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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9)화 (279/385)
  • 279화. 제가 말씀드리지요

    지온은 고개를 숙여 입가의 웃음기를 감췄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실 어젯밤의 일은 지온이 일부러 꾸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대 태자의 묘사에 따르면 태후는 마음씨가 선량하고 자애로운 부인으로 남편과 정이 깊었고 아들에 대한 보살핌이 지극했다.

    남편과 아들이 그런 방식으로 죽었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이 없다고 한다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태후는 복수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 일가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였다.

    이렇게 가슴 가득한 시름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 채 억누를 수밖에 없으니 어찌 원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제 태후를 보고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녀는 과연 듣자마자 화를 냈다.

    이는 태후가 마음속의 원한을 풀기 어려워 체면조차 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낮에 생각한 것이 밤에 꿈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원래도 수면 문제가 있는 태후가 이런 자극을 받으면 옛날 일이 꿈에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지온은 태후를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묻는 것을 보고 이미 십중팔구 짐작을 하고 있었다.

    “신녀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마께서는 마음이 불안정한 것입니다.”

    지온은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들은 악몽을 통해 나타납니다.”

    주렴 너머는 조용했고 태후는 말이 없었다.

    왕 상궁이 흘끗 주렴 쪽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온 소저, 무슨 방법이 있나요?”

    지온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겉만 치료할 뿐 근본을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근본을 치료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왕 상궁은 감히 묻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엄청난 말을 쏟아낸 그녀에게 물으면 또 무슨 말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왕 상궁은 이렇게 대답했다.

    “불면증은 완치가 어려우니 증상을 완화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지요.”

    이러한 대답을 예상했던 것인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양어머니처럼 훈향을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반년 전에 양어머니께서 태후마마처럼 수면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훈향을 바꾸고 밖에 나가서 많이 걸으셔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왕 상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약방문을 써 주세요.”

    이렇게 말하며 왕 상궁은 궁녀를 불러 필묵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지온은 거리낌 없이 약방문을 쓰고 말했다.

    “마마께서 좀 나아지시길 기다렸다가 신녀가 다시 경전을 강의하러 오겠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정신이 분산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정신도 안정됩니다. 마마께서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한참 후에 주렴 뒤에서 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다.”

    처음의 분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온은 미소 지으며 더 머무르지 않고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왕 상궁이 가서 주렴을 걷었다.

    태후는 맥이 빠진 표정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는데 눈빛을 읽기 어려웠다.

    왕 상궁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마…….”

    태후는 무의식적으로 손난로를 쓰다듬다가 물었다.

    “자네 생각에는 저 아이가 믿을 만한 것 같은가?”

    왕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쇤네는 잘 모르겠습니다.”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당연히 아봉은 믿지. 하지만 이 계집애는 루씨 집안과도 관계가 있으니 내 걱정이 되어…….”

    왕 상궁은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마마, 노비가 한 말씀 드리자면, 마마께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마마를 향해 계략을 꾸밀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온 소저는 대장공주마마께 잘 보여 이미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는데 지금 와서 마마께 잘 보여 봐야 얼마나 더 좋을 게 있겠습니까?”

    ‘그래! 혼사도 이미 정해졌는데 나처럼 권력도 없는 태후에게 잘 보여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데 그 아이가 이야기한 건…….”

    태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왕 상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소저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선황제와 선대 태자 전하를 그리워하는 것이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닌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태후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자신은 단지 남편과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럼 그 아이더러 여기 남으라고 할까?”

    왕 상궁이 대답했다.

    “청녕궁이 너무 적막합니다. 마마께서 비빈들을 오지 못하게 하시니, 저런 어린 아가씨라도 몇 명 곁에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효심을 보이셨으니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후는 설득당했다.

    “네 말이 옳다. 본궁이 평정심을 잃었어. 그 소저가 머물겠다면 머물게 해주거라. 상례(*常礼: 일상적인 예의 범절)에 따라 평소대로 하면 될 게야.”

    한편, 인사를 하고 떠나는 지온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어쨌든 태후에게도 옛일을 회상할 시간을 좀 주어야지.’

    * * *

    능양진인은 이미 며칠째 외출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낙영각(落英阁)에 가두고 귀인의 초대마저 뒤로 미뤘다. 매번 제자가 들어와서 보고할 때마다 그녀는 깜짝깜짝 놀랐다. 이러다가는 자신이 먼저 놀라 죽을 것만 같았다.

    그날 옥비가 한 말을 생각하니 능양진인은 이가 갈렸다.

    ‘낙태약! 감히 낙태약을 달라고 하다니! 궁문 안팎을 얼마나 엄밀하게 조사하는데,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약을 궁으로 가져간 것이 알려질 테고, 그럼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말을 안 들으면, 그때 마신 그 차 때문에…….’

    능양진인은 손발에 힘이 빠져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정말 나를 죽이려는 것일까? 아첨하는 소인배들 앞에서도 아무 탈 없이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왔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스승님.”

    이때 능양진인의 제자가 뛰어들어왔다.

    능양진인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무슨 일이냐?”

    제자가 인사하며 말했다.

    “청옥, 청옥 사저가 뵙기를 청합니다.”

    ‘청옥?’

    능양진인은 더욱 놀랐다.

    설마 자신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그 계집애가 의심을 품은 것일까?

    ‘망했군, 망했어. 이쪽은 옥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압박하고, 저쪽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있구나. 누구에게 미움을 사도 결국은 죽겠네! 어떡하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스승님?”

    회피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능양진인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들어오라고 해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청옥이 들어와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인사했다.

    “주지.”

    고개를 든 청옥은 어리둥절해졌다.

    능양진인은 원래 외모를 중시해서 항상 단정하고 아름답게 치장하여 마치 득도한 고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고 눈은 흐리멍덩했으며 두 볼은 움푹 들어가 초췌했다.

    청옥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할 것을 미뤄두고 먼저 그녀의 상태에 관해 물었다.

    “주지, 왜 이러십니까? 아주 피곤해 보이시는데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닙니까?”

    능양진인이 몸을 부르르 떨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그러나 청옥은 믿을 수 없었다.

    “주지, 지금 안색이 이 모양인데 어찌 아니라고 하십니까? 의원을 불러 진료를 받아 보시지요.”

    이렇게 말한 청옥은 제자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고개를 돌렸다.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방전을 장악하고 도관의 사무를 도맡아 하면서 청옥의 위세는 점점 높아졌다. 처음의 순종적인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떤 일들은 두말없이 책임지고 해냈다.

    능양진인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청옥이 일부러 자신을 놀라게 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속으로 지온을 떠올리며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됐어! 별일 아니야.”

    청옥이 고개를 돌렸다.

    능양진인은 오히려 간절한 얼굴로 청옥을 바라보며 비위를 맞추듯 말했다.

    “청옥 사질, 오해하지 말아라. 이 사숙이 일부러 자네들한테 말을 안 한 게 아니네. 사실, 지온 사질이 아직 안 돌아왔잖나.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 말을 들은 청옥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리고는 그녀를 떠보려고 입을 열었다.

    “주지, 진작 말씀을 하시지요! 안 그래도 사저께서 미리 당부하셨습니다. 사저가 자리에 없더라도 주지께 무슨 일이 있으면 당연히 사람을 보내 말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랬는가?”

    능양진인은 암암리에 요행을 부려보려 했으나 알고 보니 그 계집애가 벌써 준비를 다 해 둔 것이었다. 좀 전에 말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온이 자신이 다른 마음이 생겼다고 의심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내심 옥비의 난폭한 수단보다 지온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면…….”

    * * *

    저녁 무렵, 향을 피우는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자 사방전 밖은 쓸쓸했다.

    능양진인이 궁 밖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타깝게도 한 무리의 여도사들만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옥이 나와 말했다.

    “주지, 들어오십시오.”

    능양진인이 감사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후전은 예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온이 늘 앉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능양진인은 루안을 보며 뜻밖이라는 생각에 놀라면서도 수긍했다. 어쨌든 지온과 이미 혼약을 맺었으니 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능양주지, 앉으십시오.”

    루안은 관복을 입지 않아 그리 엄숙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능양진인은 인사를 하며 의자에 앉았지만, 엉덩이를 겨우 3분의 1밖에 붙이지 못했다.

    함옥이 와서 차를 올렸다.

    능양진인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루안을 훔쳐보았다.

    루안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받친 그의 손가락이 길고 정갈했다. 황혼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춰 차분한 용모가 더욱 돋보였다. 사람의 넋을 놓게 만드는 어떤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능양진인은 설사 마음속으로 그들을 죽어라 욕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예비부부의 외모가 굉장히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 보게, 이걸 다른 사람이 보면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고 생각하지 않겠어? 저 껍데기 아래에 그런 악마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냔 말이야?’

    그녀가 정신이 나가 있는 사이, 루안은 이미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주지, 방금 오신 이유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 오!”

    이 말에 뭔가 깨달은 능양진인이 청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청옥은 모른 척하며 밖으로 나가서 문을 지켰다.

    능양진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몸을 굽히며 절을 했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빈도, 빈도 못 살겠습니다.”

    루안이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주지께서는 이리 멀쩡하시지 않습니까? 왜 못 살겠다고 하십니까?”

    능양진인은 그 차를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빈도……빈도가 독을 먹어서 해독제를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살 수 있는데…….”

    루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가 입 밖으로 가볍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

    “월월홍(月月红)?”

    “맞습니다!”

    능양진인은 매우 기뻤다. 

    “바로 그 약입니다. 대인께서는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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