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81)화 (281/385)
  • 281화. 옛일을 이야기하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비빈들의 비평이 들려왔다.

    “이 요망한 여우는 아주 못돼 처먹었네! 황후를 죽이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까지 해쳤어!”

    “맞아요! 총애를 독차지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여기까지 말하자 몇 명의 시선이 옥비에게로 쏟아졌다.

    옥비는 불쾌해졌다. 

    ‘이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예전에 폐하께서 날 좀 더 총애하셨을 뿐, 나는 누구를 해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날 달기와 비교하는 거지?’

    옥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고 황후가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했다.

    “자네들 너무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그냥 재미있자고 듣는 옛날이야기일 뿐이네. 지온 소저, 안 그런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마께서 역시 영민하십니다. 이건 모두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것이고, 구미호나 요괴 따위는 없습니다. 백성들이 이런 신기하고 기괴한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일수록 더욱 과장해서 꾸며냅니다.”

    태후가 말했다.

    “이것이 비록 이야기일 뿐이긴 하지만, 그 안에 상당한 도리가 담겨 있구나. 그 제신(*帝辛: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이 원래 명군이었다가, 나중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어리석은 군주가 된 것은 주변에 소인배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너희도 이 교훈을 거울삼아, 절대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거라.”

    비빈들이 황급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예.”

    태후는 피곤한 기색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예.”

    궁녀가 와서 태후를 부축하자, 태후는 그만 쉬러 갔다.

    비빈들은 물러갔다.

    지온도 마침내 쉴 시간을 얻어 대충 정리하고 근처나 한 바퀴 산책하며 길을 탐색해 볼 참이었다.

    그녀가 막 궁문을 나서는데, 생각지도 않은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지온 소저.”

    지온은 뒤돌아보고 의외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옥비마마?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까?”

    옥비는 대답하지 않고 지온에게 물었다.

    “지온 소저, 지금 산책하는 중인가?”

    지온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옥비가 말했다.

    “그럼 같이하는 게 어떤가, 본궁도 산책하러 나왔네.”

    지온은 마땅히 거절할 구실이 없어 그녀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다 보니 지온은 자신도 모르는 새 영수궁에 도착했는데 옥비가 다시 말했다.

    “지온 소저, 들어와서 차 한 잔 어떤가? 자네의 차 솜씨가 괜찮더구먼. 공교롭게 본궁도 조금, 아니 마침 서로 배울 수 있고 좋을 것 같은데.”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감히 마마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옥비는 포기하지 않고 초대했다.

    “왜 안 오는가? 들어오게!”

    옥비가 데리고 있는 내시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지온은 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마께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

    그녀가 들어가자 영수궁 대문이 닫혔다.

    궁녀와 내시가 모두 물러가고 옥비와 수행 궁녀만이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옥비가 걸으면서 말했다.

    “지온 소저 그거 아는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본궁은 자네가 아주 낯익었네.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람이랑 아주 많이 닮았거든.”

    지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가?”

    옥비는 거들먹거리는 눈빛으로 뒤돌아보았다.

    지온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당연히 알지요. 마마, 잊으셨습니까? 저는 상해(桑海)에서 그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온 소저, 들어오게.”

    지온이 인사를 하고 탁자 앞에 앉았다.

    옥비가 상석에 앉아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차를 내리는 그녀의 움직임은 아주 우아했고, 불 조절도 아주 좋았다.

    지온은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도(茶艺) 방면으로는 금벽이 자신보다 나았다. 확실히 본인은 차를 탈 기회가 금벽보다 적었으니, 몸가짐이 보기 좋은 것 외에는 그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옥비가 지온의 앞으로 차 한 잔을 밀어 놓으며 말했다.

    “지온 소저, 드시게.”

    지온이 감사 인사를 하고 찻잔을 들었다.

    옥비는 지온을 보고 있었다. 지온의 얼굴에 걸린 미소에 무언가 숨은 뜻이 있는 것만 같았다.

    지온은 표정 변화 없이 차의 향을 맡고 맛을 보며 천천히 다 마셨다.

    “차가 아주 맛있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치켜세웠다.

    “마마께서 다도에 이리 정통하시니, 소녀는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옥비는 그녀의 진심 어린 미소를 보고 텅 빈 찻잔도 한 번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지온 소저, 궁에 들어올 때 대장공주마마께 말씀을 안 드린 것 같은데 경계심을 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지온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계심을 가져야 한단 말씀입니까? 왜요? 궁에 계신 마마님들은 다 착하고 상냥하신데 누가 저를 해치겠습니까?”

    옥비가 차갑게 웃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네, 자네가 방금 마신 이 차를 예로 들면…….”

    말을 아직 반밖에 하지 않았는데 지온이 말을 끊었다.

    “이 차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어쩐지 다들 마마의 차는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는 입술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마마, 혹시 저를 놀라게 하려고 차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럴 리가요? 마마와 같이 아름답고 선량하신 분이 어떻게 저와 같은 어린 소녀를 괴롭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지온을 겁주려 했던 옥비는 할 말이 없었다.

    “…….”

    그녀가 먼저 말을 해버렸으니 인제 와서 놀라게 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방금 그녀가 자신을 칭찬했는데 지금 그걸 부인하면, 스스로 아름답지도 선량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꼴 아닌가?

    옥비는 마음이 답답해져 차를 벌컥 들이마셨다.

    뜻밖에 옥비는 물이 너무 뜨거워서 급히 삼키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마.”

    금벽이 급히 앞으로 다가와 흘린 물을 닦았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는 통에 지금까지 올려놓았던 옥비의 기세가 다 꺾여버렸다.

    그녀는 아주 속상했다.

    ‘정말 이상하네. 아가씨가 사람을 놀라게 할 때, 이렇게 하지 않았나? 왜 내가 하면 매번 일이 잘 안 풀리는 거지?’

    지온이 또 친절하게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저희 스승님께서 항상 모든 일은 급하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두르면 실수가 생기기 때문에 평상심을 유지해야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오히려 지온에게 한마디를 들은 옥비는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그저 목구멍이 조금 불편할 뿐일세.”

    “그러시군요. 신녀가 오해했나 봅니다.”

    지온이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르면서 비위를 맞추듯 말했다. 

    “신녀가 궁에 들어오기 전에 양어머니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마마께서는 선량하고 박학다식한 여인의 모범이시니 마마를 보고 많이 배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마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다니 저에게는 정말 큰 행운입니다. 신녀가 술을 대신해서 차를 한잔 마마께 올리겠습니다.”

    옥비가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 듯 말을 이어받았다.

    “대장공주마마께서 과분한 칭찬을 하셨구먼. 본궁은 단지 겉으로만 조금 배웠을 뿐이네. 정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지.”

    “그렇습니까?”

    지온은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자네도 아는 사람이네.”

    옥비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자네가 상해에서 만난 그 언니일세.”

    지온이 오, 하고 경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온 소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은가?”

    지온은 그녀의 의도에 맞춰 고분고분하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알고 싶지요. 원래 인사나 한번 나눈 정도의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연히 마마를 만난 덕에 그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마마께서 그분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시기에 아쉬워서 한숨이 다 나왔습니다. 참, 마마, 그분이 누구라고 하셨지요?”

    옥비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녀도 자네와 신분이 비슷하지. 우리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 돌아가신 분의 고아를 입양해 거의 반 손녀처럼 키우고 가르치셨어. 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네.”

    이 말을 할 때, 옥비의 은은한 눈빛은 마치 예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 언니가 옥형 선생께서 입양한 손녀란 말씀입니까?”

    “그렇네.”

    옥비가 고개를 돌려 금벽에게 지시했다.

    “간식 좀 가져오거라.”

    금벽이 대답하고 물러났다.

    방안에 그들 둘만 남았다. 옥비는 잔에 남은 차를 털어 씻으며 말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해서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바로 배웠지.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보고 열등감을 느끼라고 하늘에서 이런 사람을 세상에 내놓은 것인가 하는 이상한 생각도 했어. 무엇을 하든 그녀 앞에서는 다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려서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게 되곤 했지…….”

    뒷부분으로 갈수록 옥비의 목소리는 느리고 낮아졌는데 마치 이 얘기가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상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때, 지온이 갑자기 한 마디 끼어들었다.

    “마마께서 이미 천하에 이름난 재녀이신데 이 언니가 마마보다 더 똑똑하단 말씀이신가요?”

    “…….”

    옥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곧 터질 것 같이 벌게졌지만, 옥비는 말을 겨우 이어갔다.

    “아무튼, 그녀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고 미모도 뛰어나서 서원 전체에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네.”

    다행히 지온은 더는 방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옥비는 뚫어질 듯이 지온을 쳐다보았다.

    “지온 소저가 루 통정과 약혼을 했으니 루 통정이 어린 시절에 무애해각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옥비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공교롭게도 루 통정이 무애해각에서 공부할 때 늘 그녀와 함께 다니셨네.”

    “오…….” 

    지온의 눈빛이 달라졌다.

    옥비는 마침내 보고 싶었던 모습을 보아 마음속의 울분이 풀리는 듯했지만, 입으로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 젊고 예쁜 소녀를 사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 루 통정도 그때는 아직 어렸는데, 그렇게 예쁘고 재능도 많은 소녀를 만나면 설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지온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모가 뛰어나고 재능도 많은데 루안이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었겠어?’

    하지만 입으로는 한껏 풀이 죽은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군요…….”

    옥비가 웃음을 지었다.

    “그건 다 옛날 일이지.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지온 소저는 그저 듣고 잊어버리면 되네. 마음에 두지 말게.”

    지온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마음이 답답한 듯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 그녀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루 통정이 정말 그 언니를 좋아했나요?”

    “그럼.”

    옥비는 마음이 상쾌해서 말이 많아졌다.

    “서원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걸? 매년 칠석에 등불을 날렸는데 우리가 훔쳐보러 가고는 했지. 대담한 학생들은 고백의 시구를 등불에 써서 날리기도 했었어. 그런데 루 통정만 아무것도 쓰지 않더군. 나중에 보니 사실은 그도 썼지만 날리지 못한 거였다네.”

    지온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났다.

    ‘그 겁쟁이가 알고 보니 이런 짓도 했었구나.’

    “루 통정이 그 언니를 정말 좋아했나 봅니다. 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많이 상심했겠지요?”

    “아니면 왜 지금껏 장가를 가지 않았겠나?”

    옥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온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지금쯤 눈에 눈물이 핑 돌았겠지? 약혼자 마음속에 계속 다른 여자가 있다는데, 어느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

    “나중에 조방궁에서 지온 소저를 만나고 본궁이 정말 깜짝 놀랐다네. 자네는 그녀와 얼굴은 닮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흡사해서 마치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어. 루 통정이 자네와 약혼했다는 걸 알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본궁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자네가 아니면 그 사람이 누구와 결혼을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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