시했다.

    “난각(暖阁)에서 기다리라고 해라.”

    “예.”

    태후가 지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혼자 놀고 있거라, 청녕궁을 나갈 거면 반드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

    지온이 일어나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태후는 난각으로 갔다.

    지온은 신비가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몹시 아쉬워했다.

    ‘그런데 신비는 이런 때에 뭘 하러 왔을까?’

    지온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 태후가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나가지 않았다. 지온은 정자에 앉아 말린 과일을 먹으며 몰래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이쪽에서 태후와 신비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태후께서는 원래 비빈을 거의 만나지 않는 분이고, 신비는 지금 임신 중이라 태교에 힘써야 할 텐데, 까닭 없이 여기로 달려 왔다라…….’

    지온은 영수궁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태후의 반응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추측해보았다.

    아마도 지온이 영수궁에서 사고를 당할까 걱정되어 태후가 옥비를 경계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보아하니 태후가 신비의 공범은 아닐지 몰라도 사건의 정황은 알고 있는 사람은 분명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인데, 신비가 임신한 것은 사실일까?’

    반 시진쯤 앉아 있으니 신비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 지온도 일어나 슬그머니 문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비가 궁녀를 데리고 왔다.

    지온이 길가에 멈춰 서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신비마마.”

    신비가 웃으며 말했다.

    “지온 소저가 그동안 수고 많았네.”

    지온이 아주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

    “황송합니다, 태후마마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신비가 말했다.

    “아까 태후마마께서 자네가 세심하고 자상하다고 계속 칭찬하셨다네. 대장공주께서 정말 양녀를 잘 얻으셨구먼.”

    지온은 그저 웃기만 했다.

    “태후마마께서 너무 과찬을 하셔서 신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비는 이 아가씨가 꽤 흥미로웠다. 그녀가 만나 본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적지 않은데 지온처럼 태후마마의 칭찬에 담담한 사람은 없었다. 마치 이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신비가 막 무슨 말을 하려는데 지온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신비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뭐죠? 뱀인가? 뱀이 있습니다!”

    비명을 지른 지온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신비는 멍하니 있다 등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뱀? 뱀이 어디 있어?”

    “저기요!”

    신비가 지온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새까맣고 긴 것이 나무 밑에 누워있었다. 갑자기 신비는 펄쩍 뛰며 악, 소리를 지르더니 재빨리 계단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움직임에 궁녀들도 놀랐다.

    모두 깜짝 놀라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으려 하다가 어쩔 수 없어 용기를 내어 주인 앞을 막아섰다.

    “뱀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요?”

    지온은 신비의 곁에 딱 붙어 그녀의 손을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저거 아니에요? 머리가 보였어요!”

    담이 큰 내시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조심스럽게 찾아보다가 그것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뱀이 아니라 밧줄입니다. 누가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니 뱀이랑 비슷합니다.”

    “밧줄?”

    신비의 궁녀가 대담하게 나가서 보더니 역시 밧줄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 돌리며 말했다.

    “마마,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진짜 밧줄입니다.”

    신비는 내시가 끄집어낸 밧줄을 자세히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가슴을 치며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말했다.

    “본궁이 아주 기절할 뻔했구나!”

    지온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신비마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어떻게 되었는지 밧줄이 뱀으로 보여서 마마를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참, 몸은 어떠십니까? 혹시 놀라서 몸이라도 상하셨으면 신녀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온의 말에 신비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급히 배를 움켜쥐고 말했다.

    “괜찮네. 본궁이 원래 튼튼한 편이라, 그리 나약하지 않네.”

    그러고는 급히 궁녀를 불렀다.

    “돌아가자.”

    황급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지온의 얼굴에 송구스러워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이 드러났다.

    역시 신비의 회임에는 문제가 있었다.

    * * *

    장복궁의 문이 닫히자 신비가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망했네, 망했어. 방금 완전히 잊고 있었어. 이제 어떡하지? 들키지 않았을까?”

    ‘임신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민첩할 수 있겠는가? 그때 배를 보호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궁녀가 다급히 위로했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뱀이 있다는데 놀라는 것이 당연하지요. 솔직히 따져보면, 지온 소저가 별것 아닌 일로 마마를 놀라게 했으니 태후마마께서 죄를 물을까 걱정해야 하는 것은 지온 소저입니다.”

    이 말에 신비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네! 본궁은 황손을 품고 있으니 놀라는 게 정상이지.”

    그녀가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치듯 또 말했다.

    “본궁이 오늘 좀 놀랐으니 지금쯤 누워있는 것이 맞겠지?”

    큰 궁녀가 멍하니 물었다.

    “마마, 지온 소저를 혼내주시려는 겁니까?”

    신비가 손사래를 쳤다.

    “지온 소저를 왜 혼내나? 나한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대희가 지씨 가문 공자와 친하지 않은가? 지난번엔 그 일 때문에 소달과 사이가 틀어졌네. 이런 친분이 있으면 나중에 루 통정이 관청에 들어가서 나와 서로 도울 것인데 구태여 지 소저를 괴롭힐 필요가 없지.” 

    “그럼 왜 꾀병을 부리십니까?”

    신비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야 합리적이지! 됐다. 본궁이 몸이 좀 불편하니 가서 장 원판(院判)을 불러오고, 청녕궁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리거라.”

    * * *

    지온은 신비를 놀라게 한 후에 오후에 잠깐 쉬고, 태후에게 경전을 강의하러 갔다.

    지온이 이제 막 두 단락을 강의했는데 법당에 궁녀가 황급히 들어왔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왕 상궁이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

    “뭐가 큰일이냐?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면 가서 좀 배우고 오거라!”

    그 궁녀가 급히 사죄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됐다.”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여라. 무슨 일이 생겼느냐?”

    그 궁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지온을 힐끗 보며 보고했다.

    “장복궁에서 소식이 왔는데 신비마마께서 돌아가신 후에 몸이 불편하셔서 장 원판을 불렀다고 합니다. 놀라서 충격을 받으셨다고…….”

    태후는 의아했다.

    “놀랐다고?”

    왕 상궁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지온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뱀 때문에 놀란 것 말인가?”

    “예…….”

    태후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뱀? 궁에 무슨 뱀이 있느냐?”

    왕 상궁이 설명했다.

    “마마, 뱀은 없었습니다. 화예가가 꽃을 다듬다가 밧줄을 떨어트리고 간 모양인데, 지온 소저가 그것을 뱀으로 착각하여 그만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호.”

    태후가 이해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그럼 신비는 지금 어떠냐?”

    “신비마마께서는 지금 침대에 누워 계신데 장 원판의 말로는 아직 태아가 태내에서 안정되지 않아 조금 위험하다고 합니다…….”

    태후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어찌 그리 심각하단 말이냐? 가자, 장복궁으로 가보자.”

    왕 상궁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지온이 뒤따라 일어났다.

    “마마, 신녀…….”

    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오늘은 강의를 들을 수 없으니, 네 편할 대로 해라.”

    그리고 태후는 왕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법당에서 나갔다.

    지온은 왕 상궁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다.

    “여봐라, 가마를 준비해라.”

    지온이 웃음 지었다.

    자신이 따라가지도 못하게 하다니. 누군가 태후가 이 일의 내막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지온은 때려죽인대도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일을 정리해보면, 신비와 공모한 사람이 바로 태후였다.

    황후도 알고 있는지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황제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기는데, 태후는 왜 신비와 공모하여 회임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황제는 자손이 없었고 후궁에서 혈통을 잇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 * *

    태후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지온의 귀에 두 궁녀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태후마마께서는 아직도 장복궁에 계셔?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오시다니, 설마 무슨 일 난건 아니겠지?”

    “잘 모르겠어요, 들어보니까 장 원판도 아직 안 돌아갔대요.”

    “그렇게 심각해? 그럼 폐하께서는?”

    “아마 신비마마를 살피러 장복궁에 가신 것 같아요.”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야지. 후궁에서 겨우 회임 소식이 들렸는데…….”

    “그러니까요? 저 지온 소저는 왜 신비마마를 놀라게 한 건지, 그 죄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요?”

    지온이 책을 덮고 일어나 모퉁이를 돌아 나갔다.

    뒷담화의 주인공을 갑자기 맞닥뜨린 두 궁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이 몸을 굽히며 인사했다.

    “지온 소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장복궁에 가려는데, 누가 길을 안내해 줄 건가요?”

    두 궁녀가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들이 그러지 않았어요? 신비마마를 놀라게 하는 큰일을 저지르고 내가 어찌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가서 사죄해야지요.”

    궁녀가 말을 더듬었다.

    “지, 지온 소저,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됐어요, 낭자들을 나무란 건 아니에요.”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더군다나 제가 지금 잘못을 저질러서 태후께서 죄를 물으실지도 모르는 마당에 낭자들을 탓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서둘러요, 일단 길부터 안내해 주고, 일이 있으면 나중에 얘기하죠.”

    궁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다 결국 삼켜져 버렸다.

    “예.”

    궁녀는 생각했다. 

    ‘이 지온 소저는 정말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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