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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80)화 (280/385)
  • 280화. 대인, 살려주십시오

    루안의 입가에 한 가닥 웃음기가 돌았다. 마치 조롱하는 것 같았는데 일순간에 그 미소는 사라져서 능양진인은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이런 비약은 궁에만 있습니다. 보통 첩자에게 사용해서 반란을 막는 데 쓰지요. 월월홍이라고 하는 이유는 매달 해독제를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그의 설명을 따라 능양진인은 굽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눈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예, 예, 예. 대인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 약을 아시면 혹시…….”

    루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 약이 첩자에게 쓰이는 이유는 다른 사람은 해독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능양주지가 이런 독을 먹었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능양진인의 입이 벌어지고 눈에선 희망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반문했다.

    “해독제가 없습니까?”

    능양진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러니까 결국엔 죽게 된다는 거야? 그럼 이것들을 뭐 하러 돕는담? 차라리 옥비의 말을 듣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그것도 안 돼! 안 그래도 궁에서 자손을 얻기 힘든데 전에 현비의 일도 있었으니, 이번에 신비마저 사고가 나면 분명히 엄중하게 조사할 거야. 내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겠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들키면 바로 죽는 거야!’

    결국엔 모두 죽을 길인데, 그럼 뭣 하러 이런 인간들과 얽혀 힘을 뺀단 말인가? 차라리 낙영각으로 돌아가 즐겁게 한 달을 보내고 죽을 때 시원하게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능양진인이 밖으로 나가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주지, 잠깐 기다리십시오. 어딜 가려는 겁니까?”

    능양진인이 고개를 돌리며 넋이 나간 듯이 말했다.

    “가서 죽을 날이나 기다려야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루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는 순간, 어두컴컴했던 후전이 다 밝아지는 것 같았다.

    루안이 말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의원에게 진찰도 안 받았는데 주지께서는 왜 벌써 포기하려 하십니까?”

    ‘의원?’

    능양진인은 깜짝 놀랐다.

    루안은 누군가를 불렀다.

    “고찬.”

    “예.”

    루안의 그림자 뒤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몸이 건장하고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생김새에 능양진인은 깜짝 놀랐다. 마치 종규(*钟馗: 중국에서 역귀를 쫓아낸다는 신)가 현실로 내려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여기 숨어서 뭐 하려고?’

    루안이 말했다.

    “들었느냐? 능양주지가 월월홍에 중독됐다고 하니 맥을 한번 짚어 보아라.”

    “예.”

    고찬이 능양진인 쪽으로 걸어왔다.

    능양진인은 그의 흉악한 생김새가 무서워 자기도 모르게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고찬이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피하십니까? 이리 오십시오, 맥을 좀 짚겠습니다.”

    ‘맥을 짚어? 이 사람이 바로 루 통정이 말하는 의원이란 말인가? 설마? 의원은 다들 점잖지 않나? 이 사람은 생김새가 백정이랑 다를 바가 없는데.’

    고찬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뻗어, 망설이는 능양진인을 끌어당겨 손목을 짚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능양진인의 목을 젖혀 그녀의 귀 뒤를 보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검사한 후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고찬에게 목이 잘릴까 봐 몹시 두려웠던 능양진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록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목이 비틀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인.”

    고찬이 돌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루안이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역시 그렇군.”

    능양진인은 그들의 반응에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루 대인, 두 분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루안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질문했다.

    “능양주지, 월월홍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응?’

    루안이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손톱만큼의 월월홍을 만들려면 희귀한 약재가 수없이 필요합니다. 궁에 상비하고 있는 것으로는 어림잡아도 두, 세 개밖에 만들 수 없지요. 이렇게 귀한 약을 아까워서 주지에게 쓸 수 있겠습니까?”

    능양진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사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그걸 유용(流用)할 자격이 없지요.”

    능양진인이 마침내 알아듣고 소리쳤다.

    “그러면 저는 중독된 게 아닙니까?”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월홍을 먹으면 귀 뒤에 붉은 점이 생기는 특징이 있는데, 마치 빨간 사마귀 같지요. 고찬이 방금 확인해 봤는데 붉은 점이 없다고 합니다.”

    능양진인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럼 중독이 안 된 거지요? 그분이 절 속인 거였습니까?”

    “예, 지금은 중독되지 않았습니다.”

    루안이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중독이 안 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요.”

    웃고 있던 능양진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다시 그 말을 꺼냈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 * *

    능양진인이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루안이 고찬을 데리고 나왔다.

    청옥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루 통정, 가시는 겁니까?”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다 끝났소. 무슨 변동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야우를 부르시오.”

    “예.”

    돌아가는 길에 고찬은 걱정이 많았다.

    “대인, 그분은 너무 악랄한 것 같습니다. 지온 소저가 지금 궁에 계시는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음은 악독하지만, 방법이 너무 서투르지. 안심해라. 아마 장난은 못 칠 거야.”

    고찬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웃었다.

    “이 능양주지,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자기가 중독된 줄 알았나 보더군요. 그런 약을 그 사람한테 쓰면 너무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루안이 말했다.

    “됐다,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예.”

    고찬이 반걸음쯤 뒤떨어져 저도 모르게 루안의 귀를 쳐다보았다.

    귀 뒤쪽, 귀밑머리 부근에 작은 붉은 점이 반쯤 어렴풋하게 숨겨져 있었다.

    * * *

    청녕궁에서 이틀을 보낸 뒤 지온은 마침내 신비를 만났다.

    그녀가 비빈들과 함께 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왔기 때문이다.

    지온은 태후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도중에 궁녀의 보고를 듣고 일어나려다가 태후에게 제지당했다.

    “다들 몇 마디하고 돌아갈 테니 피할 필요 없다.”

    잠시 후, 황후가 비빈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지온이 일어나서 그녀들에게 절을 하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

    황후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마음이 편안해 보이시는구먼! 지온 소저가 고생이 많네.”

    지온은 겸손하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황후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태후가 말을 끊었다. 

    “이만 됐네, 너희들은 다 한집안 식구니까 사양하지 말고 앉거라.”

    “예.” 

    지금 있는 곳이 불당이라 태후와 지온 모두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에 비빈들도 덩달아 부들방석에 앉게 되었다.

    황후가 친절하게 물었다.

    “신비, 자네는 의자에 앉겠나?”

    신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황후마마, 마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첩도 방석에 앉는 것이 편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황후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옥비가 안당에 모셔진 관음보살을 바라보다 지온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부처를 믿으시는데, 지온 소저는 도가 제자로서 불당에서 도경을 강의하는 것이 꺼려지지는 않는가?”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네. 조방궁은 도가 문파인데 태후마마께서는 일 년 내내 관음에 공양을 드리시잖아. 불교와 도교는 서로 다른데!’

    그런데 지온은 도리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티를 내며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옥비마마께서 일부러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옥비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류명주가 듣고 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나와서 말을 꺼냈다.

    “지온 소저, 무슨 말이에요?”

    지온이 말했다.

    “이 관음보살은 바로 도가의 자항도인(*慈航道人: 도교의 신선 중 하나)입니다! 꺼려질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옥비마마께서는 여러 책을 많이 읽으셨으니 분명히 알고 계셨을 텐데 이게 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빈들은 이 자리에 신분이 낮은 미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기회를 포착해 아첨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옥비 언니는 정말 박학다식하시네요. 저도 몰랐어요!”

    이에 대해 전혀 몰랐던 옥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깊은 의미를 담은 눈길로 지온을 쳐다보았다.

    “학문에는 전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쪽 방면에는 역시 지온 소저가 더 정통하구나.”

    그리 말하던 신비가 옥비를 한 번 보고 다시 지온을 한 번 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정말 이상하네. 옥비는 왜 지 소저에게 이렇게 적대적이지? 만나자마자 위세를 부리다니 태후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는 것도 잊었나 보군. 그런데 둘이 부딪쳤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류명주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지온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류명주도 이러한 분위기를 읽었다. 혹시 자신이 행적을 들켜 옥비가 지온 소저가 자신을 도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지온에게 원한을 품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후는 그들 사이의 암투가 거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흥미진진해하며 캐물었다.

    “이 관음보살이 도가와 관련된단 말이냐? 내가 이리 오랫동안 관음을 모셨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다니. 네가 한번 설명해 보는 게 어떠냐?”

    “예.”

    지온은 고개를 숙이고 곧 여러 비빈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자항도인은 자항보도천존(慈航普度天尊)이라고도 합니다. 원시천존(元始天尊) 문하의 제자이고 십이금선(十二金仙) 중의 하나이지요…….”

    그녀가 태후에게 도경을 강의할 때는 원래 그다지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말을 하다가 도중에 여러 민담 이야기로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태후의 요청으로 아예 연의(*演义: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소설)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아주 변화무쌍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처음에 비빈들은 그저 편하게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녀들은 줄거리를 따라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질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요? 구미호(九尾妖狐)가 정말 소달기(苏妲己)가 됐어요?”

    또 다른 빈이 끼어들었다.

    “언니 못 들어봤어요? 상나라의 주왕과 달기 이야기잖아요!”

    “달기야 알지! 근데 이건 구미호잖아!”

    지온이 빙그레 웃었다.

    “예, 구미호 말고도 머리 아홉 개 달린 꿩(九头雉鸡精), 옥석 비파(玉石琵琶精)…….”

    옥비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야기의 풍격이 자꾸 어느 한 사람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지온을 바라보았다.

    이 얼굴은 자신의 기억 속의 그 사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 조금도 닮은 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말하는 자태나 이야기할 때 끊어 읽는 방식이 너무나 똑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겨우 한 번 만났다고 이렇게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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