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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82)화 (282/385)
  • 282화. 그저 대역일 뿐

    옥비가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좀 식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누가 너더러 기분 좋아지라고 이 얘기를 한 줄 아느냐?’ 

    지온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이고, 가여워라. 열여섯 살짜리 어린 아가씨가 이런 혼사를 맺었으니 속으로 얼마나 기뻤을까? 루 통정은 외모도 남들보다 준수하고 재능도 출중하지. 성격은 또 고결하고 도도한 사람이니 신랑감을 찾는 소저들이 싫어할 리가 있나? 생각해보면 예전에 아가씨도…….’

    옥비는 바로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애석하게도, 너는 단지 대역일 뿐이다. 마음속에 숨겨진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지.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을 잘못 준 것 같아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 않으냐? 괜찮다, 결국엔 익숙해 질게야. 나처럼 말이야.’

    지온은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것을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장가를 가지 않은 것은 역시 나를 위해서였나? 이미 짐작은 했었지만, 말을 해줬으면 더 기뻤을 텐데!’

    그녀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물었다.

    “그러고는요?”

    목이 메는 듯한 지온의 목소리를 듣고 옥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 폐하께서 중매를 서겠다고 하셨는데 루 통정이 거절했네. 또 그가 폐하께 훗날 나이가 들면 상해에 은거하여 서원을 하나 더 짓겠다고 하더군. 누구를 위해서인지는 말을 안 해도 다들 짐작했지. 물론 루 통정이 이 일을 직접 말하지는 않을 게야.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말해봤자 괜히 속상할 뿐이잖나.”

    지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북양왕가 넷째 공자는 어찌나 과묵하신지 고백마저 암시하듯 했었다.

    “당연히 말하지 않겠지. 상대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구태여 말을 해서 뭘 하겠나?”

    옥비는 잠시 멈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

    “오늘은 그저 잡담이나 한 것뿐이니 자네도 어디 가서 말하지 말게. 루 통정은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싫어해서 폐하조차도 이 화제를 피하고 계시네.”

    지온이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말하면 아마 화내겠지요?”

    그가 화를 낸다면 그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옥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겠나? 지난번에 조방궁에서 자네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본궁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한 마디 해주려 했더니, 버럭 화를 내지 뭔가.”

    지온이 고개를 들고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그분이 마마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그랬단 말씀이세요?”

    그러며 지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지난번에 제대로 조롱을 당했나 보군!’

    옥비가 너그럽게 웃었다.

    “얼마나 오래 같이 공부한 사이인데, 본궁이 루 통정에게 그 정도 이야기도 못 할까?”

    지온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마마께도 화를 내니 저였으면…….”

    “그러니까 말을 꺼내지 말게. 다 지난 일이야. 가장 중요한 건 미래가 아니겠나.”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가 물었다.

    “루 통정이 자네한테 잘해주지?”

    지온 주저하며 말했다.

    “……몹시 잘해주십니다.”

    ‘그럼 당연히 잘해주고말고?’

    “그럼 됐네. 남자는 말이야, 마음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품고 있다네. 국사, 권위…… 감정이란 것은 원래 한 구석에밖에 없어. 하물며 그 루 통정인들 마음에 한 여자만 있을 리가 있겠나.”

    옥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도 말일세. 폐하께서는 본궁에게 몹시 잘해주셨지만, 그분도 결국 황제이시지. 어찌 평생의 한 쌍으로 살 수 있겠나? 자네도 나중에 알게 될 게야.”

    지온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그분이 설마……?”

    “첩을 들이는 것 말인가?”

    옥비가 전혀 거리낌 없이 대놓고 말했다.

    “당연히 그러겠지. 첩은 안 들인다 하더라도 정을 통하는 시녀 몇 정도는 생기지 않겠는가? 루 통정의 관직이 높아지면 질수록 본인이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아도 대인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길 게야. 예를 들면 자네와 얼굴이 닮은 사람이라던가…….”

    “그렇군요…….”

    지온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두고 보렴, 다른 사람이 마음을 준대도 그는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옥비가 다시 위로하며 말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아무래도 자네 체면을 세워주겠지. 게다가 지온 소저처럼 젊고 예쁜 부인이라면 당연히 일, 이 년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나. 그 후에는 뭐 어떤 집이든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지온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찻잔을 꽉 쥐었다.

    ‘내가 옥종화가 아니었다면 정말 속았을 수도 있겠네. 매일 자신이 누군가의 대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묻지도 못하고 얼마나 괴로웠겠어?’

    이 옥비마마는 자신도 남의 대역을 그리 오래 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꼭 이 쓰라린 맛을 보게 하려는 것인가? 지온은 옥비의 한이 이렇게나 강할 줄 정말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제삼자에게 이렇게 복수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지온은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신녀, 마마와 폐하께서도 동문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도 그분들과 비슷하셨습니까?”

    옥비가 옛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마마께서도 폐하를 연모하셨단 말입니까?”

    옥비는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후 말했다.

    “그렇네.”

    정말인가? 지온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계속 탐색하듯이 질문했다.

    “그때, 선대 태자 전하도 마마와 함께 공부하셨지요? 마마와 혼담도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녀, 외람되지만 한 가지 궁금합니다. 왜 선대 태자 전하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폐하를 좋아하셨습니까? 선대 태자 전하는 좋지 않으셨습니까?”

    옥비가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선대 태자께서는 당연히 좋은 분이셨지만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지. 뭔가 현실감이 안 느껴진다고 할까. 루 통정을 예로 들면, 자네가 루 통정을 많이 좋아하지 않는가? 무엇을 하든 다 최고로 잘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거리감이 생겨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얻기가 너무 어려워서 우러러보는 것에나 적합하지. 이런 이치는 자네도 나중에 이해하게 될 게야.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네. 루 통정에게 시집가는 것만 해도 아주 좋은 일 아닌가, 그렇지?”

    “예…….”

    지온이 고개를 숙여 입가의 웃음을 감췄다.

    ‘아, 감히 연모할 수가 없었던 거구나! 하긴, 어느 방면에서도 의안왕은 태자와 루안의 수준을 감히 따라올 수가 없었지. 저 둘에 비하면 옥비와 폐하 두 사람은 당연히 공통된 화제가 더 많았겠어. 예를 들면, 학문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등등 말이야.’

    지온이 마음속으로 웃었다.

    이 옥비마마에게는 그런 생각이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지온은 자신도 최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금벽이 간식을 가지고 들어와 보고했다.

    “마마, 능양주지께서 오셨습니다.”

    옥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총비의 위엄을 세우며 말했다.

    “본궁은 다른 일이 있으니 지온 소저는 이만 가보시게. 금벽아, 이 간식은 지온 소저에게 싸주거라.”

    “예.”

    지온이 싸준 과자를 들고 궁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능양진인이 스쳐 지나갔다.

    “사숙.”

    지온이 멈추고 인사했다.

    눈빛이 밝아진 능양진인이 지온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껴 능양진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저 지온과 인사만 나누었다.

    “사질도 여기 있었구나!”

    “예! 영광스럽게도 마마께서 차를 한 잔 내려주셨습니다.”

    능양진인은 만약 지온이 아직 그 일을 모른다는 것에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차 한 잔을 내려주었다고……. 내가 그 차 한 잔 때문에 놀라 하마터면 오줌을 쌀 뻔했었다.’

    “마마께서 사숙을 기다리고 계시니 사질은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지온은 다시 한번 인사하고 몸을 돌려 청녕궁으로 돌아갔다.

    다른 쪽에서 추아가 재촉했다.

    “능양주지, 마마께서 아직 기다리고 계십니다!”

    능양진인은 다시 돌아보지 못하고 예하고 대답했다.

    “예.”

    정실에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갔다.

    옥비는 전전긍긍하는 능양진인을 보고 물었다.

    “물건은 가져왔는가?”

    능양진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둑질하듯 주위를 살피고, 덜덜 떨면서 작은 도자기병을 꺼냈다.

    “가, 가져왔습니다.”

    * * *

    지온이 청녕궁으로 돌아오니 점심 식사시간이었다.

    태후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어딜 갔었느냐? 조금 전까지도 궁녀가 널 못 찾고 있던데.”

    지온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산책하러 나갔다가 공교롭게도 옥비마마를 만나 영수궁에 잠시 앉아 있다 왔습니다.”

    태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궁은 아주 넓고 규칙이 엄격한 곳이다. 앞으로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밖에 나가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구나.”

    이 말에는 훈계하는 의미가 상당히 담겨 있었다. 아마 다른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다면 그 자리에서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온은 그저 대범하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예.”

    지온은 대답하고 나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웃음을 머금고 몸을 숙였다. 

    “마마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하자 태후는 되레 어리둥절해서 더는 허세를 부리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얼굴도 두껍구나, 어쩐지 아봉이 너를 좋아하더라니.”

    지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 신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구해주시지 못할까 봐 걱정하셔서 이러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마의 호의를 알고 있으니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지요.”

    태후는 더 민망해져서 정색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힘들어서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됐다, 치우고 밥이나 먹자꾸나.”

    “예.”

    점심이 차려지자 지온은 말석에 앉았다. 태후가 젓가락을 들자 그녀도 따라 식사를 했다.

    태후는 입맛이 없어서 몇 입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온은 오히려 입맛이 너무 좋아서 눈앞에 있는 요리를 하나하나 다 맛보았다.

    태후가 희한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너 대장공주를 모시고 식사할 때도 이러느냐?”

    지온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마.”

    “그럼?”

    지온이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식사하시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한 끼를 먹으려면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립니다.”

    태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사람도 참, 아직도 그리 채신머리가 없다니.”

    태후는 지온이 말하면서 계속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을 보고 말했다.

    “네가 예의는 잘 배운 것 같은데, 누구한테 배운 게냐?”

    “따로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고, 그저 일상적인 것입니다.”

    태후는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능운진인이 떠난 지 너무 오래돼서 내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구나.”

    그리고 이어 말했다.

    “너는 계속 먹어라, 대장공주와 함께 할 때처럼 편하게 하려무나.”

    “예.”

    지온이 다시 젓가락을 들고 식사에 집중했다.

    태후는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입맛이 돌아와 지시했다.

    “양갱 한 그릇 가져오거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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